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오지 않았다.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화가 났다. 약속을 저버린 애인 같았다. 며칠째 일기예보는 비가 내릴 것처럼 비구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강력한 더위의 힘은 커졌고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는 마음에 화가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한강 소설의 말을 잃은 여자가 어떤 기분일까, 잠시 상상하게 되었다.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은데 하지 않는 말. 말과 말 사이의 거리는 잴 수 없을 만큼 멀다. 꼭 해야 할 말만 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벌이고 있다. 말 없는 도시는 고요할까. 말 없는 도시의 풍경은 어떨까.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 그럼 말도 쏟아질 것 같다. 비가 쏟아지면 더러운 말도 비에 씻겨 흘러갈지도 모른다. 비가 쏟아지만 조금 평온해질 것도 같다.

 

 눅눅한 날에 우유에 곡물가루를 타서 마셨다. 꿀을 넣었다. 달콤했지만 우유가 적어서 텁텁했다. 맛없는 감자를 먹었고 상추를 먹었다. 그런데도 졸거나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가운 물에 얼음을 가득 부어 마셨고 냉커피를 마셨다. 땀을 흘렸고 샤워를 했고 오랜만에 드라마를 시청했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연인이, 참 예뻤다. 서로에게 기대어 둘이 아닌 하나를 꿈꾸는 연인과 혼자의 사랑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 슬픔보다는 다짐이 보였다. 건강한 다짐이라고 할까.

 

 어제 오전에는 선생님의 명예퇴직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선생님께 나는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언제나 선생님으로 존재하실 선생님, 그런 대상이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베트남 하노이에 계신 선생님과 더위를 나누고 중복에 치킨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베트남에 가신 후 두 시간 느린 그곳을 생각한다. 아침에는 그곳의 날씨를 검색했다. 알지 못하며 가본 적 없는 곳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 낯설지만 즐겁다. 다음 주에는 말라위를 상상할 것이다. 날씨와 음식을 검색하겠지.

 

 내게 중요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내게만 속한 일이니까. ​상대의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그에게 재촉할 수 없다. 상대에게는 귀찮은 일에 속하니까. 부탁을 했으니 기다려야 하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할 수 없고, 기다림의 끝에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고 상대를 탓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인터파크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 비밀번호를 바꿨지만 기분이 나쁘다. 모르는 사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고 나니 산뜻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남았던 적립금으로 우선 책을 구매하고 탈퇴를 할까, 고민 중이다. 비처럼 상쾌한 선물이 될 책들. 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최은미의 『쇼코의 미소』 , 청량한 기운을 안겨줄 것 같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와 왠지 닮았을 것만 같은 김행숙 시인의 산문 『사랑하기 좋은 책, 최윤필 기자의 『가만한 당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

 

 

 

 

 

 

 

 

 

 

 

 

 오늘은 비가 올까, 비가 오면 정말 반가울 텐데. 비야, 좀 내려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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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7-2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산은 비가 엄청 왔답니다
그래도 너무너무 더워요 ㅠㅠㅠ

자목련 2016-07-28 10:39   좋아요 0 | URL
아, 엄청난 비도 더위를 식히기에는 부족했군요.
오늘은 어제보다 시원한 바람이 그곳에 닿기를 바라요^^

서니데이 2016-07-2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도 많이 더운 날이었어요. 그래도 즐겁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6-07-28 10:38   좋아요 0 | URL
어제는 진짜 더운 하루였어요. 비는 병아리 눈물만큼만 내렸어요.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바람이 많아서 시원해요. 서니데이 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6년의 시간은 왜 이리 빠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분명 수술 후 회복의 시간을 견디던 1월에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2016년을 채운 365일 가운데 5개월이 지났다. 곧 6월이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놓인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눈앞에 놓인 달력을 보니 오늘은 월요일. 저마다 다른 이름의 요일들이 내게는 모두 같은 이름의 요일로 다가오는 일상을 산다. 그러다 이런 시를 읽으며 어제는 일요일이었구나 생각한다. 어떤 시는 과거를 불러오고 어떤 시는 현재를 마주 보게 만든다. 박은정의 시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점에 서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어떤 시는 길을 잃고 헤매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누군가를 보여주고 어떤 시는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에 매달리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일요일의 미로

