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단둘이 한 방에 누워 나란히 잠을 잔 기억은 두 번뿐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를 제외하고는 그렇다. 고등학교 입시 후 예비소집일에 맞춰 도착한 낯선 도시. 엄마와 나는 자취집을 구해야 했고 지리를 몰라 학교 근처가 아닌 곳의 모텔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으로는 식당이 아닌 방에서 배달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7년 후 같은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졸업식이 있던 날, 사진을 몇 장 찍고 돼지갈비를 먹었다. 그 돼지갈비는 내가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 드린 음식이었다. 그 저녁에는 엄마를 잠시 혼자 방에 남겨 두고 외출을 했다. 잠이 들기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엄마가 택시에 두고 내린 작은 가방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봄이 가까이 있던 계절이었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문장의 주어는 엄마다. 어떤 이는 이 글이 기행문인 되기엔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소설로 삼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자전소설쯤으로 타협을 보려 할까. 어떻게 불리더라도 모든 문장이 엄마를 중심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엄마가 겪은 사실도 엄마를 이루고,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도 엄마를 이루고, 엄마가 상상한 것들로 엄마를 이루고, 엄마가 느낀 것들도 엄마를 이룬다. 그 전부가 엄마다. (157쪽)

 

 김탁환의 『엄마의 골목』을 읽기 시작한 날, 우연하게 친구와 엄마 이야기를 했다. 작년에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낸 친구는 철쭉이 피는 걸 볼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친구가 울음을 그쳤을 때 나는 『엄마의 골목』을 읽고 있다고, 엄마와 아들이 함께 걷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엄마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나만 엄마가 없는 게 아니라 이제 친구에게도 엄마가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발을 맞추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진다. 어리석게도 그렇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도 많을 터.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철이 들고난 후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길을 걷은 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만다. 엄마보다는 친구, 엄마보다는 연인, 엄마보다는 새로 이룬 일가가 먼저였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가 아들과 만나 자신의 삶의 터전인 진해를 걷는 엄마의 큰 기쁨이 곳곳에서 전해져 너무도 부러웠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연애 이야기, 노년에 배운 하모니카를 배우는 엄마의 연습 노트, 늦은 밤 집에 온 아들에게 차려주는 엄마의 밥, 아들이 쓴 소설을 읽고 감상을 들려주는 엄마. 사소하면서도 소소한 모든 게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일상인지 말이다. 엄마의 일터, 엄마의 고향, 엄마의 추억이 있는 공간에 다시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일.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일.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모르며 사는 우리들. 함께 산책하기.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말이다.

 

 아침에 짧은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꽃과 나무가 너무 예쁘다. 예전에는 몰랐던 기쁨이다. 어른들 말씀이 모든 게 꽃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종종 다큐멘터리나 드라마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겨울을 뚫고 나온 산나물과 들꽃을 보며 대견해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년 봄이면 다시 필 꽃이라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분들에게는 내년 봄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일흔이 넘은 삶을 알 수 없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뵙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도 제목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살아갈 삶인데도 그렇다. 여느 걸어본다 시리즈와 다르게 이 책에서는 그 길이 걷고 싶다거나 그곳에 가도 싶다는 생각이 아닌 혼자가 아닌 함께 걷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한다.

 

 좋아하는 곳은 갈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준다. 같은 풍경처럼 보이지만 다르다.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다른 일상이 되기도 한다. 어제 본 꽃들은 지고 새로운 꽃이 피는 걸 발견하는 나의 산책길처럼 말이다. 걸어본다 시리즈는 만날 때마다 걷는 즐거움이 자란다. 글을 따라 익숙한 공간에 머물고 낯선 도시를 탐색한다. 독일 뮌스터를 산책하며 쓴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엔 이런 구절이 있다. 삶이라는 것은 버릇을 되풀이하며 기억을 재생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뜻한’ 기억에 대한 소망은 그 안에서 부풀어오른다.’ 따뜻한 기억을 간직한 삶은 어떤 추위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와 함께 진해 골목을 걷고 걸은 김탁환에게는 그런 기억이 있으니 앞으로 삶은 얼마나 충만할까. 엄마는 곁에 없지만 엄마 같은 고모와 언니들이 있다. 늦기 전에 함께 혼자 걷는 봄이 아닌 함께 걷는 봄으로 채워야지. 내가 모르는 엄마를 알고 있는 고모, 내가 모르는 오빠를 알고 있는 올케언니, 내가 모르는 꼬맹이 나를 알고 있는 언니와 봄을 걸어야지. 혼자 걷는 봄은 이제 안녕.

