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마음만은 변한 적이 없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 같다.
예의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말 중)

오랜만에 정이현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달콤한 나의 도시>와 <오늘의 거짓말> 그리고 <상냥한 폭력의 시대>.
소설이 나온 시기만큼 작가와 나는 함께 커온 느낌이 들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느끼고 있는 그런 감정들 생각들을 공감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9년만의 새소설집으로 묶인 단편들은 현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숨에 일곱편의 단편을 읽어내려갔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를 읽으며 외로운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의 무미건조함, 잊고 지내던 과거가, 통신망의 발달로 사람찾기가 수월해진 요즘,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과거를 끊어낼 수 없고 과거에 매어 살아가는 사람들, 아버지의 옛애인이 가장 친한 친구로 남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현실이 서글펐다. 샥샥이라는 생명력없는 고양이인형과 함께 살던 나에게 유산으로 남겨진 거북이 바위,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아이는 살아 있을 것이다. 천천히 생명을 어어갈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기억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읽으면서 지원의 이율배반적인 선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를 생각했다. 열여섯의 딸아이가 어느날 미숙아를 출산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인큐베이터 안에서 살아숨쉬는 아이의 수술시기를 지연하는 지원의 판단을 나는 욕할 수가 없었다. 내 아이가 이제 겨우 열여섯이고 미숙아를 낳았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했을 것 같다. 지원처럼 미숙아를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나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속물인 것 같다.

<우리 안의 천사>에서 남우와 나의 동거이야기는 얼마전 읽었던 박완서님의 <도둑맞은 가난>이 떠올랐다. 물론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동거를 시작하는 남녀의 공통적인 부분은 생활비를 아껴보겠다는 것이다. 공동생활비로 생활하면 아무래도 공과금 등이 절약되는 건 맞는 것 같다. 동거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고는 정말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우가 자신의 친부를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으며 이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여자를 유혹한 건 아무래도 트렁크 속의 지폐다발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정말 속물적인 존재일까? 나라면 어땠을까? 동조했을까? 무서워서 도망쳤을까? 이 모든 가정은 닥쳐보지 못했으므로 모르겠다. 닥쳐봐야 알 것 같다.

<영영, 여름>에서 두 소녀의 짠한 우정에 가슴이 저릿했다. 영영, 이별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0년, 20년이 흘러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밤의 대관람차> 이 소설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소설 속 나가 25년동안 교사생활을 하였으니 40대후반 혹은 50대초반의 중년여성이다. 첫사랑과 닮은 이사장에게 남모를 감정이 생겨나고 알 수 없고 의미없는 말과 행동에 신경을 쓴다. 그러고보니 여자들 대부분 그런 것에 의식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아닌 남자를 자신도 모르게 의식하게 된다. 또한 살다보면 애절하게 사랑했던 누군가도 쉽게 가슴에 묻고 살고 심지어 함께 잘 살아보자고 결혼한 남편과의 관계도 의미없는 형식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건 정말 나이들어가니 알 것 같다. 똑같진 않지만 그럴 수 있어하고 공감이 저절로 되는 소설이었다.

<서랍 속의 집>에서는 전세계약만료 2년뒤면 보증금을 올리거나 이사해야하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에 남의 집 얘기같지 않았다. 우리도 아이들 크면서 이사다니기 힘들고 전세보증금 때마다 올려주는 것도 고달퍼서 저금리시대에 맞춰 대출 받아 집을 산 상황이라 가장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지금도 아쉬운 일은 부동산업자들의 현란한 말솜씨에 휘둘렸다는 사실인데 소설 속 부부는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것 같았다. 정말 집 살때는 꼼꼼히 살펴보고 사야하는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만 생각하다보니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작정하고 속이려는 사람은 정말 이길 수가 없다. 부동산업자들의 능수능란함이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안나>의 경처럼 나도 나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에게 질투를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보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던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경은 안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생활의 불만족을 토로하며 안나에게 위로 받았지만 정작 안나에게는 상처로 남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은 안나를 만날때면 어떤 옷을 입던 어떤 음식을 먹던 괜찮았다, 격의없이 지내는 사이라기보다 그녀를 은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의 선행처럼 베풀어진 행동은 악의는 없다고해도 안나에게는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뿐아니라 전 시대에도 여자들의 허영과 허례가 담긴 소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상냥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안나처럼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겠다. 그게 두렵고 싫어서 그런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묻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상냥함을 가장한 폭력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좋은 소설은 계속해서 나를 돌아보고 생각하게 한다. 동시대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을 읽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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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2-24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 드립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

꿈꾸는섬 2016-12-24 09:26   좋아요 0 | URL
서재에 소홀했던 한두달간이 부끄럽네요. 오거서님 축하 감사합니다. 오거서님도 서재의 달인 되신 것 축하드려요.^^
행복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2016-12-24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4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