 

 일요일, 손을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손, 발목이 비틀린 짐

승이 낮게 뒹굴었다 너의 머리 위를 지나는 구름을 기억하

렴 풀무치들과 죽은 해바라기까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우리는 걸었다 그쪽으로, 빛이 멀어지고 키 큰 나

무들이 두서없이 흔들렸다 혀를 말고 잠이 든 까마귀와 밤

사이 불어난 이끼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어 일

요일은 계속 걸었다 지겨운 짐승들의 울음이 위안이 될 때

까지, 오늘의 운세는 북쪽을 피하라 이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야 우리는 일요일처럼 설핏 웃었다 긴 밤이 덮쳤다 돌

아보아도 돌아갈 수 없는 어둠만 되풀이되는, 그럴수록 귓

바퀴를 돌던 물소리는 얼마나 환하게 반짝였던가 나가는 길

을 찾을 수 있을까 흔적만 남은 풍경이 너의 다리가 될 때까

지 그쪽으로, 일요일은 걷고 또 걸었다  (63쪽)

 

 

 창밖으로 쌓인 눈이 녹고 있는 산 중턱을 바라보던 지난 겨울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시간이라는 미로에 갇혀 요일의 이름을 잊고 사는 이들의 건조한 시선을 좇는다. 일요일 다음의 월요일을 향해 걷는다고 믿었던 시간도 존재했을 터. 여전히 시간이라는 미로 속에서 반복해서 걷고 또 걷는 놀이를 즐기는 이는 없다. 미로를 좋아하는 건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 아이들은 출구가 존재한다는 걸 믿기 때문이고 어른들은 그 출구를 끝내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이였던 어른이 시간 속에 믿음은 사라졌다는 게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니 계절이 바뀌는 일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비로움이 아니라 반복된 삶일 뿐이다.

 

 

 긴 겨울

 

 

 겨울이 지겨울 때마다 그 짓을 했다 길고 나른하게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둘 중 하나는 죽기를 바라듯 그럴 때마다 살

아 있다는 게 징글징글해져 눈이 길게 찢어졌다 사랑이 없

는 밤의 짙고 고요한 계절처럼 이 반복된 허기가 기나긴 겨

울을 연장시켰을까.

 

 네 손바닥에 모르는 주소를 쓰고 겨울의 조난자들처럼  방

을 찾던 저녁이었지 방은 아담했고 누런 벽지의 무늬와 흐

린 불빛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언 몸을 녹이자

너는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웃었고 나는 네 얼굴을 핥는다

자꾸 잠이 오는데 괜찮을까

 

 흔들리는 벽지 아래 서로의 손목을 쥐여주면 꽤 멋진 연인

이 되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처럼 정말 닮았구나 시린 외

풍이 불어와 겹겹의 바닥으로 쌓이는 밤 이불을 덮는 지루

함도 없이 이 겨울을 나자 궁색하게 남은 목숨의 자국이나

껴안으며 가까워질수록 사라지는 표정처럼 지겨워 지겨워

태어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울고 있었을 뿐인데  (90쪽)

 

 

 그 겨울에 다녀간 선배 언니는 겨울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언니의 모습은 마치 자신이 겨울인 양 보였다. 모든 요일을 같은 이름의 요일로 살고 있는 나는 언니의 말에서 겨울이 따뜻한 계절이란 걸 발견했다. 그 뒤로 나는 주문처럼 겨울이 길었도 괜찮겠다고 중얼거렸다. 겨울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계절, 혼자가 아닌 둘이 될 수 있는 계절이었다. 긴 겨울이 사라진 뒤 봄이 찾아오면 겨울은 얼마나 슬플까. 봄이 되면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포근했던 겨울의 온기를 잊고 살겠지. 다시 추워진다는 일기 예보와는 상관없이 거실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도 긴 겨울을 통과하는 걸 아쉬워하는 것만 같다. 하나의 계절을 통과한다는 건 성장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겨울과 봄이 지났고 여름을 맞는 지금, 나는 조금이라도 성장했을까?

