세탁기가 고장 났다. 냉수 급수가 되지 않는다. 김희진의 소설 <옷의 시간들>처럼 애인이 떠난 것도 아닌데 세탁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사용했기에 고장이 난 것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 오주처럼 빨래방에 갈 수 없다. 내가 알기엔 이 소읍엔 빨래방이 없다. 내게 속한 옷들, 수건들, 양말과 속옷들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줄 수가 없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 적에도 단 한 번도 빨래방을 이용하지 않았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세탁기들과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한다. 다시 이 소설을 읽어볼까. 한데 책이 어디에 있을까.

 

 빨랫감을 바구니에 옮겨 넣고 나름 애를 써 봤지만 세탁기는 화가 난 사람처럼 뚱하다. 검색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천했지만 요지부동이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상담을 예약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상담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엔 상담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아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상담 예약을 해야만 했다.

 

 전화를 기다리는 일은 조급함을 동반한다. 그리고 지루하다. 상담 전화가 끝났다고 해서 고장 난 세탁기가 바로 수리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방문 기사를 기다려야 하고, 부품을 바꾸게 되면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나의 조급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급하다.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내가 받지 않는다면 다시 전화가 걸려 올 텐데 말이다. 세탁기 고장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W. G. 제발트의 소설 <현기증. 감정들>의 표지 이미지처럼 말이다.

 

 하루 종일 세탁기가 나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단어는 세탁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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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0-2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같아요

자목련 2014-10-27 10:49   좋아요 0 | URL
그리 보아주시면 영광이지요. 하늘바람 님, 고맙습니다^^

조선인 2014-10-2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수 급수가 안 된다면 일단 온수급수와 연결부위를 바꾸면 어떨까요?

자목련 2014-10-28 09:57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방문 기사분이 부품을 교체하는 것보다 그 방법을 쓰면 어떠나고 하셨어요.
아주 오래된 세탁기라 온수급수도 안 될 경우에 부품을 교체하는게 더 낫다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출장비는 지급되었지요, ㅎ
조선인 님,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mira 2014-10-2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세탁기 돌려놓고 이리 시간 때우고 있네요 ㅎㅎ

자목련 2014-10-28 09:54   좋아요 0 | URL
지금쯤 어제의 빨래가 잘 마르고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