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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은 어쩌면 가장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오만한 거짓말쟁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내뱉고 만들어내는 거짓말과 망상은, 그 거짓말을 하는 자신조차도 완벽하게 믿고 망상과 현실을 태연히 오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기 시작한 초반부터 거의 중반까지 게르만의 오만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자신감에 이끌러 그가 풀어내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완벽하게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경이로운 능력을 가진 자신이 겪고 있는 불평등한 환경을 이야기한다. 무능하고 열등하고 조잡한 세계관을 지닌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오직 너그러운 자신의 성품으로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고 그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스스로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게르만의 이야기가 복잡하고 언어적 유희가 극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책에, 문장에 집중하게 된다. 소설 속 화자인 게르만이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이야기 속에 뭔가 삐걱대고 있음을 작가는 계속해서 경계하라고 알려준다. 러시아 문학계의 대가들의 작품 속 글을 통해서, 인물들을 통해서 게르만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오만함과 경솔함으로 그들을 비하하고 조롱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들만을 취하고 있음을 전해준다. 결코 친절하게 전해주고 있다고는 말 못하겠다. 역자의 주를 통해서, 어디선가 읽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설명한 글을 통해서 거의 재구성을 해가며 이해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었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며 자신이 최고의 예술적 재능을 지녔지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르만의 끈질긴 이야기에 자신을 분신을 만나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그의 모습에서, 마지막 장까지 자신의 구축한 환상 속에 머물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한 치의 후회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서 경악하게 되고 그를 다시 보게 된다. 더구나 게르만은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분신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펠릭스와의 '닮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언급하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분노를 느끼며 더한 충격과 절망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어이가 없는 장면인 이 장면에서 게르만의 비뚤어진 정신세계를 엿본 것 같아서 서늘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게르만은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 철저하게 빠져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천재성을 알리기 위한 명목으로 살인 사건을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자신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독자들을 향해 경멸의 미소를 짓는다.
어느 부분에 이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게르만은 초라하고 평범한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하면서 천재적 범죄라고 믿는 살인사건을 저지르지만 단순하리만큼 평범했던 사소한 부분을 눈치 챌 수 없었던 무능함과 분신 살인 사건이 결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에 지독한 '절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게르만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독자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인생에서 천재적 예술적 재능 또는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수 많은 다양한 변종의 게르만의 모습에서 얼핏 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에 그 모습에서 또 다른 '절망'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혼란스러웠고 머릿속이 와글와글했다. 그런데 또 그러면서도 뭔지 모를 즐거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길지 않은 분량을 읽고도 녹초가 되었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번 한 번 읽은 것으로 '절망'을 다 이해했다고 볼 수도 없고 작가가 수 많은 문장 속에 숨겨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지만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 읽기를 시작했다는 점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다른 저서들도 다 읽어보고 '절망'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때쯤이면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들을 이해하고 더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