 

 

 대화의 방법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아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이빨은 단단해졌다

 말을 해도 말이 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되물어보던 허기처럼

 형광등은 깜빡이고

 인형은 얼굴도 없이 던져졌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14쪽)

 

 

 내 목소리로 생성된 말을 잃은 시간, 아무 목적도 없이 눈으로 시를 따라 읽는다. 아이와 인형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까, 반복해서 읽는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만 들리는 눈빛 언어나 복화술을 쓰는지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다. 박은정은 그런 모호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입구와 출구가 존재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는 미로를 즐기는 어른이라고 할까. 그녀가 선택한 시어는 밝거나 명랑하지 않다. 일부러 잔혹한 말들을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다 발견한 이정표가 오히려 길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하여 누군가는 도돌이표처럼 걷다가 걷기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과 닮은 시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이런 풍경을 보며 웃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포기를 한 건 아니지만 온전한 웃음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모두가 같은 이름의 요일들을 살고 있다.

 

 

 풍경

 

 

 아무것도 아닌 것이

 풍경이 되는 일은 아름답다

 회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도처럼

 

 가방을 열면

 너의 손이 담겨 있지

 의미도 무의미도 없이

 피어나는 꽃으로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부끄러워 살고 싶어질 때

 

 경계도 없이

 투명한 공중으로 던져올리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는 왜 여기에 없고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고통스러운 두 사람을 본다

 

 내가 만지는 네가

 웃고 있는 풍경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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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소설을 말할 수 없다. 이야기가 끝이 나야 그 이야기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작은 소회, 비평, 비판 혹은 고마움까지. 그것이 연재가 끝나고 책으로 묶여 나왔다 해도 그렇다. 한 권의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니까. 같은 문장에서 밑줄을 긋고, 같은 묘사에서 감탄하는 경우도 많지만 언제나 새로운 책처럼 다가온다. 계간지에서 만난 시를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한 권의 시집에서 읽은 시를 제목만이라도 온전히 나열할 수 있다면, 시집은 펼칠 때마다 같은 시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와 소설이 그러하듯, 시집은 읽을 때마다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평범했던 시어들이 일상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어제와 같은 오늘의 날씨를 기록하게 만든다.

 

 지난 겨울 눈이 오는 날들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다. 메일을 확인하려 컴퓨터에 앉았고 자판 위에 올려진 손가락은 서점을 클릭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박시하의 신간을 발견하는 일 따위는. 그래서 반가웠고 그래서 마음이 평온했다. 『눈사람의 사회』로 만난 박시하는 슬픔이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슬픔이 아닌 기쁨을 말해도 그녀가 행복을 말해도 내게는 그것은 온전한 슬픔으로 박힌다. 설령 그것이 오독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리 읽는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이런 시가 있었다. 유일한 여름으로의 초대였다. 결코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다. 문학은 그렇게 삶을 지배한다. 우연이 아니 운명이 될 수밖에 없는 시라니. 여름은 가을이 되었고 가을은 겨울이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가 아닌 혼자서 세 개의 계절을 맛보는 날이 이리 빨리 올 줄 몰랐던 나는 점점 늘어나는 낮의 길이를 측량하며 봄을 기다렸다.

