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즈음이면 나는 봄이 몹시 그립다. 겨울이 지겹다. 추워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면서도 겨울이 깊을대로 깊어 봄으로 넘어가려는 이 시점은 묘한 울렁거림으로 마음이 달뜨는 계절이기도 하다. 새 봄을 맞는 설레임과 불안함에 흥분된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못하여 밤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버릇이 생긴 게 십 여년은 된 것 같다. 며칠 전 그때 듣던 음악이 생각나 빗장 잠근 문집을 열어보니 꼭 이맘때 쓴 일기같은 것이 보였다. 9년 전. 도시로 돌아오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 어렸을 적에 우리는 읍 소재지 시골로 들어가 한 2년을 살았더랬다. 2년간의 시골살이를 접으며 마지막으로 쓴 글인가 보다. 그 후론 짐 싸고 이사하느라 그랬는지 흔적이 없다.

 

  음악에 대해 덧붙이자면,

  이 날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들었다고 해서 올리지만 실제로 이 시기엔 바흐 음악에 매료되었었다. 지금이야 가뇽같은 뉴에이지는 아예 듣지 않고 음악도 잊고 살지만 그때는 깨어있는 대부분 시간은 위대한 바흐의 바다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아했던 곡은 다음에 올리기로 하며.20120202ㅁㅂㅊㅁ.

 

 


저는 지금 조용한 오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할일이야 찾아서 한다면 얼마든지 있겠지만 오늘은 그냥 이대로 쉬고 싶습니다. 아침내내 치운 흔적이 보이는 깨끗이 정돈된 집 안. 내 손때로 반질반질한 가재도구들이 올망졸망 정겹게 어깨를 기대고 섰습니다. 묵직한 겨울 커텐 사이로 다소 누그러진 햇빛이 살림살이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습니다. 방안에 불을 켜지 않으니 낮이지만 책방에는 적당한 어둠이 깃들어 표정이 풍부해집니다. 역광으로 드러나는 커텐의 실루엣이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차 맛을 아는 친구가 오면 함께 마시던 쟈스민 차가 문득 생각나 혼자지만 물을 끓이며 다기를 꺼냅니다. 좋아하는 음악씨디를 찾아 꽂습니다. 조용한 날들.... 머지않아 조용했던 이 날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겠지요. 서너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에 차향이 남실거리고 가뇽의 감미로움이 빼곡히 들어앉습니다. 내 몸을 익숙하게 받아 안아주는 푹신한 의자에 온 몸을 푹 파묻고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아도 햇살 비껴드는 창문 갈색 커텐 너머에는 봄이면 보라색 제비꽃이 자잘하게 피어나는 흙마당과 그 옆으로는 상추며 파, 얼가리배추, 깻잎, 풋고추를 서툰 솜씨로 키워내던 한 뼘 텃밭이 보일 듯 합니다. 그 너머에는 도서관이 있고, 은갈치처럼 반짝이는 교회 종탑이 우뚝 서있고 골목 따라 나가면 이름만으로도 애틋한 우체국이 있고.... 우체국,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싯구절을 읊조리며 지나 다니던 우체국, 편지를 쓰는 대신 '뚜 뚜 뚜...'안타까운 신호음만 듣고 내려놓곤 하던 공중 전화기가 우체국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언제쯤이면 나도 시인의 그 마음이 될까, 20년의 세월을 두고 곰삭힌 영도와 청마의 사랑을 짐작해보기도 했지요. 요즘은 우체국 문 앞에 무슨 화분이 나와 있는지 한참을 못 본 것 같군요. 여름이면 사루비아가, 가을이면 소국이 소담스럽게 피었었는데.....

 

훌쩍 뛰어 넘어 마을을 돌아 나가면 논둑 밭둑이 고불거리며 나있고 실개천이 돌돌돌 흘러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쯤 얼음이 얼다 녹다를 반복하며 겨울을 나고 있을테지요. 초겨울녘까지 발목이 시도록 걷던 산책길, 유연하게 구부러진 길모퉁이와 길 가의 잡풀과 돌멩이들 하나하나가 다 외워지는 풍경입니다. 먼지를 덮어쓴 길가 미루나무가 목 빼고 발걸음이 뜸한 나를 기다릴런지요. 이제 익숙했던 이 모든 것들과 작별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조용하며 온유한 이 작은 시골 마을을 저는 눈 감고 마음 속에 찬찬히 새깁니다. 이 마을에서 보냈던 평온했던 지난 날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려는 조용한 날입니다.2003년 2월.고령살이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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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2-02-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공님이 시킨대로 해서 음악을 올렸다 >O<
그런데 이거 글 수정이 잘 안 된다~노트북을 팰 수도 없고...
오타 혹은 어색한 부분이 있어도 그냥 봐주세요^^
(그나저나 음악 제대로 실행됩니까?)

icaru 2012-02-0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는 것 같아요 ㅎ
인생의 어느 한 시기 읍단위의 지방 마을로 들어가 산다거나, 어느 한 시기에만 위대한 바흐의 음악 푹 빠져 지내는 일 ^^
안드레가뇽도 아주 고즈넉하고요~
저는 왜 안드레가뇽 들으면, 심은하부터 생각날까요?
근데, 그 답을 알아요~ ㅎ 이 곡도 있는 안드레가뇽의 앨범 (짙은 회색 자켓이었던 것 같은데, )을 배경음악으로 심은하가 화장품 광고를 했었더랬어요~ 와 십수년도 더 전 얘기네요

진주 2012-02-02 23:24   좋아요 0 | URL
엇..제가 가진 것도 회색인데 monologue앨범이예요.
그럼 심양의 광고 배경음악으로도 깔렸겠네요?
언뜻,심양의 화장품 광고에 엔야의 노래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우리 이까루님은 기억력도 좋으셔라!

차트랑 2012-02-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틀 후면 입춘입니다.
드디어 봄이 왔다는 것인데요...
우리들에게 봄인 것 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무슨 봄??
하시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추위에 봄을 느끼기에는 자연과 좀
멀리 살아왔다고나 할가요...

그러나 자연은 봄을 데려왔습니다.
주변의 나무들을 보면 그 태가 벌써 다릅니다.
지난 가을부터 움추리고 동작을 정시시켰던 때 와는
다른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곧 싹을 튀울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입춘입니다.

아,
그 봄이 없었던 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무슨 희망으로 이 추운 겨울을 견뎠을까요..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불안해 했을까..
봄은 꼭 온다고 생각하며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을까...

음악 고맙습니다~

진주 2012-02-02 23:27   좋아요 0 | URL
추위를 엄청스럽게 타는 저는 벌써부터 입춘을 찾아 동그라미 쳐놨지요^^
입춘이 코앞인걸 알면 덜 춥게 느껴지거든요^^
우리집 천리향도 꽃눈이 통통해지고 발그스럼해졌네요.
55년만의 한파에도 봄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나봐요~

숲노래 2012-02-0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랑 이태 동안 시골에서 지내셨군요. 더 지내셨어도 좋았을 텐데,
다음에 또 가실 수 있겠지요~~

진주 2012-02-03 17:21   좋아요 0 | URL
네, 우리는 더 있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지요.
도시로 쫒겨 나온 셈..^^
나중에 애들이 독립하고 나면 우리 부부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벼루고 있어요.
물 좋은 산청과 따스한 남해섬을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