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살고 있다. 많은 눈이 내렸고 바람이 강하게 분다. 겨울다운 날들이다. 지난주에는 친구 집에 다녀왔다. 지난주는 방탕의 주였다. 그냥 전화통화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았다. 지척에 살지만 3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다. 부끄러움이나 속상함을 감추지 않아도 괜찮은 친구다. 그러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는 친구인 것이다. 뜨거운 유자차를 마시고 딸기와 빵을 뜯어 먹으며 일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후 늦게 길어진 햇살에 몸과 마음을 기댄 시간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이를 먹고 그리고 늙어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우리 제법 좋은 사이다.

 

 곧 설 명절이 다가온다. 떡국을 먹고 예배를 드리고 잠시 떨어졌던 가족을 만난다. 외국에 계신 선생님은 이즈음 한국이 그리울 것이다. 그리운 곳이 있다는 건 슬픈 건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대상이 있다는 건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친한 동생이 명절 선물로 책과 컵을 선물했다. 그녀는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높다. 설빔을 받은 것처럼 즐겁다. 나는 그것을 기다릴 것이고 기다리는 동안 충만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몇 권의 책을 고른다. 조금 느리고 천천히 내게 와도 좋을 책들. 고독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기대하는 올리비아 랭의『외로운 도시』, 유홍준의 『안목』,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 다치바나 다카시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그리고 착한 가격의 한국문학 『호텔 프린스』.

 

 

 

 

 

 

 

 

 

 

 

 

 

 늙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건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는 말이다. 한치 앞에 닥칠 일도 모르며 사는 게 삶이라는 생각이 가슴 한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주어진 시간에 대해 낭비가 아닌 제대로 된 소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늦었지만 한 해의 리스트를 쓴다.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 건강, 감사, 사람, 그리고 어떤 것.

 

 쌓였던 눈은 녹지만 겨울은 계속된다. 곧 봄이 올 거라는 생각은 잊는다. 겨울을 사는 일, 겨울에 사는 일, 지금의 계절은 겨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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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사막 - 이문재)

 

 내가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고 믿는 한 사람,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당신은 어떻게 느끼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래된 일이에요. (62~63쪽)

 

 책장을 전부 시집으로 채우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시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허울뿐인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이 지켜봐 주어야 하는 사랑임을 안다. 최근 SNS를 시작으로 #문단_내_성폭력에 대한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소장한 시집, 밑줄 긋고 옮겨 적은 시가 있었다. 시에 대한 애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시를 알고 싶었던 때, 시인이 시를 통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던 때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흐트러진 애정을 응집시켜야 한다. 부서진 사랑을 모아야 한다. 깨어진 사랑에 베일지라도 말이다. 안부가 슬픔을 깨운다는 김소연 시인의 시처럼.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그래서 - 김소연, 72쪽)

 

 그래도 시, 시를 읽는다. 시인이 고른 시, 시인이 속삭이는 시를 듣는다. 『시시하다』는 진은영 시인이 고른 92편의 시와 함께 시인의 짧은 감상(해설)을 만날 수 있다. 좋아하는 시도 있고 처음 만나는 시도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외국 시인의 이름도 있다. 짧은 시도 있고 아주 긴 시도 있다. 詩時하다를, 시가 있는 시간이라고 읽는다.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있어 좋은 시간도 괜찮겠다. 한 편의 시를 읽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 잠깐의 여유 혹은 잠깐의 바람이 통하는 시간이라도 할까. 가만히 시를 읽는 동안엔 시와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다. 천천히 시를 읽는 동안에는 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도 좋다.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금요일 - 유희경)

 

 너무 아파서 혼자만 깨어 있는 밤, 거울을 보면 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찡그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게 문득 우스워지곤 했어요. 그게 위로가 되었어요. (112~113쪽)

 

 유희경의 시는 금요일에 읽지 않아도 혼자 깊은 밤을 견디는 이라면 진은영의 감상처럼 충분히 위로가 될 것이다. 무리에 속하지 않고 ​밤의 무리에 스며드는 시간,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겠지. 불안한 세상, 어디에서도 소소한 기쁨과 작은 위안을 얻지 못하는 우리에게 불어오는 날카롭고 시린 바람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때로는 우연히 만난 한 편의 시가 전하는 뜨거운 온기가 오랫동안 우리를 데워주기도 하니까.