 

 

 여름의 주검

 

 

 한 주검을 통해

 여름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리 울음소리만큼 분명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유일한 여름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이상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노란 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반투명한 사실에 대한

 

 그 여름의 세계는

 저녁의 거울처럼 두렵고

 훌륭한 죽음이 되어갔습니다 (82쪽)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모든 죽음을 향한 애도가 아닐까. 죽은 자를 통해 위로받고 살아가는 산 자의 슬픈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낀다.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름다운 건 그들을 기억하는 산 자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시하는 슬픔을 슬픔을 쪼개어 그것이 지닌 빛의 아름다움을 아는 시인이다. 무거운 그림자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슬픔의 힘을 아는 시인이다. 박시하는 그것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을까.

 

 

 묘비들

 

 

 깊고 둥근 침묵 아래

 영혼만으로 울 수 있던 한때였다

 

 종종 다른 영혼과 어깨동무를 했다

 별이 그늘을 비추는 것처럼

 우린 당연하고 미약했다

 벤치에 앉아 잠들거나

 나비를 따라 날고

 꽃의 심장에 들락거렸다

 

 죽어서도 살았지만

 서로를 기억하지는 않았다

 묘지의 길은 묘지의 길로만 났으므로

 삶의 악취를 표백하며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의 이름을 대신 썼다

 

 엔딩 없는 흑백영화를 관람하는

 다정한 우리가 늘어선

 탈색된 사진을 한 장씩 받았다

 

 느린 비와 함께

 전주곡 같은 햇살이 쏟아지는 한때였다 (16쪽)

 

 

 그림자

 

 

 검은 길 흰 눈

 시작되는 나라

 

 먼 안부

 기차의 입김

 얼음 레일 위

 맨발로 서서

 

 기차가 멈추지 않아

 소식을 전할 거야

 어두운 책 속에서

 

 반 발짝의 무덤

 네가 가린 너

 못갖춘마디

 슬픔이 그린 그림

 

 기차가 달리지 않아

 사라지는 나라 (37쪽)

 

 

 특히 이런 시가 좋다. 좋아서 정말 미칠 것 같다.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삶은 얼마나 건강한가. 구체적으로 살고 싶다니, 이렇게 사랑스럽기까지 한 시라니. 귀엽고 발랄한 시어 덕분에 그 뒤에 감춰진 거인 같은 슬픔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만다. 저마다 짙은 슬픔을 거느리고 사는 삶을 위로하는 시다. 그렇다고 슬픔이 사라지거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슬픔과의 동거에 익숙한 누군가는 안다. 박시하의 시가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하다는 걸 말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싶어

 

 

 젓가락, 접시, 소시지, 오렌지주스, 달걀……

 

 그런 것들이 될 거야

 사물이 된다면

 달그락거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숨겨지고

 수평선은 어둠을 끌어올리지

 어둠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거야

 

 눈물이 나는 건

 물새떼처럼 알 수 없고

 구름처럼 멀리 있는 것들 때문이지

 

 가라앉아서 숨을 쉬자

 물고기가 된다면

 수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삶은 사라지게 될 거야

 아무것도 슬프지 않을 거야 (50쪽)

 

 

 밤

 

 

 내가 가장 슬펐을 때가

 검고 탁하다고 해서

 밤이 밤이 아닐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78쪽)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따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울하고 어두운 시가 어떻게 삶을 치유할 수 있느냐고. 작은 어둠이 큰 어둠과 만났을 때 그것의 존재는 미미하다. 밤에도 강렬한 태양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짙은 슬픔은 옅은 슬픔을 밝게 만든다. 과연 슬픔 없는 세상은 아름다울까. 우리가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은 말과 슬픔을 삼키며 온몸으로 세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건 아닐까. 여하튼 나는 박시하의 시집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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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조로운 생을 살고 있다. 단조롭다는 말은 간단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복잡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시절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삶이기도 하고 어느 시절부터는 만족과 충만으로 다가오는 삶이기도 하다. 단조롭다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같은 일상의 반복, 말 그대로 이벤트는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여 가끔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눈을 뗄 수 없는 불꽃놀이나 거대한 산처럼 다가온다.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 가운데 하나는 반가운 사람이 온다는 것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즐거운 기다림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화장도 하고 괜히 시계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화장실에도 자주 들락거렸다. 처음으로 운전을 하고 혼자 나를 만나러 온 언니도 나처럼 살짝 흥분된 듯 보였다. 우리는 겨울에 만났고 계절은 봄이 되었다.  조금 늦은 점심을 위해 찾은 카페에서 식사를 하며 소소하면서도 특별한 일상을 공유했다. 소년, 소녀가 아닌 청년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점점 더 나약해지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자신감을 놓치는 삶에 대해 말했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말, 결핍을 떠올리면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된다는 말은 서로에게 달콤한 약이었다.

