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좋은 빗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좋아진다. 편안해진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빗소리를 듣는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지만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하나의 계절이 끝났다는 마침표 같은 비가 될 것이다. 주말에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리면서 여름의 흔적인 전기세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했다. 누진세가 정말 무섭다는 걸 실감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위는 강렬할 것이다. 점점 새로운 계절을 만든다. 다가오는 계절을 살기 위해 밭에는 무와 배추가 자라고 가지마다 열린 모과는 제멋대로 익어간다.

 

 근처에 바다가 있어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지속되고 있는데 최근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주일마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나는 무섭다. 넓어진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기본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사고다. 시골이다 보니 노인분들이 많은데 달리는 차에 대한 인식이 느리다. 내가 건 후에 차가 지나갈 것이라 여기시는 것이다. 기본을 지키는 일은 가장 쉬운 방법인데 우리는 쉽다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버린다. 과감하게 컵과 그릇을 버린다. 좋아했던 컵, 내 것이 되었을 때 기뻐했던 모습이 고스란히 컵에 담겼다. 사두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도시락, 사은품 때문에 구매했지만 결국엔 짐으로 전락한 사은품, 입지 않고 모셔둔 옷가지, 사고 싶어서 갖고 싶어서 필요한 이유를 나열했던 물건들. 온라인 쇼핑몰의 장바구니도 비웠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인가, 묻고 생각한다. 그러다 궁금한 책을 발견하면 다시 장바구니를 채운다.

 

 

 

 

 

 

 

 

 

 

 

 지진이 발생하고 진동을 느끼고 공포를 안고 산다. 짧은 기도를 드리고 친구와 지인에게 안부를 묻는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다 곧 잊는다. 억울하게 죽은 이를 잊고 그리운 이를 잊고 계절을 잊는다. 잃어버리고 산다. 때로는 잊고 사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날들이다. 그리고 이런 시로 부족하지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비가 내리는데

 사람들이 다 젖어가는데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오늘 비는 해석할 여지가 있는데

 여자아이가 알몸으로 떨고 있는데

 책장 위에서 책장을 넘기며

 밑줄을 긋고 한참을 생각하는데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오늘 비는 볼수록 난해한데

 한 사내가 빗속에서 찰박찰박 사라지는데

 속절없이 비가 내리네

 핏물이 우리의 발밑으로 흘러가는데 (「붉은, 비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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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사라지고 싶지 않은가 보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지만 낮에는 여전히 뜨겁다. 아파트 주변에 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정겹다. 햇빛과 만나면서 반짝이는 붉은 색이 참 예쁘다. 언제부터 그 빛깔들을 보고 예쁘다, 생각했던가. 맵기만 한 고추, 긴 겨울에 뿔을 따느라 손이 아렸던 기억밖에 없던 고추가 예쁘다니. 달라진 건 나였다. 내가 달라져야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주었지만 곧이 듣지 않았던 시간이 지났구나, 혼자 생각했다.

 

