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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이 되었다. 겨울이 가까이 온 듯 추위가 몰려온다. 두꺼운 이불을 꺼내고 거실엔 온수매트를 꺼냈다. 곧 첫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기다렸던 비가 무섭게 내리던 11월의 첫 금요일 늦은 오후 남동생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동생은 내 말대로 국도를 달렸다. 그러나 곧 우리는 길을 잃었고 가까운 길을 놓쳤다. 덕분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터널을 지나왔고 낯익은 듯 낯선 주변을 맴돌았다. 익숙한 도로가 나올 때까지 불안한 마음도 함께 말이다. 큰언니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베란다의 화분은 여전히 쑥쑥 자라고 있었고 안 방은 전기 스위치가 고장이 나 있었다. 환기를 시켰고 그곳으로 도착한 사촌동생과 책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를 돌렸다. 한 번씩 들렀을 때 사용한 수건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재방송을 하는 채널을 통해 정려원과 김현주가 나오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고 큰언니가 사다 놓은 생강차를 개봉해 뜨거운 차를 마셨다. 사촌 동생과 큰언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상자 가득 보관된 언니의 모자를 써 보며 언니를 떠올렸다. 큰언니가 좋아했던 꽃코사지와 벨트, 액세서리를 정리했다. 책은 한 권도 가져가지 않았고 집에 도착해서 이런 책을 주문했다. 한강이라서,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한다는 고통을 떠올리며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김영하의 산문 마지막인 『읽다』,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 아니지만 출판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거부할 수 없는 독자라서 진연주의 『코케인』까지. 김영하의 책은 조금 더 기다려야 도착할 것이니 기다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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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날이 있다.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날. 그러니까 전화기를 통해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만나는 날 말이다. 오늘이 그랬다. 오후에 들어 네 명의 목소리를 만난다. 셋은 친구였고 나머지 한 분은 선생님이셨다. 오직 단 한 분, 중학교 3학년 국어를 가르치셨던 분이다. 올 2월에 휴직을 하시고 사부님의 직장 때문에 중국에 나가셨다고 한다. 이상한 건 이번 주 내내 선생님과 통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스승의 날이나 추석 명절에 작은 정성을 보내드리면 짧게는 문자로 답을 주시거나 전화를 주셨는데 올해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바쁘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한국이 아닌 중국에 계셨고 잠깐 한국에 들어오셨다가 이제야 내가 보낸 것들을 받으셨다고 한다. 첫 발령을 받은 초보 선생님과 제법 순수했던 소녀는 이제 어떤 소재든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세 명의 친구는 그들의 삶 속에 나를 포함시켰고 나 역시 그러하다. 계획하고 있는 일들과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에게 쌓인 시간의 두께와 상관없이 언제나 단단하다. 단단하다는 믿음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소중한 사람을 곁에 두었지만 삶이란 혼자만의 것이다. 사소한 것들로 시작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것들의 선택은 혼자서 해야 한다. 고통과 슬픔도 나눌 수없다. 나눌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그것을 지켜보는 힘든 과정을 견뎌야만 한다. 때로 그것은 길고 긴 시간이 된다. 때로 그것은 혹독한 형벌이 된다. 미셀 슈나이더의 <슈만, 내면의 풍경>속 이런 구절에서 나는 감히 누군가의 고통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만히 기도한다.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다시는 꽃 피지 않기를...

 

 

 고통은 남과 소통할 수도,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도 없다. 고통에게는 탄식이나 한탄이 낯설다. 아마도 고통은 곧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누군가와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다. 심지어는 의미와 무의미의 대조에도 못 미치는, 우리가 의미를 완전히 상실할 때 도달하는 상태일 것이다. 광기 속의 고통은 물론 그 자신의 고통과 소통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말 그대로 무감각한 상태의 것이다. 병든 슈만은 온순하게 의사의 지시를 따랐는데, 아픔을 잠재울 수 있는 처방만은 거부했다. 그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싶어 했는데, 그 원인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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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9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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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9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며칠째 안개가 걷히는 모습을 지켜본다. 가려졌던 것들이 보이는 시간. 새삼 새롭다. 거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존재하는 것을 보는 건 마치 새로운 세계가 등장하는 것처럼 기묘하다. 사라졌다가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세계가 우리가 모르는 우주 어느 곳에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우주를 상상하며 미세먼지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여전히 비를 기다린다. 선명하고 예쁜 노랑들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날들, 그 가운데 노랑 하나를 내 곁에 두는 일도 쉽지 않다. 뜬금없이 이런 문장을 읽고 옮긴다. 

 

 

 슬픔과 애도는 개인적인 것이다. 그 사람이 생전에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의 무늬와 빛깔이 저마다 다른 만큼, 그를 잃은 슬픔의 무늬와 빛깔도 서로 달라 개인적인 것이다. 물론 무늬와 빛깔이 서로 다르더라도 서로를 안아주고 토닥이며 슬픔을 공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부모를 잃은 형제들 사이에도 그건 예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금세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자신만이 홀로 남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남긴 빈자리와 공허를 감당해내야 한다.

 

 슬픔과 애도가 개인적인 것이라 말은 그것이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슬픔과 애도가 늘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공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긴 하되, 그를 깊이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개인적인 슬픔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추상적인 슬픔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그를 애도하는 것이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이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애도의 사적인 공간을 존중해줘야 하는 이유다. (103~10쪽)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175쪽)​

 

 내가 이 소설을 다시 구매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정작 소설을 읽을 때에는 보통의 죽음과 보통의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누구나 경험하는 계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다. 여름은 멀어졌고 가을도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삶이 끝없이 계속될 거라 믿는 것처럼 난데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삶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여도 애도는 계속된다. 삶과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삶이지만.

