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장처럼 구수하고 갓 잡은 생선처럼 싱싱한 고향 이야기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0월

 몇 년 전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서 훗날 오붓하게 둘이서 여행을 떠나게 되면 그 책에 언급된 곳들을 두루 돌아보자고 남편과 약속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윤구병님이 이 책에 쓰신 머리말을 보면서 아차 싶어진다. 풍광 좋은 곳이라 소문이 나면 어느 사이에 생겨나는 별장이나 휴양시설이 어느 사이에 그 곳에도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앞서 언급한 책의 어디쯤에 저자인 박형진씨의 고향인 모항 이야기가 나오나 찾아보니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2권, 미완의 여로(상)편에 모항 어촌풍경을 담은 사진도 한 장 실려 있으며, '정농회원 박형진'의 모습과 "사랑"이라는 그의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이 사람, 시인이구나...한 철 한 철 바쁘게 보내는 농사꾼이자 청국장 같이 구수하면서도 입말-전라도 사투리-이 살아 있는 글을 써내려가는 시인, 박형진...

 그가 기억을 들추어 들려주는 추억이나 한 동리 사는 아지매, 아재 이야기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났고, 먹을 것이 궁하던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사시사철 떨어지는 일 없이 먹을거리가 참 많기도 하였구나 싶어진다. 흔할 때는 흔한 대로 양껏 먹고, 귀할 때는 귀한 때로 한 입 한 입 아껴먹는 그 맛이 어찌 그리 좋아 보이는지...  "추석이 낼 모레"라는 시를 읽고 있자니 명절 때 큰 집에 가면 한 켠에 잔가지며, 장작개비, 지푸라기 등을 쌓아 놓은 정지(부엌)에 들어가 부뚜막의 커다란 무쇠 솥에서 무럭무럭 올라오는 김과 군불을 때느라 생긴 매캐한 연기 속을 재미삼아 돌아다녀 보고 손이 시려 아궁이에 불을 쬐고 그 속에 감자를 구워 먹는다고 묻었다가 새까맣게 태웠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다.

 먹거리 이야기를 할 때는 꼴딱 꼴딱 침 넘어가들 구수하였다가도 쿡쿡 눌러 이 잡는 이야기며, 잡은 쥐 희롱하는 이야기에서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다 침이 바싹 말라버리기도 하였다. 그런 것들이 내 기억 속에 전혀 없는 것들이 아니라 직접 겪거나 본 적이 있는 터라 더욱 생생한 탓이다. 그리고 음식 이야기가 나올 때면 아무래도 여인네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기 마련인데 특히 어머니들께서는 매끼 밥을 하고 참을 준비하는 것 말고도 때 되면 콩을 쑤어 메주를 띄우고, 두부를 만들고, 장을 담그고, 김장을 하고, 엿을 고고, 오꼬시며 강정을 만들고, 옷을 짓는 등 철철이 하시던 일들이 어찌 그리 많으셨는지... 더구나 명절을 앞에 두고서는 할 일이 더 많아졌으니, 게으른 부엌살림을 하는 나로서는 그 많은 일들을 어찌 매 년 하고 사셨는지 존경스럽기만 하다. 

 저자는 집안의 어른이신 아버지와 형제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는데, 통으로 된 나무의 속을 긁어내어 만든 것도 아니고 나무 조각을 이어 만든 것이 어찌 물이 새지 않나, 내가 늘 신기하게 여기는 나무통을 만들어 내셨던 그의 아버지는 참으로 손재주가 좋으셨던 분이다.  "이 양반 없으면 맘 놓고 죽지도 못해"라는 소제목처럼 그 분이 동네에 안계시면 죽는 사람이 마음 편하게 가실 길을 가지 못하였다 하니 집안에서 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큰 어른이셨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한 살림살이였던 시절이라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십시일반으로 부조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풍물 소리에 맞춰 굿을 하고 줄다리기를 하며 동리 사람들이 모두 흥을 즐기던 풍속이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쉽게 여겨진다.
 
 박형진씨는 "추석과 가을이 어릴 적 고구마 찌던 냄새로 시작된다" 하였는데 우리 집 구석방 한 켠에도 고구마가 두 박스나 들어 앉아 있다. 올해 시어른들께서 밭 한 뙈기를 얻어 고구마농사를 지어 얻은 소출을 밥 먹기를 싫어하는 나와 아이들을 위해 보내주신 것이다. 아이들이 고구마를 좋아하여 밥을 할 때도 넣어 찌기도 하고, 그냥 물에 삶기도 하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서 익혀 먹기도 한다. 곁들어 먹으면 시원하기 그지없을 동치미는 없지만 그 고구마는 어머님께서 담아 보내 주신 김장 김치와 함께 올 겨울 내내 우리가족의 군입을 책임져 줄 소중한 먹거리이다. 마지막으로 모항이 바닷가인지라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는데 이 또한 나에게 고향 생각(포항)을 자아내게 한다. 눈 감고 싱싱한 회 한 점을 벌건 초장에 찍어먹는 생각을 하여보니 매콤새콤한 초장맛과 생선살 씹히는 감촉이 떠올라 연신 군침만 삼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