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히피드림~ > [퍼온글] 포장지

 

새삼 포장지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1. 1933년 일본 나라(奈良)시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창고에서 작업 중이던 일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신라에서 제작된 13매의 경질(經帙; 경전을 담는 곽) 가운데 화엄경론(華嚴經論)을 두겹으로 싸고 있던 파손된 포장지의 내부에서 해서체로 기록된 2장 분량의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신라 장적(민정문서)이다. 신라의 경제 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라 시험에도 잘 나온다. 이 포장지가 아니었더라면 그나마 우리 역사의 빈 공간이 무척 컸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 밖에 딱히 구체적인 경제 생활을 알 수 있는 문서가 없어 다양한 해석이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종이를 재활용하다 보니 곽에 덧붙여진 건데 경전보다 포장지가 더 유명해진 사례다. 일본에서는 당시 촬영을 해 두고 다시 원래대로 붙여 놓아 지금은 볼 수 없다. 그리고 값진 보물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다이지(이 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의 쇼소인은 일년에 한번만 개방한단다. 10월 달이라 하는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는 잘 모르겠다. 이걸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2. 서구 사회는 산업혁명이 성공하면서 그 물질적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각종 박람회가 열렸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물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때 동방의 도자기가 무척 인기가 있었다. 중국의 도자기를 비롯한 중국의 물건을 모으는 취미의 ‘시노와즈리’가 유럽을 강타하지 않았던가. 중국의 도자기 못지않게 일본의 도자기도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도자기가 건너갈 때 맨몸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로 포장을 해야 하는데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에 유행했던 소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판화작품이 포장지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도자기도 좋아했지만 다양하고 강렬한 색채를 뿜어내는 일본의 판화 작품에 빨려 들었다. 여기서도 포장지가 본체보다 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시노와즈리’와 함께 ‘자포니즘’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너도나도 우키요에를 따라하기에 바빴고 그들의 그림에서 일본의 영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고흐의 <탕귀영감의 초상 1,2>이다. 영감님 뒤로 우키요에게 촤악 깔려 있다.

 

고흐의 <자화상>이다. 역시 배경으로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다.

 


안도 히로시게는 도쿄 100경이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고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오하시와 아타케의 천둥>이라는 작품을


고흐는 <비오는 다리>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그려 놓았다.

 


안도 히로시케의 또다른 작품 <후카가와 스사카와의 십만평>(이거 역시 에도 백경에 들어가는 작품)이라는 작품을


고흐는 <꽃피는 자두나무>란 이름으로 그렸다.

고흐만이 일본의 작품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휘슬러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


휘슬러 <어린 백인 소녀>

 


마네 <에밀졸라의 초상>

 


모네 <일본 여인>


티소 <해먹>


티소 <젊은 여인들>

 


안도 히로시게의 작품이다. 누가 첫 눈에 이것을 보고 판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에 갔을 때 에도도쿄박물관에서 우키요에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 놀라웠다. 19세기 후반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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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09-0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루 퍼오셨군여, ^^ 그림들이 다 좋죠?

사마천 2005-09-0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를 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림 하나 보면서 생각 하나 더해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