 주말에는 H를 만났다. 출장 다녀오는 길에 시간을 내어 내게로 왔다. 어느 시절에는 밤을 꼬박 새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잠을 자야만 하는 내가 되었다.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계획된 일정에 대해, 소소하지만 거창하다 말할 수 있는 삶의 일부에 대해 말했다. 감사를 느끼는 순간에 대해, 두려움을 이겨냈던 순간에 대해, 화가 나고 속상했던 일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순간에 대해 말이다. 좋은 밤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말하는 사이가 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채울 수 없는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그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숭고한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만남, 이별, 그리고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는 강에 다리는 놓은 일은 아닐까. 그냥 건너뛸 수 있는 물에는 다리는 놓지 않는다. 젖어도 괜찮다고 여기니까. 그러나 깊고 넓어지는 강에는 반드시 다리가 필요하다. 깊고 넓다는 건 오랜 시간을 두고 만난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리는 놓은 일은 수고스럽다. 많은 왕래에도 튼튼한 다리, 갑자기 쏟아지는 비, 바람을 견딜 수 있는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정성으로 상대를 대하는 마음, 진실을 보여주는 행동, 어렵지만 꼭 필요한 것이다. 피곤을 안고 먼 길을 가야하는 H를 배웅하며 산다는 건 별게 아닌데,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남을 기약하는 이별은 따뜻하다. 문자나 메신저, 전화로 수많은 다짐과 약속을 반복하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짧은 순간처럼 온전한 감정의 교류는 없다. 그러니까 H를 만나서 나는 너무 좋았고 행복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런 책도 즐겁다. 드디어 『악스트 Axt 8호에서 김연수를 만난다. 이번 호는 정말 많이 팔릴 것 같다. 류근의 두 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 구병모의 장편소설『한 스푼의 시간』, 강영숙의 단편집『회색문헌』​. 9월의 리스트다. 강영숙의 소설집은 5년 만에 나오는 것이다. 명절연휴에 읽어도 좋겠다. 긴 연휴, 스트레스는 날려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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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9-1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16-09-14 07:4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도 건강한 명절 보내세요. 언제나 다정한 안부 고맙습니다^^
 

 

 어제는 바람이 있었고 오늘은 약간의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관성 있게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변함없이 매미소리는 우렁차다. 내일이 없다는 걸 다 안다는 소리인가. 오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데. 변화, 변신, 변장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순간마다 변화하는 모든 것들. 바람의 크기, 햇볕의 세기, 숨소리, 그리고 내 마음. 마음의 변화는 얼마나 충동적인가, 얼마나 간사한가. 냉장고 속 복숭아와 자두는 어제는 그것이 아니다. 복숭아는 미세하게 숙성된 맛을 보여준다. 뜨거웠던 김치찌개는 냉장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들, 밤마다 뒤척인다. 올림픽에 열중하지 못하면서도 경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기에. 바로 잠드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8월 11일이라는 날짜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오늘은 누군가의 생일이고 작은 언니가 말라위에서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다. 계획대로라면 밤늦게, 혹은 내일 새벽에 도착할 것이다. 하루를 지배하는 건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때로 나를 농락할까.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예전의 그것과 다르게 변화한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고유한 무언가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여러 권의 책을 늘어놓고 읽는 흉내를 낸다. 무언가 몰입할 수 있다면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생각뿐이다.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할 수 없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은 충동구매였다. 처음부터 읽는 것도 아니다. 아무 곳이나 펼쳤다. 그랬더니 이런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세상에나,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거 아니야? 이 소설에 대한 사랑은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누가 없애 버리려 하거나, 일부러 획일화하려 해도, 아무리 억압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런 힘을.’

 

 ‘거푸 돌아오는 계절을 영원히 볼 수는 없다. 적어도 버드나무보다는 먼저,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장석주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산문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시로 만난 장석주가 아닌 산문을 읽고 싶었다. 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선택한 건 제목이 주는 울림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오정희의 『새』를 다시 읽고 싶었다. 천진하다고 할 수 없는 우미의 눈빛과 마주하고 싶었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삶에도 변화는 존재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이 아닌 두려움으로 마주하는 시간들은 무겁고 어둡다. 작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세포를 키우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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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둘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중에도 사랑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연인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랑이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 줄어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은 밥도 아니고 사랑은 돈도 아니라서 먹을 수도 없고 좋은 물건을 사는데 사용할 수도 없다. 사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사랑받는다는 느낌만으로 존재한다. 그 사랑이 때로 누군가를 살게 하고 누군가를 죽게 만든다. 그렇다면 폴에게는 사랑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고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습관이었을까.

