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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소리가 없는 공간은 나에게 일종의 불편함을 준다. 소리에 익숙해있고 소음에 길들여져 있어서인지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티비나 오디오를 켜서 정적을 사라지게 해야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인지 티비를 보지 않더라도 소리가 공간을 채워줘야 다른 일을 해도 안심이 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을 말해줘'는 소리와 정적으로 작은 파문을 준다.
소리가 없이 몸짓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해서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에 슌페이와 교코가 나누는 사랑의 언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들의 조용한 몸짓의 언어와 필담으로 이루어지는 한 없이 정적이 흐르는 공간은 미지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들에게 소리로 내뿜어지는 언어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그들이 나누는 침묵의 힘은 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 속에 하루하루의 삶을 사는 슌페이는 방송국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소리의 홍수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처음에 자신과 너무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교코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차츰 사랑을 하게 된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주인공 교코는 슌페이를 사랑하게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자 하지만 그들에게는 현실에서 쉽게 넘을 수 없는 소리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고 필담을 나누던 그들은 점차 지쳐가게 된다. 소리로 쉽게 쏟아내던 감정들은 소리의 언어에서 문장으로 걸려지는 과정에서 정작 전해야 할 감정의 말들은 삭제되고 걸려 지고 걸려 진 몇 단어만 남게 되면서 슌페이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마침 바미안 대불 폭파 사건으로 급박하게 해외 출장을 떠나게 되면서 슌페이는 교코의 소리없는 공간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얼마 후 출장에서 돌아온 슌페이는 교코가 자신의 삶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 대해서 무지했고 관심이 부족했었는지,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는지를 알게 된다. 자신에게 항상 소리 없는 공간으로, 쉴 곳으로 남겨 있을 것이라 믿었던 교코의 부재는 슌페이게 교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사랑을 말해줘'는 그리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소리의 홍수 속에 살던 나에게 정적의 공간을 상상해보게 해주었다. 소리 없는 티비에서 영화를 보던 교코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주었고 뒤에서 그녀를 쳐다보며 많은 소리 없는 감정의 혼돈을 느껴야 했던 슌페이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너무나 익숙해 소음인 줄도 잘 모르고 지나쳤던 그 많은 소리들이 때론 하나의 폭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 소리없는 공간이 한 없이 평화로운 공간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난 여전히 정적을 쉽게 참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소리가 제외된 공간에서도 교코와 슌페이가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떠올려보고 싶다. '악인'에 이어 읽은 '사랑을 말해줘'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다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