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강가에서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굽이쳐 흐르는 강가에는 언제나 그네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유년의 기억은 그 곳에 묻혀버린 채 시간이 흐른다.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 일기장을 준비하지만 소녀의 동경과 뜨거운 여름은 늘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있는 강가로 소녀를 이끈다. 그리고 이제는 잊혀진, 세월 속에 감추어져 있던 유년의 기억이 황혼에 물든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온다 리쿠는 이 작품에서 경쟁과 보완, 질투와 동경 등 친구나 동성의 선배를 향해 다양한 빛깔의 감정을 발산하는 여학생들의 감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초여름 날, 마리코는 연극제에 쓰일 무대배경 그림 작업을 함께 하자는 가스미 선배의 초대로 한껏 들뜬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가스미와 요시노는 마리코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약속한 날이 되어 세 소녀가 가스미의 집에 모이고, 힘든 일을 돕겠다며 가스미의 사촌 쓰키히코와 친구인 아키오미가 오면서 각 인물들 간에 미묘한 감정의 대립이 시작된다. 

  강물은 말없이 잔잔하게,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듯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물살이 강하거나 소용돌이치는 물 위에 뜬 것들을 빨아들이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순간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만 같은 기억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억의 부재. 각색. 덧칠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 해도 영원히 잊어버리고 묻어 두고 싶은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한 사람의 인생을 그 자리에 영원히 묶어두기도 한다. 무엇보다 억지로 묻어 두었던, 떠올리고 싶지 않던 기억을 들추어내는 일은 현재의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기억에 남는 모습이나 인상이 다르듯 어떤 일에 대한 관점이나 기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선착장이 있는 집'에 모인 다섯 사람은 십여 년 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통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빛바랜 유년의 편린들을 떠올리지만 그들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과연 진실일까? 연극부원이 연습중인 대사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진실이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형태로 보고 그것을 믿는다.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만을...

  소녀, 소년들은 합숙의 목적인 무대배경 그림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더위를 피해 요령을 피우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마음속으로나마 선망의 대상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리코는 쓰키히코-사촌이라고는 해도-의 출현이 반갑지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가스미와 가까워지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있는 쓰키히코는 여전히 마리코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아키오미는 상처받은 마리코의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마리코에게 자신과 가스미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묘한 말을 한 요시노는 조금은 방관자적인 위치에서 이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하얀 그네는 여전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이 작품은 각 장의 화자가 다르다. 1장 <개망초>는 마리코, 2장 <켄타우로스>는 요시노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3장 <사라반드>에서는 마리코에게 가스미의 초대를 거절하라고 경고했던 친구 마오코가 화자가 되어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4장<자장가>는 가스미의 독백으로 마무리 된다.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특정한 장르로 규정하기가 모호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의 유년의 기억 속에 묻혀 일들이 베일을 벗으면서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소년, 소녀기의 관문을 넘어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의 감성과 혼란, 갈등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온다 리쿠의 작품이 아직 몇 편밖에 소개되지 않은 상태지만 일본에서 백 편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밤의 피크닉> 등의 작품으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온다 리쿠의 작품들의 매력을 좀 더 많이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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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0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월은 붉은 구렁을 후속작이 안나와서 속상해요 ㅡㅡ;;;

아영엄마 2006-09-0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근간~~ 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 같은디...^^;;
님의 파워로 출판사를 콕콕 찔러보시어요~~

2006-09-04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6-09-0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다리쿠 밤의 피크닉 읽고나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들었어요.
이제보니 그것도 아직 리뷰 안썼군요. 허기는 언제는 리뷰 썼습니까만은...;;

아영엄마 2006-09-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자꾸 늘어나서 몸이 달고 있습니다. ^^;
반딧불님/저도 리뷰 안 쓰고 넘어가는 책들이 늘어가는 듯 합니다. 밤의 피크닉도 읽어봐야 헐틴디..

2006-09-05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9-0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한번도 접해보지 않은 일본 작가인데, 솔깃, 합니다. 유년의 기억이라니, 순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생각했어요. 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은 마들렌을, 저는 빠다 코코낫(꼭 이 발음이어야만 합니다!)을 먹으며 유년을 기억한다는 것. 후훗.

아영엄마 2006-09-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일단 기대는 접어두시고-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도 있고 해서..^^;- 다음에 책 읽으시고 느낌을 발산해보시어요. ^^
쥬드님/저도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솔깃'해지는 글솜씨를 보여주는 작가네요.(이미 일본에서는 팬들이 많다죠) 아웅, 빠다 코코낫 먹고 싶네요. 저도 어릴 때 그 과자 좋아했거든요(원래 과자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뽀빠이, 새우깡이랑 빠다 코코낫 정도만 먹은 편임.^^)

marie 2007-09-2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데요.. 왜 엄마가 혼자 걍 자살하면 될 것을(혼자 그냥 손목을 긋던지 ㅠㅠ.. 모 어떤 식으로든지..) 어린 딸에게 본인의 자살을 거들도록 했을까요? 너무 잔인한 방법 아닌가요? 딸의 장래를 생각해도 그렇고.. 너무 어리고 약한 딸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있는 엄마같진 않던데.. 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책은 아주 재밌게 읽었는데, 엄마의 자살 방법이 이해가 안 돼여.. 님들의 의견 듣고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