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오기님 서재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다. 걸걸한 입담에 구수한 사투리. 아무래도 나는 입이 걸진 사람을 좋아하는 듯, 구라로 유명한 황석영 선생님도 고개를 절래절래 한다니 그럴 것도 같고 비슷한 것도 같고 어째 시집을 읽으며 유쾌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픈 것도 같은데 웃긴 것 같고 재밌는 것도 같은데 짜릿한 것도 같은 그런 복잡 미묘한 생각들이 얽히고 설켰다. 참 매력적인 시집 한권을 읽고 있단 생각을 했다. 소리내어 읽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순오기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다. 충청도 사투리가 전라도 사투리의 질펀함을 넘어선다. 맛깔난다.
스무살 무렵에 읽었어도 좋아했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세상 물정 조금 알만하단 생각이 드니 시인의 정서가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듯, 어찌보면 참 야한 것도 같고, 어찌보면 청소년들 보기에 민망한 것도 있는 것 같고, 뭘 모르고 보면 모를까 모르지만, 어느새 알 거 다 아는 나이가 되니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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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구이집에서
빙판길이든
눈 녹은 진창길이든
조개껍데기가 그만인 겨
조개란 것이 억만 물결로 이엉을 얹었는디
같잖게 사람이나 자빠뜨리겄남?
죽으면 썩어 읎어질 몸뚱어리,
조개껍데기처럼 바숴질 때까지 가야 되잖겄어?
나이 사십 중반이면 막장은 거짐 빠져나온 겨
피조개 빨던 입이라고 사랑하지 말란 법 있간디?
연탄 한 장 배 맞추는 것도, 연탄집게처럼
한꺼번에 불구녕에 들어가야 되는 겨
자네 하날 믿고 물 건너 왔는디
하루하루 얼매나 섧고 폭폭허겄나?
요번엔 뗏장이불 덮을 때까지 가보란 말이여
관자 기둥까지 다 내어주는 조개처럼
몸과 맘을 죄다 바치란 말이여
사랑도 조개구이 같은 겨
내리 불길만 쏴붙이다간
칼집 안 낸 군밤처럼 거품 물다가
팍 뛰쳐나간단 말이지
조개는 혓바닥이 발바닥이여
제발 혓바닥으로 노 젓지 말고 발품을 팔란 말이여
산 조개만이 혀 깨무는 고통이 있는 겨
갱개미 바람벽 쳐다보듯 멀뚱멀뚱
자작만 하지 말고 한잔 따라보랑게(6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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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쪽 '참 빨랐지 그 양반', 87쪽 '잘 나간다는 말', 94쪽 '내포석재 애기불'은 내 맘대로 19금으로 지정한다.
이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아무래도 24쪽 '도깨비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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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기둥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내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 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겨울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앗빛, 그 솟구침, 그 얼음 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을 처박은 자리, 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 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하늘 주소까지(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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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인은 고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신단다. 그래서 한자에 대한 이해가 담긴 시도 간간이 있는데 그 해석이 참 마음에 든다.
시인들은 언어의 천재성을 가진 분들임에 틀림없단 생각을 오늘도 한다. 그의 걸걸한 입담에 섬세한 관찰력, 세심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여럿이다.
오늘 오후를 유쾌하게 보냈다.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시를 읽는 재미가 톡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