 

 마치 죽음이 끝장을 낼 수나 있는 거처럼. 마치 삶이 승리할 수나 있는 것처럼. 마치 긍지가 응수가 되는 것처럼. 마치 사랑이 원군이나 되는 것처럼. 마치 실패가 무슨 허락이나 되는 것처럼. 마치 산사나무가 무슨 예언이나 되는 것처럼. 마치 신들이 우리를 사랑이나 했던 것처럼. (마치 뭐나 되는 것처럼 - 앙드레 프레노, 182쪽)

 

 최근에는 그림과 함께 읽는 시, 사진과 함께 읽는 시, 테마가 있는 시가 많다. 어떤 시를 읽어야 할까, 어떤 시가 좋을까. 92편의 시 가운데 맴도는 시가 나는 좋은 시라 생각한다. 어딘가 기록하고 싶은 시, 좋은 이에게 이런 시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시. 뭔가 내 마음을 더하고 싶은 시. 그냥 끌리는 대로 읽는다. 슈퍼문의 밤이 지나고 단단한 얼음처럼 곧게 뻗은 밤, 당신의 지친 영혼에 시가 내려앉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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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6-11-15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성폭력,성추행 사건을 접한 이후로 시집을 넘긴다는 것이 꺼림칙해졌고 괜한 결벽증?이 생겨 시집을 읽는다는 행위가 두렵단 생각이 들더군요
어서 떨쳐버려야 할텐데~~~읽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빨리 생기길 바랄뿐입니다^^

자목련 2016-11-16 10:3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그랬어요. 사건의 가해자인 시인의 시집을 모두 과감하게 정리했어요. 좋아했던 시인, 작가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나니 이제는 여류 시인의 시집만 읽어야 하나, 생각까지 했지요.
 

 

 주말에는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다. 작년보다 가격이 오른 백신과 가격이 내린 백신이 있다고 의사는 말했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간호사는 주사를 놓은 자리에 귀여운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었다. 동그란 밴드를 보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예방주사를 맞는 일은 돌아와서 할 일 중 하나였다. 잠시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생활했고 돌아왔다. 여기를 떠나는 일은 쉬운 일임에도 결정을 내리는 일은 요원하다. 긴 잠에서 깨지 않았고,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술 후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충동적이었으나 신나는 일이었다. 텔레비전의 빛을 의지해 혼자 맥주를 마시며 살짝 취기를 즐기는 일, 맥주 한 캔의 시간, 그것은 호쾌한 웃음을 불러오기도 했다.

 

 거기에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거기에 내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만나러 달려온 친구¹과 친구². 우리는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다. 먹을거리를 잔뜩 사들고 도착한 친구였다. 친구¹과 좋아하는 책에 대해 말했고, 어느 공간에 대해 상상했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건 나의 일부를 안다는 일이다. 그 일부는 우리를 지탱하는 자양분이고 격려하는 시작점이다. 우리가 말한 책은 이렇다.

 

 

 

 

 

 

 

 

 

 

 

 친구¹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며칠이 지나고 친구²가 왔다. 두 딸의 엄마가 아닌 내 친구로만 존재하는 순간, 긴 시간을 나눌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집중해야 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 속상했던 일을 나누었다. 고민과 걱정거리가 해결될 수 없더라도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언제라도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참 고맙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소설과 시를 좋아하고 그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닿기를 바라는 독자인 내게 SNS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일들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내가 읽고 간직한 문장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집을 정리했다. 누군가는 시는 시일뿐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을 읽고, 시를 읽는다. 이런 문장을 흠모한다. 친한 동생이 선물한 소설(읽지 않았다)을 넘기다 발견한 문장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두 뺨이 달아오른 채 잠에서 깨어났다.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고 몸에서 열이 났다. 서늘해진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자 목련나무 가지들이 마구 흔들리며 진줏빛 꽃들이 솜뭉치처럼 마당에 길게 떨어져 흩어졌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제 달은 없었다. 하늘과 땅에 똑같이 새하얀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은하수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팔 한복판에서,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별들이 태어났다. 꽃들이 떨어져 흩어지면서 그 화사함이 빛을 잃고 향기가 사그라졌다. 마르소는 울고 싶었다. 가차없는 비애가 그를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분노의 날들』, 204쪽)

 

 

 우리는 모두 분노의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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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건 지독한 착각이며 오만이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한계를 느낀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이의 생일에 선물을 고르다 나는 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문자를 했고 나는 의문이 아닌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미나토 나가에의 『리버스』는 그런 소설이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란 충격적인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후카세’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좋은 학벌을 지녔지만 작은 회사에 다닌다. 사무용품을 배달하고 수리한다. 고등학교까지 절친은 없었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면 직장 동료나 세미나 친구들이 후카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커피는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였고 위로였다. 그런 후카세가 살인자라니. 그는 가면을 쓴 잔혹한 사이코패스란 말인가?

