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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마치 먼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읽는 동안에도, 다 읽은 후에도 여독이 쉽게 풀리지 않는 기분이랄까. 가볍게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나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고 주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서 여행이 아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행을 하다 온 것 같다고 할까.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의 인생역정을 따라가다 보면 숨이 턱에 찬다. 주인공은 이 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살아남아 의도치 않게 전쟁영웅이 되어 추앙받는 껄끄러운 상황이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던 엘라와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고 죽음보다 더 끔찍했던 일본군 전쟁 포로 시절의 이야기는 전쟁영웅의 미화된 이야기로 바뀌어 회자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단 한 번의 사랑이었던 젊은 시절에 만나 무모하리만치 사랑에 빠졌던 젊은 숙모 에이미와의 사랑은 평생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둘을 사랑했던,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단 한 번의 거짓말에 의해서 어그러지고 그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인간성도 말살당한 채 억울하고 무의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동료 전쟁 포로들의 이름 없는 삶들은 평생을 걸쳐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으로.
그는 대중매체에서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도 아닌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비열한 바람둥이 성공한 외과의사 도리고 에번스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멋진 전쟁영웅 의사인 모습보다는 실제 모습인 행복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살아내고 있는 있는 도리고 에번스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갖게 된다. 단 하나의 사랑을 여러 상황과 적당히 타협했던 삶 속에서 잃었고 용기를 더 내지 못하고 망설였던 그 순간을 이해할 수 있기에 마음이 아렸다. 전쟁 포로 시절의 수많은 고통스럽고 모멸스러웠던 상황들이 미화되고 치장되었을 때, 전쟁 포로들이 한낱 소모품보다도 더 못한 처지였던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 했던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상흔처럼 남게 되었다. 도대체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게 뭐란 말인가. 전쟁을 겪었던 수없이 많은 어긋나 버렸던 삶들이,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던 수많은 전쟁 포로들의 삶이 무겁게 내린다. 도리고 에번스의 삶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