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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 - 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박철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인간 박철언은 말 그대로 6공의 황태자였다.
전두환,노태우 두 최고 권력자의 지근 거리에서 권력이 움직이는 생생한 현장을 보았고
밀접히 참여했다. 서울 법대 졸업 수석이라는 수재로서의 머리로
현직 검사로 청와대,안기부라는 권력기관을 오가면서 여러가지 일을 했다.
좁게는 권력자에게 법치를 강조하기 위한 법률비서관 역할에서
넓게는 남과 북의 대화 채널을 물려받아 밀사로 왔다갔다 했고
나아가 한국정치의 판을 바꾸는 정계개편에 나서기도 했다.
시종의 눈에는 영웅이 없다는 헤겔의 말을 떠올리고
한무제를 냉정하게 평가한 사마천의 역사기술을 상기해보면
원래 권력자의 시종은 절대로 권력자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권력자(전,노,YS,DJ)에 대한 묘사를 쭉 보면
권위와 욕심은 많지만 결함 또한 많은 인간의 모습들이다.
자기 과장의 전두환, 소심하고 겉으로 하는 말과 머리의 생각이 다른 인색한 노태우,
머리가 비고 말이 바뀌는 YS, 큰 뜻을 품었다고 하지만 막상 그 말을 지키려는 의지는 약한 DJ
등 담담하게 권력자를 묘사한다.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아도 내가 직접 가까이서 보지 않았다면
매번 만남의 순간 하나 하나를 메모하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이렇게 묘사하는 저자의
주장을 쉽게 부정하기는 어렵다.
최고 권력자도 이 정도 수준으로 본다면 하물려 장관이나 의원 수준은 또 어떨까?
후배로 졸졸 따라다니다가 의원자리 하나 꿰찬 것을 기반으로 최근에 TK 맹주에 오른
강재섭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이 책으로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를 노태우의 꼬봉으로만 보기에는 분명 다른 면이 있었다.
남북대화와 북방외교의 시대를 열어 나간 것은 한국사회에서 매우 큰일이다.
전두환 시절 중국과의 교류재개는 당시 공급과잉이던 한국의 중화학 공업에
커다란 숨통을 트이게 했다.
소련과의 무리한 외교도 후유증을 남겼지만 한반도 안정에 기여한 면도 적지 않다.
3당 합당을 YS가 아니라 DJ와 추진하려던 것이 동서화합이 목적이었다는 점도
멀리 미래를 본 것이다.
후일 DJT 연합을 통해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게 기여했지만 흡족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덕분에 이제 옛날 후배들이 성큼 올라서서 자기 시대를 만났다고 활개치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한때 손에 잡았던 권력의 마력에서 벗어나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다.
책 중에는 5공 시대를 열었던 허화평이 힘을 잃고 찾아와
일할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을 씁쓸하게 느끼면서도 돌려보냈다고 하던데
저자의 지금 처지도 유사한 면이 많다.
YS에 의해 억울하게 증인도 없는 재판으로 감방에 간 것을 비롯하여
그의 행보에는 그가 쌓은 경륜을 제대로 발휘 못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한데 남북간의 특사역할은 지금도 쉽지 않은 것 같다.
교류가 없었던 YS 시절을 제외하고 DJ 시절의 박지원,임동원이 계속 감방을 오가야 하는 것이나
당당히 남측 실무대표였다는 저자의 후일 모습에서도 그렇게 느껴진다.
86년인가 당시 남과 북은 여러차례 아시안게임,올림픽 나아가 월드컵까지 공동개최를
논의했다고 한다. 만약 북한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남과 북을 오갈 수 있었다면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의 범주에 북한을 쉽게 넣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TV를 통해 전세계에 퍼져나간 북한 아가씨의 미소 위에 악당의 이미지를 포개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벌였던 여러 협상이 꽤 멀리 내다본 훌륭한 아이디어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단시간 승진에 따른 주변의 질시는 여전히 그가 한국현대사에서 했던 역할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정치인들이 솔직하게 자신의 일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관행이 그나마
이 책을 통해 바뀌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다.
안기부장이 경호실장의 중요한 부분을 툭 치고 나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편하지 않을 내용까지 세세히 보여준 그의 묘사는
권력이란 실제로 이렇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