 

 엄마가 죽고 나면 이야기가 끝날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인 내가 엄마와의 이야기를 쓸 것이니까. 아들인 나까지 죽고 나면 이야기가 끝날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죽은 모자가 나눈 이야기를 누군가가 읽을 테니까. 모자의 이야기를 읽은 누군가마저 죽고 나면 이야기는 끝날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쓴 바로 이 책을 읽지 못했다 해도, 세상의 모든 엄마를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까.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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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1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에 산책 아닌 산책을 한다. 제법 고요한 시각에 집을 나선다. 아파트 화단을 지나 단지를 도는 게 전부다. 말 그대로 천천히 걷는다. 맑은 새소리와 피고 지는 꽃들을 만난다. 벚나무는 꽃 대신 이파리가 왕성하고 붉은 동백은 피거나 진다. 수수꽃다리의 향은 감미롭고 그늘에 서 있던 목련 나무는 수줍은 미소를 보낸다. 침대에 누워서는 알 수 없는 것들, 아침만이 들려주는 소리며 보여주는 색이다. 비슷한 시각에 집을 나서니 주인을 따라 나온 작고 검은 강아지와 두 번 만났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조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시작하는 하루다. 커피를 마시고 성경을 읽고 짧은 기도를 드린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이들, 한국에 없는 너를, 생일인 조카를 생각하고 병원 검사를 앞둔 오빠를 생각하며 4월에 관련된 노래를 들으며 4월을 보내고 있다. 4월의 계획은 지켜지고 있는가...

 

 읽어야 할 책 대신 이승우와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 이승우의 소설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김훈의 소설은 삶에 관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손 닿는 침대와 책상, 소파에는 이런 책들이 있다. 공지영과 구효서의 단편집은 계획에 없던 주문이다. 공지영의 신간에 대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고통은 소설이 된다’는 문구에 홀린 것이다. 그리고 시집을 샀다. 기다렸던 유희경의 시집, 제목에 반해 구매한 안미옥와 한인준의 첫 시집. 유희경의 시집은 판형도 작고 아주 얇다.

 

 

 

 

 

 

 

 

 

 

 세 권의 시집을 나란히 두고 한 권의 시집에서 하루에 하나의 시를 읽어도 괜찮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끌리는 제목대로 목차에 상관없이 그렇게 읽는다. 그리하여 선택된 오늘의 시는 이렇다.  내일은 내일의 시가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내일은 다른 내일이 된다.

 


 

 저기, 저기로 가도 저기를 여기라고 부르고 말 거야. 우

리는 자주 여기에 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까. 승강장에

앉아 있는 널 일으켜본다. 함께한 새벽마다


 각자 돌아갈 집이 생각나. 가자. 내일이 오면 다시 출발

할 거야. 그런데


 도착하긴 하는 걸까. 드러누운 침대 위로 실패한 다짐

들만 가득해지는데. 캄캄한 강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 밤

마다


 우리는 확신하게 위해 서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모두

들 어디서 내렸을까. 움직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잘못 나온 지하철 출구로 다시 들어가면 우리가 보였다.

나는 우는 너에게 팔 벌려 정작 나를 두껍게 껴안지


 내 등을 흔들었다 「위로」, 전문 - 한인준

 

 

 

 

 

 

 

 

 

 

 

 

 기린과는 멀리 있을수록 좋다. 도마 위에는 화살표들을

쏟아놓고, 오래 신은 발을 일부러 놓쳐볼 것. 다른 곳에는

다른 것이 있다고 믿겠지. (…) 다른 것은 이곳에 있다. 낡

은 수첩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 어제 입은 옷을 세탁기

에 집어넣을 때. 아픈 팔을 기어코 어깨에 달고 있을 때. 그

림자를 자주 보고, 뜀틀에 손을 짚고 두번, 세번 만에 넘어

볼 때. 혹은 넘지 못할 때. 사과의 맛을 구별해낼 때. 누군

가에게는 괜찮다는 말, 익숙한 것들을 실제로 말해볼 때.