 

 

 생에서 단 한 번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 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 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 모두들. (스무 살, 44쪽)​

 

 김연수의 소설을 읽은 시간은 기쁨이 충만하다. 스무 살로 기억하는 어떤 사람, 어떤 공간, 어떤 색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스무 살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 시기를 함께 한 그것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슬픔, 분노, 절망, 두려움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눈 사람들. 스무 살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어제와 오늘을 보내는 것들도 그렇다. 그 놀랍고 감사한 것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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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리만치 긴 여름 탓일까. 추석이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자꾸 했고 연휴 이틀은 오빠네 식구와 함께 보냈다. 함께 했다는 건 밥을 먹고 TV를 보고 과일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잤다는 말이다. 추석날은 주일이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이곳은 시골이라 추석 전후가 정말 바쁘다. 오빠와 올케언니는 하루를 하루가 아닌 이틀 정도로 살고 있는 듯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마늘을 심고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다고 했다. 거기다 심각한 가뭄까지 농부의 마음은 더욱 무겁고 바쁘다.

 

 연휴가 끝나고 큰언니 집에 다녀왔다. 서류가 증명해주는 것들을 처리하고 옷과 가방, 그리고 책을 정리했다. 정리하는 중이라는 말이 맞다. 여전히 우리는 정리 중이다. 그곳에서 10월을 맞았고 쏟아지는 시원한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가을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큰언니와 온전히 사계절을 보낸 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절을 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의미를 부여하는 게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바다가 계절마다 다르게 느껴지지만 바다라는 존재만으로 든든한 것처럼 말이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상한 피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뜨거운 열기로 피곤을 누르는 일상이지만 책으로의 복귀는 어렵다. 가져온 책을 정리하고 ​읽은 책에 대해 무언가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대단한 것을 쓰려고 하는 게 아닌데 그물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물을 잘라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책에서 비롯될 것이다. 반가운 김연수 소설의 소식도 그렇다.  반가운 김연수 소설의 소식도 그렇다. 세 권의 책이 재출간되었지만 스무 살『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만 취한다. 두 권의 소설과 함께 김연수를 읽을 좋은 사람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예쁜 민트여서 자꾸 눈이 가는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 색다른 몽골의 얼굴을 보여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영감 아닌 염감을 줄 거라 믿는 조에 부스케의 달몰이를 펼치는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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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는 누구도 고향을 보는 사람은 없다. 고향은 멀리 있고 삶은 삶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중이다.’ (49쪽)

 

 모어(母語)를 잊고 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설령 모어를 잃어버렸다 해도 말이다. 어쩌면 말은 음식과 같아서 그 맛을 영원히 간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잊을 수 없어 언제나 그리워한다. 독일 뮌스터에서 23년째 살고 있는 시인 허수경도 그럴까? 타국에서의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뮌스터의 산책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시인의 산책기는 달랐다. 그녀는 독일 뮌스터를 걷는 동안 독일 시인의 시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시와 함께 걷는 뮌스터라 할 수 있다. 산책의 처음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로렐라이」다. 청아하고도 슬픈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하다. 마치 뭔스터는 반드시 저녁에 걸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공기는 차고 어두워지네, 그리고 라인 강은 조용히 흘러가네 산꼭대기는 반짝인다 저녁 햇살 속에서’

 

 허수경이 걷고 바라보는 뭔스터는 이상하게 아련하게 다가온다. 어느 도시든 마주하게 되는 박물관, 성당, 시장, 그곳에서 마주하는 삶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치의 지독한 만행으로 물든 도시도 아닌데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잠재적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특히 사진으로 만나는 츠빙어는 어떤 먹먹함을 몰고 온다. 도시의 방어를 위해 내벽과 외벽 사이에 지어진 공간이지만 나치가 장악했을 당시는 감금과 죽음으로 채워진다.

 

 사라진 존재에 대한 기록과 기억은 무엇으로 존재하며 누구에 의해 전해지는가? 그가 요절한 시인의 시와 삶을 나직하게 들려주며 뮌스터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든다. 전쟁을 기억하는 도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옛 시청과 분주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중앙시장. 그 안에서 저마다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든 기억을 우리는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그것은 모든 과거 위에서 현재를 사는 인간의 일이다. 미래의 인간들은 옛날로 들어간 우리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남긴 흔적으로만 우리를 복원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미래에 가공될 통조림 속의 꽁치 같은 우리다. 우리가 과거를 박물관에 넣어 보관한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105쪽)

 

 이상하게도 뭔스터를 상상할 수가 없다. 내게는 멀고도 아득한 그곳이다. 긴 시간의 끝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거리를 실감한다.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지도를 펼치고 시인이 걸어온 곳곳을 짚어봐도 뮌스터가 아닌 그 도시의 벼룩시장을 홀로 걷고 있을 작은 얼굴의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천천히 다가오는 저녁의 그늘 속에서 누군가를 이름을 부르는 모습만 생각난다.

 

 ‘삶이라는 것은 버릇을 되풀이하며 기억을 재생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뜻한’ 기억에 대한 소망은 그 안에서 부풀어오른다. 기억 앞에 ‘차갑다’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해도 지나간 것들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진저리가 쳐진다 해도 그리운 그 무언가를 품고 있다. 지나간 것이니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까.’ (151쪽)

 

 그리움이란 말로 남은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기록을 담은 『길모퉁이의 중국 식당』과 함께 읽으면 허수경의 숨결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이 향한 곳에 수많은 그대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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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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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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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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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16: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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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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