 

 이혼 경력이 있고 이별의 경험이 있지만 반복되는 상실을 감당하기에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은 지쳐있었을지도 모른다. 연인 로제에 대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혼자라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까 두려워서다. 폴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 완벽한 책임감을 강요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로제는 폴과 이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에 폴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사랑이라는 게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다는 걸 폴과 로제는 모르는 척했다. 스물다섯 시몽이 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걸 알았지만 폴과 로제는 그들의 관계가 여전히 맑음이라고 착각했다. 시몽에게 폴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일만이 중요했다. 시몽은 폴의 외로움을 건드렸다. 폴은 부정할 수 없었다. 로제의 이기적인 사랑을 말이다. 점점 커지는 로제와의 간극 사이에 시몽이 우뚝 솟았다. 폴에게 시몽의 말과 행동은 어리숙하며 불완전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고 시몽의 뻔한 질문에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아니, 폴은 사랑이 아닌 자기의 현재 모습을 보게 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57쪽)

 

 시몽의 눈에 비친 폴의 삶은 불행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런 폴에게 충분히 아름다웠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 시몽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갖는 삶의 무게를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폴과의 사랑만으로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 자신했으니까. 그런 시몽의 젊음과 사랑에 폴은 빠져들었고 로제가 아닌 시몽을 선택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오래된 연인과 켜켜이 쌓인 시간의 힘이었을까. 젊은 남자의 육체를 탐한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폴에게 사랑은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시몽의 열정적인 감정을 원하면서도 로제를 받아들인다.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로제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150쪽) 

 

 세 사람의 사랑이 모두를 만족시키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강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예상 밖의 선택이다. 본인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사랑이다. 폴에게 기다림만을 안겨준 로제의 구속 아닌 구속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당연히 시몽과의 멋진 사랑으로 끝나야 하지 않았을까. 사강은 사랑과 연애가 아닌 폴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통해 여자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결국 폴은 세 개의 점이 만드는 삼각형을 벗어나 점과 점이 이어진 선을 원했던 것일까. 그 선이 아름다운 글과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혼자 선을 그어나가야 한다는 걸 스물네 살의 사강은 알고 있었나 보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이 사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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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께 트렁크에 짐을 챙겼던 작은 언니는 어제 아침에 일찍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고 연락할 수 있을 때 연락을 하라고 인사를 나눴다. 오후에 도착한 문자는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공항에서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다시 연락이 온 건 밤 11시 30분쯤, 홍콩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22시간 이상을 소요해 도착할 계획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폭염의 날들, 집 안에서도 고생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늦은 오후에는 친구가 안부를 전했다. 카페와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인데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다. 친구는 여름을 견디는 중이라고 말했다. 잘 견뎌야 하는데 그냥 견딘다고. 그러니 여름을 잘 견디자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잘 견딘다는 건 무엇일까. 견딘다는 것과 잘 견딘다는 건 감정의 차이일까. 받아들임의 차이일까. 견디는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잘 견디라는 건 압박을 가하는 게 아닐까. 견디다, 견디다,를 중얼거리다 말았다.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옅은 현기증과 함께 지속되는 낮이다. 어린 시절 모깃불을 피우며 별을 보던 날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싱그러웠던 여름밤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모든 것은 괜찮다,로 통한다. 여름의 시간은 낮과 밤의 분명한 경계를 만든다. 밤이 되면 이 문장을 다시 읽고 싶다. 밤에 만나는 문장은 낮에 만나는 문장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낮에는 세상이 너무 훤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밤의 어둠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고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밤에 나는 더 작은 존재이다. 그래서 더 큰 존재에 포함되는 존재다. 밤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생각, 생각을 하고, 그리고 글을 쓴다. (김행숙 『사랑하기 좋은 책』의 일부)

 

 여름의 시간이 흐른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흘이 지나면 입추인데 여름은 고여있는 것만 같다. 조금씩 흐르는 여름. 어쩔 수 없이 작년의 여름을 떠올린다. 작년에도 더웠고, 작년에도 땀을 많이 흘렸고, 작년에도 무기력했다. 서로를 격려했던 여름이었구나, 서로를 안아주던 여름이었구나, 뜨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여름이었구나. 서로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여름이었지만, 말은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있었다. 겨우, 사랑한다는 말만 건넸을 뿐이다. 그 안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믿으면서.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는다. 조금씩 읽는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른 채 읽는다. 그저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당신을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그렇게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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