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맞춰봐도 수직 수평이 잘 맞지 않는다
조금은 기울고 찌그러진 것들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헐려야 했을까
모자란 대로 장독들이 깊은 잠자기에는 그만
사람도 그만한 공간 없기가 일쑤인데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도 재활용할 겸
닭들도 놓아기르면 좋겠다는 생각


......


기울어진 쪽에 받쳐준
오비끼나 투비끼 하나처럼
저 고목나무 부러진 가지를 받치고 선
녹슨 철 써포트 하나처럼
어딘가 손 하나가 필요한 곳에
내 손 하나가 잇었다면
그것으로 그만, 무엇을 기억할 일도
남길 일도 없다. 아침만이 있을거라고
나는 이제 믿지 않는다



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 중(59~61쪽)

 
   
   
 

그렇구나 우린 단지 걷고 있을 뿐이구나
헬기도 장갑차도 대공포도 하나 없이
세계 최강 미제국의 군대에 맞서
곤봉으로 맞을 길을 찾아, 경찰서로 끌려갈 일을 찾아
가다가다 보면 레바논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라크로 이어져 총 맞을 일을 찾아
우리는 다만 걷고 있을 뿐이구나
이름 없는 풀꽃 하나에 마음 쓸리며
철조망 넘나드는 나비들의 자유로운 유여을 부러워하며
철부지처럼 그냥 그렇게
역사의 뒤안 길을 걷고 있을 뿐이구나


하지만 아이야
그래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길이 있단다
가다보면 벗이라곤 저 하늘에 별뿐이더라도
저 포탄도 전투기도 레이더도 끝내 따라오지 못할
역사의 먼 길이 있단다
엄마와 아빠는 그 길로 가고 싶은데
아이야, 조금만 더 우리를 기다려 주면 안되겠니
대치리 어느 폐가, 지킴이의 집에서
곤히 잠든 아이 머리맡에 앉아
가난한 상념에 젖곤 했다 

황새울 가는 길 중 (112~113쪽)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참, 좆같은 풍경 중 (118~119쪽)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주름들이
내 삶의 나이테였다 하나하나의 굴곡이
때론 나를 키우는 굳건한 성장통, 더 넓게
나를 밀어가는 물결무늬들이었다 주름이
참 곱다라는 말뜻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산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수많은 아픔의 고랑과 슬픔의 이랑들을 모아
수많은 아픔의 고랑과 슬픔의 이랑들을 모아
어떤 사랑과 지혜의 밭을 일구는 것일 거라고
혼자 생각해보는 것이다



주름 중 (120~121쪽)

 
   
   
 

아직 오지 않은 말들



언제부터인가
있는 말보다
없는 말을 꿈꾼다


금세 가족이 되어 동화되는 말들은
그 말들이 아니다 그의 말들은
닮기 위해 오지 않고
설명하기 위해 오지 않는다


나는 이 말들의 음역이
좀체 떠오르지 않아
많은 날을 벙어리처럼 침묵해야 했다
때론 벽을 쿵쿵 울려보기도 했다


나는 오늘도 이 말들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아귀처럼
어느 길목에서 그 말들이
내 몸을 삼길 수도 있다


나는 전혀 다른 목숨으로 그 말들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말들은 뼈를 토해놓고
이것이 말이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수없이 감아버렸던 눈이 떠오르고
수없이 닫혀가던 세상의 문들이 떠오르고
하얀 스크린을 올릴 일보다는
이젠 내 인생의 검은 막을 내려야 할 때가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에 빠졌을 때
아무래도 저세상은 있는 것 같다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는 게 쓸쓸할 수가 있느냐고
이 생은 파토라고, 이런 것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당신들은 이것이 사는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나무들처럼 나도 한 계절의 막을 내리고
다시 한 생의 막을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다
사람은 죽어서 꼭 풀벌레로만 환생하는 게 아니라
저 셔터로도 태어나고 저 자물통으로도 태어나고
저 뼁끼로도 태어나는 걸 거라고 생각도 해보다
셔터라는 말 한마디에도 이리 목메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셔터가 내려진 날 중 (128쪽)

 
   
   
 

혁명


나는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싸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나는 왠지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공단 거리를 걸어뫄도
촛불을 켜봐도, 전경들 방패 앞에 다시 서봐도
며칠째 배탈 설사인 아이의 뜨거운 머리를 만져봐도
밤새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해봐도
나는 왜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까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 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수조 앞에서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잇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학생이 아니다
졸업한 지 오래됐다
당신은 노동자다 주민이다
시민이다 국민이다 아버지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남편이고
학부모며 집주인이다
환자가 아닉 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모두다
아침이면 건강쎈터로 달려가 호흡을 측정하고
저녁이면 영어강습을 받으러 나간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구조조정엔 찬성하지만
임금인상투쟁엔 머리디 묶고 참석한다
집주인이기에 쓰레기매각장 건립엔 반대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과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
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FTA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
학교폭력은 안 되지만, 한 남성으로
원조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
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 나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반대하지만
북한에 보내는 쌀은 상호주의에 어긋나고
미군은 절대 철수하면 안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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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페이퍼도 그렇지만 여기도 송경도 시집을 상품넣기하면 알아보기 좋겠는데요.

꿈꾸는섬 2010-02-04 20:51   좋아요 0 | URL
네, 그 생각을 미처 못했네요.

비로그인 2010-02-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들기 전(쪼금 더 후에 잠들거지만,,,.) ... 뭔가 생각할 거리를 이고서 올리신 시를 읽습니다아~

꿈꾸는섬 2010-02-11 23:32   좋아요 0 | URL
이 시집 참 인상깊었어요. 생각할 거리가 참 많더라구요.

바람결님 안녕히 주무세요. 전 이제 그만 자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