 

 남자친구가 살인자라는 편지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하거나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이다. ‘미호코’는 후자를 택한다. 후카세는 3년 전 세미나 동기들과 놀러 갔던 일과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눈 친구가 사고로 죽은 일을 들려준다. 운이 나빴던 사고였지 살인은 아니었다. 미호코와는 단골 커피가게에서 만난 연인으로 발전했다. 후카세에게는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미호코에게 날아온 편지로 인해 둘의 관계는 깨지고 만다.

 

 3년 전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심한 후카세에게는 네 명이 세미나 동기가 있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항상 당당한 ‘무라이’, 교사가 될 거라는 확신에 찬 ‘아사미’, 모임의 리더라 할 수 있는 만능 운동꾼 ‘다니하라’, 무슨 일이든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지닌 ‘히로사와’. 후카세는 히로사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를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 모두가 즐겁게 떠난 여행에서 히로사와는 죽었고 나머지 네 명은 그날의 음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숨기는 사실이 있다는 게 곧 죄가 있다는 증거야.’ (124쪽)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아사미를 일적으로 만날 뿐 무라이와 아사미와는 연락을 끊고 지낸다. 그런데 나머지 세 명에게도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아사미는 자동차에 전단지로, 무라이는 아버지의 선거 사무실로, 다니하라는 선로 위에서 죽을 뻔했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까, 히로사와의 부모님이 배후에 있는 건 아닐까. 후카세는 자신이 조사하겠다며 히로사와의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몰랐던 히로시와의 여러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안다고 믿었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조차 말이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

 

   ‘기다란 선 위에 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84쪽)

 

 소설은 살인과 복수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였지만 관계와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후카세가 히로시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묘한 감동을 불러온다. 고향에서 보내온 꿀을 커피에 타서 먹었던 시간을 추억하고 진실된 우정을 나눈 히로시와를 그리워하는 후카세. 커피를 마시며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마지막 반전의 한 문장마저 독하고 진한 커피의 맛으로 다가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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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까지 내렸던 비가 그쳤다. 이번에는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빗나갔다. 아직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다. 자꾸 팔뚝을 쓸어내린다. 겉옷을 입어야겠다. 꼭꼭 닫았던 창문을 여니 맑고 투명한 건 아니지만 세수를 한 아이의 얼굴처럼 하늘은 싱그럽다. 이웃 님의 글에서 본 빨간 홍옥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그 붉은빛이 고와서 오래도록 곁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 집 냉장고에는 홍옥이 없다. 사과도 없다. 시들어진 포도는 갈아서 체어 걸러 마셨다. 그곳에 포도가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지만 이제 포도를 먹는 계절이 아닌 것이다. 언제부터 포도는 여름 과일이 되었을까?

 

 10월의 마지막 밤까지 23일이 남았다. 뜬금없는 말이다. 벌써 10월의 여덟 번째 날이라는 게 놀랍다. 10월은 좀 조급해지는 것 같다. 올해의 시간이 세 달 정도만 남았다는 건 깜빡이는 신호등을 빠르게 건너야 하는 순간처럼 불안하다. 다음 신호등에 건너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서글픔 같은 것이랄까.

 

 아침이 되었다고 느끼는 시각도 점점 늦어지는 대신 밤이 되었다는 신호는 빨리 온다. 깊고 고요한 밤의 결을 매만지는 계절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시집이 더욱 끌린다. 시를 읽기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 전화기에 대고 연인에게 짧은 시를 들려줘도 좋은 밤. 허수경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가을을 닮았다.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위로하는 시집처럼 다가온다.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발이 부은 가을 저녁, 일부)

 

 한 권의 시집을 온전히 읽는 가을이라면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가을일 것이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까지.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컨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 아름다운 우정과 소통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노년의 삶은 어떤 빛일까. 붉은 홍옥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들어진 포도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포도. 누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알 수 없는 우정을 선물 받는 기분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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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10-0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우리 영혼은』, 저도 기대하는 소설이에요.

자목련 2016-10-10 11:10   좋아요 0 | URL
에이바 님과 함께 읽는 소설이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