(…) 불 꺼진 복도에 불을 켜고, 고개를 돌린 사람과 마주

보게 되고. 시계, 침대, 문, 계단이 열리면. 이곳에는 다른

것이 있다고 믿겠지. 시작은 언제든지 시작된다. 바보들이

니까.  「나를 위한 편지」, 전문 - 안미옥

 

 

 

 

 

 

 

 

 

 

 

나에겐 화분이 몇 개 있다 그 화분들 각각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어쩌면 따박따박 잊지 않고 잎 위에 내려앉은 햇빛이 그들의 본

명일지도 모르지 누구든 자신의 이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젖

을 정도로 부어주는 물도 그들의 이름일 테지 흠뻑 젖고 아래로

쏟아낸 물을 다시 부어주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발을 보았다 거실의 부분, 환하다 「화분」, 전문 - 유희경

 

 

 

 

 

 

 

 

 

 

 

 

 조금씩 달라지는 아침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일, 산책이다. 시를 가까이 두는 일, 시집을 읽는 것이다. 아침을 만지는 산책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의지력은 약하고 게으름은 언제나 강하니까. 이파리가 자라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다. 산책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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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4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저 자주 기침을 할 뿐이라고 여겼다. 감기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언제나 정확하여 빨리 약을 먹으라고 부축인다. 아파트 단지에는 꽃들이 피기 시작하고 친구들의 안부에도 꽃 사진이 함께 한다. 그러니까 4월인 것이다. 노오란 수선화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꽃봉오리 속에 고운 색을 감춘 자목련이 가득한 4월.

 

 아침에는 다정한 이가 건네는 축복이 도착했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우리는 이렇게 또 한 계절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쌓이는 날이다. 오늘의 감정을, 오늘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싶다. 같은 듯 다른 하루를 보내는 우리다.

 

 3월에는 어떤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계획으로 끝났다. 계획은 미뤄지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다. 4월이 되었으니 4월의 계획을 세운다. 3월의 계획과는 완전하게 다른 것들로 세운다. 소박하고 하찮은 것들, 그러나 소중한 것들. 생각해보니 계획을 세우는 마음은 참 설레고 기쁜 것이었다. 그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지인의 선물과 내가 고른 나를 위한 선물. 장석주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천양희의 『새벽에 생각하다』, 잘 모르는 작가지만 끌리는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언제나 반가운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4월에는 젊은작가를 읽어야지. 박혜상의 『그가 내린 곳』과 줌파 라히리의 산문집 『책이 입은 옷』까지. 4월은 선물로 시작한다. 선물을 주는 즐거움과 선물을 받는 즐거움. 당신과 나에게 모두 즐거움이 흐른다. 5월에는 제임스 설터의 산문집이 나온다고 하니 5월의 즐거움이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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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4-0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3월의 계획은 거의 계획으로 끝난 것들이 많았어요.
4월엔 4월에 맞는 계획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목련님, 4월엔 더 설레는 일들, 더 기쁜 일들로 많이 채우시면 좋겠어요.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7-04-04 12:22   좋아요 1 | URL
4월엔 4월의 계획을, 우리 함께 실천하고 채워요!!
감기도 조심하시구요, ㅎ

blanca 2017-04-04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저도 기침 중이에요. 빨리 물러가야 할 텐데...자목련님의 서재의 책들을 하나 하나 보니 다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한 권은 읽어서 반갑고요. 희망을 품은 사월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목련 2017-04-04 12:23   좋아요 0 | URL
아, 감기와 싸우는 마음. 반가워하면 안 되는데 반가워요, ㅎㅎ
먼저 읽은 책, 궁금하네요.
올해의 4월은 좀 더 특별할 것 같아요. 잔인한 4월이 아닌 아름다운 사월이며 좋겠어요, 모두에게!!
 

 