 

 즐거운 기다림이 있는 반면 불안을 동반한 두려움도 있다. 어떤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그렇다. 최선을 다한 일에 대한 결과라면 불안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은 단조로운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흔들어 놓는다. 그것에 매달리게 만든다. 매달린다고 해서 결과가 번복되거나 달라지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안다는 것과 그것을 삶에 실천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다. 그것이 일치가 되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충만한 즐거움처럼 즐거울 수는 없지만 그것에 매여 다른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주일의 기다림이 나를 조금씩 흔들 것이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미세한 흔들림을 느낀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책에 빠져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잠시 미루고 이런 책을 곁에 둔다. 미야베 미유키의 <비둘기피리 꽃>, 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세 권 중에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읽었는데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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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이 몸 위에 식탁을 만든다 밤 속으로 타들어가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며 식탁보 끝자락에 코를 박고 엄지

손가락을 빤다 하얗게 부르튼 엄지손가락을 다른 네 손

가락 밑에 숨긴다 콘센트를 앞에 두고서도 플러그를 어

디다 꽂아야 할지 몰라 청소기를 가지고 방 안을 빙빙

돌던 당신에게 암이 뇌로 전이됐어요 말하지 못했다 숫

자를 더 이상 읽을 수 없는데도 고개를 돌려 자꾸 시계

를 보던 당신에게 몇 신가요 물어보지 못했다 하나, 둘,

셋 다음은 어둠 바람이 당신을 통과하지 못한다 당신만

큼의 바람이 밀려난 곳에서 불이 비를 태우는 시간 이

빨과 잇몸 사이에 자를 대고 칼을 긋는다 아무것도 뱉

지 않는다 수박을 입에 넣어드릴 때마다 까맣게 탄 숫

자를 틱, 틱 식탁 위로 내뱉던 당신이 내 앞머리를 쓰다

듬는다 (「사월」전문)

 

 

 

 

 어쩌다 이런 시를 마주하고 읽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장승리의 『무표정』시집이었고 처음에 펼쳤을 때는 들어오지 않았던 시다. 4월이라서, 사월이라서 그런가 보다.

 우리 아파트에도 자목련이 보이고 팝콘 같은 벚꽃도 보인다. 복도에 서면 야트막한 동산 속 초록의 틈에서 분홍이 보이기도 한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점점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처럼 진달래가 늘어난다. 예뻐서 슬픈 봄이다. 맑아서 아픈 봄이다. 봄이 나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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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16-04-14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자목련님의 글은 그저 반갑지요..

자목련 2016-04-15 11:44   좋아요 0 | URL
반갑게 맞아주시니 감사해요.
바람구두 님, 맑은 봄날 보내세요^^

[그장소] 2016-04-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는 말 ㅡ놔두고 가요 ...모든 단어를 구겨넣은 ㅡ좋다 !

자목련 2016-04-15 11:43   좋아요 1 | URL
장승리 시집, 참 좋아요!!

[그장소] 2016-04-15 18:37   좋아요 0 | URL
몹시 ㅡ이해가 갑니다 ㅡ아직 보진 못했지만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