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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SE (2disc) - 할인행사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헨리 폰다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서부, 무언가 질서가 잡히지 않아 혼란스럽지만 자유로울 것 같은 땅.
젊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인생을 바꿀 기회가 주어질 것 같은 그곳.
이러한 서부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는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서부의 공간은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곳이다.
곳곳에 인디언이 동부로부터 밀려나 거주하고 있었기에 충돌이 많았고
캘리포니아 가기 중간에는 거대한 사막과 협곡이 존재하기에 경제성도 떨어졌다.
그런 서부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막연한 꿈이 있었다. 젊은 개척자를 흡수하는.
오늘은 하인으로 작은 월급을 받고 가정부로 박하게 살더라도 어느날
총 한 자루 삽 하나 들고 서부로 가서 하나씩 자기 땅을 개척한다면 어엿한 시민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국경이 열려 있었기에 미국이라는 사회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성립되기 어려웠다고 한다.
정부가 없는 땅은 어떻게 운영될까? 각자가 자신을 지켜야 한다.
황비홍의 메시지가 남자당자강이라고 해서 자신과 가족, 주변을 지키라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모든 질서는 총으로 유지된다. 모택동이 이야기했듯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그런 총에 법조문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이러한 체제의 문제는 약육강식이다.
영화가 막 시작되자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단서도 남기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보안관으로 대표된다. 그런데 이 보안관이 영화 내내 해결해내는 문제는
단 하나도 없다. 잘못된 단서를 쫓아 애매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잘해야 조작된 경매 주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체제는 영원한 것일까? 아니다 서부의 경계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어가는 거대한 힘이 있다.
바로 철도다. 쇠로 만들어진 길을 달리는 쇠로 만든 차 바로 이것이 철도다.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가지고 힘껏 수많은 사람과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그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따라 들어오고 이에 맞추어 새로운 질서가 수립된다.
전신에 의해 정보가 교환되고 법이 강제되고 화폐가 밀고 들어온다.
이 변화를 강제하는 힘은 멀리 영국에서 투자한 막대한 자본이었다.
신대륙에 건설되는 온갖 인프라 사업이 대박이 될 것이라고 꿈에 부풀었던 자본을 끌어다가
미국의 철도 자본가들은 무지막지한 개발 드라이브를 건다.
그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철도를 싸게 놓기 위해 무수히 많은 노동력을 끌어모은다.
영화 말미에 보면 나오는 머리 길게 딴 중국인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여기저기 땡볕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참 이 모습은 결코 미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철도도 중국의 철도도 모두 거의 비슷한 목적과 방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철도에서 일하던 노동자, 철도를 반대하다가 목숨 잃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대로 한반도의 근대와
overlapping 된다.
노동하는 이들은 모두 자본의 세계, 즉 일정한 대가를 받고 자신의 노동을 팔고, 화폐로 시장에서
구매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일원이다. 물론 법의 지배를 받고 기업의 통제를 따른다.
반면 서부의 인간들은 자유인이다. 스스로 지켜야 하고 자급자족이 큰 원칙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하나의 갈등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의 남편, 처음 죽어야 했던 일가족의 가장은
하나의 꿈을 갖고 있었다. 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역을 만들어 대박을 내보자는.
일종의 알박기라고 할 수 있는 이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자본의 냉정한 논리는
이를 그냥 두지 않는다. 싸게 먹고자 이들을 밀어버리려고 총잡이를 고용해 사살한 것이다.
자본주의 초창기 역사는 이런 식의 피바람을 많이 일으켰다.
록펠러, 카네기, 밴더빌트 등 수많은 자본가들은 독점을 만들기 위해 무수한 폭력을 행사했다.
영화는 서부의 한 시대를 보여주지만 크게 보면 질서와 무질서, 자유와 강제의 대비를 나타낸다.
몸이 불구가 되어가도 기차를 타고 태평양을 보겠다는 자본가는 화려한 객실에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지만 그 속은 시커멓다.
그 흐름이 옳든 그렇지 않든 변화는 만들어진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그 변화속에서 다시 새로운 꿈이 만들어진다.
뉴올리언즈에서 몸을 팔던 매춘부 아가씨도 따뜻한 물에 자신을 씻어내는 이른바 갱생을 한뒤
이곳에서 어엿한 안주인 행세를 한다. 역을 만들고자 했던 남편의 꿈은 결국은 이루어진다.
그 혜택을 누가 입던 가는 다른 문제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각각의 이해를 추구했고 중간의 많은 마찰은 있었지만
철도는 계속 서부로 움직여간다.
영화 마지막은 이들 남을 사람들이 하나로 모여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의 노력을 치하하며 질서의 수립을 통해 이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반면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총을 의지해 살던 사람들은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다.
한 때 자본가의 앞잡이가 되서 악행을 대신하면서 질서에 편입을 하려고 했던 프랭크도 결국
적응하지 못한다. 부하들에 배신을 당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래도 뭔가 미흡한 것이 남는다.
하모니카는 왜 부하들의 배신을 미리 알려주었을까? 원수이면서도.
아마 하모니카는 프랭크에게 무언가 서로 비슷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공감을 했던 것 같다.
자유인으로 살다보면 서로 서로 비슷해지고 익숙한 것이 좋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쨌든 태평양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이 열차를 따라 서부는 좁아져간다.
자유인의 활동 공간 또한 점점 좁아져간다. 늑대와 춤이 인디언이 줄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듯이
이제 총잽이도 설땅이 별로 없다.
잔잔하다 못해 애잔하기까지 한 음악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삶과 자본, 질서, 서부와 같은 여러
단어들로 만들어진 감상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