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트렁크에 짐을 챙겼던 작은 언니는 어제 아침에 일찍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고 연락할 수 있을 때 연락을 하라고 인사를 나눴다. 오후에 도착한 문자는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공항에서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다시 연락이 온 건 밤 11시 30분쯤, 홍콩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22시간 이상을 소요해 도착할 계획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폭염의 날들, 집 안에서도 고생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늦은 오후에는 친구가 안부를 전했다. 카페와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인데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다. 친구는 여름을 견디는 중이라고 말했다. 잘 견뎌야 하는데 그냥 견딘다고. 그러니 여름을 잘 견디자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잘 견딘다는 건 무엇일까. 견딘다는 것과 잘 견딘다는 건 감정의 차이일까. 받아들임의 차이일까. 견디는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잘 견디라는 건 압박을 가하는 게 아닐까. 견디다, 견디다,를 중얼거리다 말았다.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옅은 현기증과 함께 지속되는 낮이다. 어린 시절 모깃불을 피우며 별을 보던 날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싱그러웠던 여름밤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모든 것은 괜찮다,로 통한다. 여름의 시간은 낮과 밤의 분명한 경계를 만든다. 밤이 되면 이 문장을 다시 읽고 싶다. 밤에 만나는 문장은 낮에 만나는 문장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낮에는 세상이 너무 훤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밤의 어둠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고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밤에 나는 더 작은 존재이다. 그래서 더 큰 존재에 포함되는 존재다. 밤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생각, 생각을 하고, 그리고 글을 쓴다. (김행숙 『사랑하기 좋은 책』의 일부)

 

 여름의 시간이 흐른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흘이 지나면 입추인데 여름은 고여있는 것만 같다. 조금씩 흐르는 여름. 어쩔 수 없이 작년의 여름을 떠올린다. 작년에도 더웠고, 작년에도 땀을 많이 흘렸고, 작년에도 무기력했다. 서로를 격려했던 여름이었구나, 서로를 안아주던 여름이었구나, 뜨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여름이었구나. 서로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여름이었지만, 말은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있었다. 겨우, 사랑한다는 말만 건넸을 뿐이다. 그 안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믿으면서.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는다. 조금씩 읽는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른 채 읽는다. 그저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당신을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그렇게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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