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래를 사냥할 때는 어떤 동물을 죽이는 일과는 다른 게 있다. 고래를 쫓아다닐 때는 저와 내가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게 있다. 작살을 쏠 때도 그렇고. 나는 새끼 데리고 다니는 고래는 안 잡았는데 고래와 마음이 통해서 그랬다. 고래가 꽃을 피울 떄는 고래 영혼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고래 생명력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그후 며칠간은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 모른다."(103)  
   

열일곱살 니은이, 어느날 교통사고로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잃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 엄마와 아빠를 잃은 소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는 상상해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끈 떨어진 연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만 정처없이 흘러만 갈 것 같다. 혼자 있는 집, 고모와 이모, 그 어떤 곳도 니은이에게 안식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로 가던 길에 늘 다른 곳으로 향하던 니은이의 발걸음이 이해되는 건 그곳도 니은이의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정유공장이 들어서면서 바닷물에 기름이 둥둥 떠다니고 그 뒤로 헤엄을 칠 수 없는 바다가 되었다는 아빠의 고향, 그곳은 전설처럼 전해오는 처용과 황옥의 이야기가 있고, 고래 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미국자리공나무로 온산이 붉게 물들었다는 산에 사철나무 등 우리 나무를 옮겨 심어 공해를 막았다는 장승포 할아버지, 그분의 전설처럼 들려오는 고래잡이 이야기, 국제포경협회에서 포경금지규칙을 선포하고 다시 고래잡이를 나설 날을 기다리며 고래잡이 배와 고래 잡이에 필요한 도구들을 온 집안 곳곳에 간직하며 산다. 식당을 운영하는 왕고래집 할머니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한글 공부를 시작하고 그곳의 주인없는 개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며 살아간다. 이분들이 사는 곳으로 흘러 온 니은이는 장승포 할아버지와 왕고래 할머니를 보며 자신을 들여다본다. 열다섯에 시집 온 할머니, 열여섯에 포경선을 탄 할아버지, 그때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열일곱살 니은이.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어른이 되겠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고해서 어른이 되는 것일까? 내 나이 열일곱에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진정한 어른일까?를 생각한다. 여전히 어리광 많은 소녀일때가 더 많으니까 말이다. 가끔 내가 낳은 아이들조차도 버겁다고 생각될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왕고래 할머니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어른이 된건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 아프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언가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고래박물관에 모든 걸 기증하기로 하고 장승포할아버지는 다시한번 바다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니은이 왕고래할머니, 할아버지의 친구, 경찰 등등 관계자들을 태우고 바다로 나간다.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앞으로 남은 날을 어찌 살아갈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을 보내던 니은이는 바다 한 가운데 헤엄치는 고래를 본다. 무수한 바다 생명을 보며 삶의 또다른 문을 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액자 그림을 오래 올려다보고 있은 모양이었다. 장포수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계속 궁금해하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바위그림이 왜 중요해요?"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또 가만히 있었다.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할아버지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난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나은지, 기억하는 게 좋은지.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여전히 할아버지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다른 방식으로 물어보았다. 기억하는 일이 힘들고 따가워도 기억해야 하는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오래 고개를 끄덕이면서 할아버지가 기증한 물건들이 전시된 방을 바라보았다.
  "나도 기억하는 방법을 몰라서 저 물건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내 인생을 낡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만든 셈이지. 잘 떠나보내고서 기억하고 있으며녀 도는 걸."
잘 떠나보낸 뒤 기억하기.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입 안에서 반복했다.(236)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세월>은 내가 좋아하는 김형경 작가의 작품들이다. 여기에 <꽃피는 고래>까지 추가하려고 한다. 작가의 풍부한 감성과 사고는 작가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날카롭지만 아프지 않은 그런 내용을 늘 담고 있다.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 기억해야한다는 멋진 말을 할 수 있는 건 역시 작가의 역량이라 생각한다. 

니은이가 부모을 잃고 헤매이고 다녀고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잘 이겨나가기만을 바라는 그런 마음뿐, 특별히 안쓰럽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고래 할머니의 편지에는 어찌 그리 눈물이 나던지 모르겠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편지글을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제니 에미 보거라.
  너도 자식 키워봤으니 이제 알겠구나. 에미 창자는 개도 안 먹는다는 말. 하도 속이 썩어문드러져서 그렇지. 죽은 영감한테는 남은 마음이 없다. 생전에 할 만큼 해줬으니 맺힌 게 없지. 영감도 없을 거다. 그런데 제니 에미야, 자식은 다르다는 거, 너도 알제? 죽는 날까지 자식을 마음에서 못 내려놓는 게 에미다. 죽은 후에도 더 잘해주지 못해 안쓰러운 게 에미다.
  네가 더이상 술도 못 먹을 정도로 술병이 깊어졌을 때, 너도 알제? 내가 부처님, 하느님, 용왕님, 천지신명을 부르며 딸년 살려달라고 매달렸을 때. 네가 까무러친 듯 누워서도 내 중얼 거리는 소리 들었다 했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밖에 없더라. 네가 죽 한모금 못 넘기고 누었는데. 나도 물 한모금 안마시면서 곁에서 애원했다. 사흘째 되는 날 네가 몸을 일으켜 물 찾을 때는 덜컥 겁부터 나더라. 또 술 찾을까봐. 꿀물을 타줬지. 너는 꿀물 한사발 들이켜고는 허물벗듯 자리겡서 일어났다. 허물을 벗듯 다른 사람이 되더라. 제니 에미야, 그해 어미나날 나한테 꽃 준 거 기억하나? 꽃도, 꽃도 그리 곱던지. 네가 내 딸이어서 평생 좋았다. 에미로 사는 게 고맙고 고마웠다.
  제니 에미야,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게 꼭 하나 있다. 너는 내가 아침마다 부엌에 정화스 떠놓는 일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제? 신이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불공평할 수 없다고 했제? 신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사람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너는 내가 초하루마다 절에 가는 거 싫어하지. 정월 보름에 바다에 나가 비는 거, 첫 벼이삭을 항아리에 담아 간수하는 거, 모두 미신이라 배웠다고 했제?
  미신인지 귀신인지 그런 건 나는 모르겠다. 다만 시어머니가 해오신 대로 하는 거고, 시어머니도 당신 시어머니가 하던대로 하신 거지. 제니 에미야, 네가 죽은 듯 누었다가 사흘 만에 새사람으로 일어난 거만 잊지 마라. 배운 사람들은 파도가 높은 이유를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만 우리야 태풍도 용왕님 뜻이려니 한다. 조상 대대로 해오던 일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맘뿐인 기라."(24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3-2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스물 몇살의 어느 봄날, 잔뜩 집중하면서 읽던 책입니다.. 김형경. 그립네요^^

꿈꾸는섬 2010-03-22 09:53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더랬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