 거실로 길게 들어오는 햇빛이 정말 좋다. 봄이라 그런가. 곧 노란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필 것이다. 이렇게 또 봄을 본다는 게 기쁘다. 이상하게 자꾸 말랑말랑한 감정에 빠져든다.  읽고 있는 소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감성은 메마른데 그렇다. 봄이 주는 숙제일까. 같은 자리에서 변화 없이 서 있다는 게 무섭도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감사하다. 같은 일상,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나이가 튼 탓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도 조금씩 달라진다. 소설도 많이 읽지만 에세이에 눈이 간다. 김탁환의 『엄마의 골목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꼭 곁에 두고 싶었다. 엄마의 골목이라니, 벚꽃의 도시 진해와 골목은 어떤 추억을 보여줄까. 벚꽃을 한 아름 안은 듯 마음이 밝아진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읽으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이승우의 소설은 이상하게 잘 안 읽게 된다. 소설집 한 권만 읽고 몇 권은 정리한 기억이 있다. 과연 이 소설은 읽을 수 있을까. 어쩌면 도전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있는 화분의 나무도 잘 키우지 못하지만 나무에 관한 책은 언제나 기대가 크다. 나무, 숲, 그것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랩 걸』은 이 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나를 제일 설레게 하는 책은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눈이 내리는 3월이다. 꽃이 피는 3월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혼자 피어나는 꽃을 생각하며 그것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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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용실에 갈 계획을 짜고 있다. 계획을 짰다는 말이 꽤나 거창하게 들린다. 아파트 가까운 건물에 새로운 미용실이 생긴다는 광고를 봤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매만지는 일은 내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용실을 방문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아직 그곳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를지 결정한 건 아니지만 조만간 미용실에 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말이다. 이사를 오기 전에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미용실에 다녔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세 번 미용실에 갔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거나 퍼머를 하는 게 전부였다. 이사를 온 후에는 병원 옆에 있는 미용실에 다닌다. 진료를 받을 일이 생길 때 아침 일찍 미용실의 첫 손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내 머리카락은 제법 길다. 수술하기 전 도토리 모양에서 옥수수수염처럼 길게 자랐다. 재작년 겨울에 자른 것이다. 작년 가을에 만난 친구는 단발  형태를 보고 이제야 좀 괜찮다고 말을 했었다. 머리 모양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머리카락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의 변화를 보고 사람들은 심경의 변화를 짐작한다. 어떤 결심의 표현으로 머리카락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옷차림도 변하지만 머리 모양도 변한다. 입춘이 지났고 2월은 절반이 남았다. 절반은 아주 많거나 아주 적은 모양과 부피를 떠올리는 말이다. 절반 정도 읽었다는 말과 절반 정도 남았다는 말은 같은 듯 다르게 다가온다. 내 2월의 절반은 어느 쪽으로 가고 있을까.

 

 미용실에 갈 계획은 잠시 미루고 책을 고른다. 알림 문자가 반가운 조해진의 『빛의 호위』, 알라딘에서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올 거라고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창비에서 나왔다. 그리고 뜬금없이 생각이 난 최윤의 소설집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이 소설집은 언제 읽을지는 알 수 없다.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도 있지만 조금씩 읽고 있는 소설도 있다. 우산을 좋아하기에, 이런 제목의 소설은 더욱 좋다. 호텔 프린스』속 황현진의 「우산도 빌려주나요」의 첫 부분을 옮기면 이렇다. 우산이 등장한다.

 

 그녀는 엄마를 마중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날씨가 나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하루에 서너 번씩 꼬박꼬박 전해졌다. 기상 캐스터의 말대로라면 주말 안에 기필코 상륙할 예정이었다. 거리는 혹시 모를 수해를 대비하느라 소란했다. 가게들은 차양을 펼쳤고, 천변에는 통행금지 표지판이 세워졌으며, 행인들은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걸었다.

 

 허은실의 첫 번째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도 읽으려 한다. 제목처럼 잠깐 설운 삶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깐은 금세 지나가는 시간이니 견딜 수 있고 그 시간의 끝에는 단단한 마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잠깐이 반복된다면 곤란한다. 곤란한 상태를 떠나 힘겨워진다. 어쨌거나 나는 이 시집을 읽을 것이다. 읽고 있는 책을 잠시 멈추고 말이다. 잠깐 멈추고. 우선 이런 시부터.

 


  늦은 찬으로

 묵나물을 먹는다

 

 나물 삶는 냄새

 가득한 마당

 어린순을 한 짐씩

 부려놓던 사내

 

 새 흙무덤에

 고사리 고사리

 

 이러다 봄이 오겠어  - 「변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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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14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용실은 가지 않지만 , ㅎㅎ 자목련 님은 잘 다녀오세요 ~^^

자목련 2017-02-15 10:17   좋아요 1 | URL
미용실을 시작으로 치과도 가야 하고, 갈 곳이 많아요, ㅎ

[그장소] 2017-02-15 12:38   좋아요 0 | URL
아하핫~ 바쁘게 휭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