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나이를 지녔다.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다. 지나고 보면 모두 다 대수롭지 않은 감정들이란 말이다. 어제가 비의 시간이었다면 오늘은 햇볕의 날들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우산이 지배했던 어제의 물기는 증발해버렸다. 베란다에 널어 놓은 장우산은 말끔해졌다. 그런 우산을 바라보는 일은 유쾌하다. 좋아하는 비가 내리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기다렸던, 정말 기다렸던 김연수의 산문집이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이 산문집을 봄부터 기다렸다. 국화꽃 피는 가을에 만날 줄도 모르고 목련이 피는 순간부터 기다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제부터 김연수의 다른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는 말이다. 『소설가의 일』, 간단 명료하고 매우 정확한 제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 충동적인 구매를 했다. 산문집에 언급된 러셀 셔먼의 『피아노 이야기』를 주문한 것이다. 절판이라 중고로 주문했다. 알라딘 중고로 주문한 경우는 두 번뿐인데, 모두 김연수에 의한 책이었다. 나머지 한 권은 『선영아, 사랑이라니』 였다. 아, 나는 왜 이토록 김연수에 빠져드는가.
김연수와 함께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도 반갑다. 제목에서 전해지는 결연한 의지가 어떤 용기를 부여하는 듯하다. 그런 제목으로는 마류야마 겐지의 『나는 길들지 않는다』가 있다. 지난 산문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기대가 높았던 탓인지 흡족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산문집은 조금 더 강렬한 느낌이면 좋겠다. 그리고 존 그린의 장편 『이름을 말해줘』는 아주 예쁜 소설일 것 같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이미지의 크기는 애정의 크기다.)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잘 쉰 셈이다. (『지지 않는다는 말』 53~54쪽)
읽지 않은 책이 많다는 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빨리 읽어줘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빨리 김연수와 황정은의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 읽고 책장에 넣어둔 책은 그 느낌을 표현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독자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