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몰락을 보았습니다.
20세기 최대 권력의 하나 였던 히틀러가 무너지는 직전과 직후를 다룬 영화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때문에 벙커에 갖혀 있게 되었지만 이제는 아예 지상에서
소련군이 쏘는 포탄까지 사방을 때리게 됩니다.
아 이제 모든게 무너지는게 아닌가 하고 히틀러 주변의 장군들은 생각하지만 여전히
히틀러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디 선가 막강한 군대가 일어나 적의 배후를 물리칠 것처럼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때로는 새로 개발된 독일의 제트 전투기 - 실제 속도면에서 놀라운
효과가 있었지만 불량률이 높아 많은 전투조종사의 목숨을 잃게 했죠 - 수백기가 날라와
적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런 히틀러에게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베를린 바로 앞의 강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발 물러서 지키면 훨씬 수월할 것을 끝까지 자리를 고수하라고만 외치는
지도부에게 답답함을 느낍니다. 오늘 사형시키라고 명령내린 장군을 직접 만나보고는
거꾸로 방위군 사령관으로 다시 임명합니다.
어떤 명령은 이렇게 지켜지기도 하고 어떤 명령은 아예 무시되기도 합니다.
벙커는 방향을 잡지 못해 혼란 스럽지만 바깥은 더욱 참담하죠.
나이 어린 소년이 탱크 잡는 바주카포 비슷한 무기를 들고 무려 두대의 적 탱크를 잡아내었더군요.
덕분에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는 자신이 1차 대전 때 받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타이거 탱크의 굉음을 기억하건데
그 임무를 수행하는 소년의 가슴은 아마 그 훈장 보다 훨씬 단단했을 것입니다. 단지 14-5세 되는
소년이 그렇게 전장에 나갔죠.
반면 이렇게 된 현실을 보는 기존 군 지도부의 심리는 착찹합니다. 마지막 총알이 떨어져도
병사들이 항복해서는 안되냐고 간곡히 묻는 장군들에게 히틀러는 노우라고 답합니다.
거꾸로 꼭 히틀러가 답을 해야만 병사들에게 지시할 것인지 장군들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더 싸워보았자 이제 부상병과 시민들만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호소에도 전투는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의 병사들은 자신의 총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허용받았으며 그들의
명예는 지켜졌습니다.
반면 2차 대전의 끝자락에서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의
이념에 경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념이 시키는데로 여러가지 잔혹한 행위들을 했습니다.
유태인 학살, 생체실험 등 여러가지 행위들은 그들 스스로 보아도 범죄로 보여질 것입니다.
덕분에 그들 상당수는 시베리아까지 끌려가게 되었죠.
이른바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엇비슷한 면이
있었죠. 닮았기에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력하기도 한 그런 모습입니다.
1차 대전의 패전, 대공황을 겪으며 실업자가 거리를 메울 때 바이마르의 민주주의 또한 판산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찬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단지 독일인이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존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히틀러는 지지를 긁어모았습니다. 너무 단순하다고요?
성경을 읽어보십시요. 예수가 던진 메시지는 너희가 하나님의 형상을 모방해 창조되었기에
존귀한 존재라는게 주 메시지 아닐까요? 공산주의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든 이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상이었고 모두가 함께 잘 살아보자는 전체주의의 모습이 강했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막바지에 달했고 사람들은 광기에 빠집니다. 히틀러의 마지막에 가장 용감하고 위대한
독일의 어머니라고 칭송받은 괴벨스의 부인이 결국 자신의 자식들에게 죽음 밖에 남겨주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입니다. 바로 이런게 위대함이라면 아마 독일민족 모두는 목숨을 끊어야겠죠.
바로 그게 바그너의 장엄한 음악에서 나오는 영웅의 운명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진리를 체득하였기에 살아남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총탄을 퍼붓는 친위대의 모습 또한 일종의 광기이고 모순입니다.
독일인을 위해 천년왕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자부심어린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가 기껏 이 수준에
머물게 되버렸군요.
그렇다고 히틀러의 유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국민차를 만들어 요즘에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고 그 차가 달릴 도로인 아우토반의 모습은 후일 독일을 점령한
미국의 패튼 장군에게서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습니다. 심지어 독일의 체제에 매혹되버린
패튼의 찬양에 놀란 연합군 수뇌부가 그를 강제로 본국 송환시켜버렸죠.
생체실험에 두려움을 느낀 친위대의 의사에 대해 당신의 업적에 대해 나중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라고
히틀러가 이야기합니다. 실제 최근에도 유태인들은 당시 수용소에서 행해진 실험의 결과물들인
사진들이 지금도 의학 교과서에 다수로 실려있다고 고소장을 내었습니다.
독일 등 국가들의 생명과학이 강한 것 또한 같은 결과입니다.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노동자들을 범죄자로
몰아 수만명을 일거에 학살해버린 파리 코뮌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고 두 번의 전쟁 까지 대립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최초의 보험 등 사회보장을 만들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죠. 비록 반대편을 탄압했지만.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도 뿌리에는 이러한 맥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누히 강조하건데 히틀러는 타이타닉호에 나오는 것과 같은 3개층으로 만들어진 벽을 없애버렸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히틀러는 모호한 대상입니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전두환을 파쇼라고 하죠.
하지만 그런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인 김대중,김영삼,노무현 등에게서도 실제 히틀러에 비해
훨씬 못한 모습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국가를 부도로 몰아가고 또 신자유주의에 모든 것을 내놓으며
부동산 거품을 마구 불어넣어 강남 땅 부자들 배를 불리는 이들이 과연 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자부할
만할까요? 얼마전 청남대를 가보았더니 대대병력이 경비하도록 만들어놓았다더군요.
동포의 가슴에 총칼을 박는 지은 범죄가 두려워 국민들을 피해다닌 전두환 등을 보면 이래 저래
한민족의 새로운 리더쉽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어려서부터 히틀러를 비난 하는 정치인들의 많은 목소리는 들었지만 그를 넘어서는 리더쉽을
보여주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던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영화로 돌아가보자면 분명 반전영화라는 색깔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이를 찬찬히 중립적
시각에서 보고도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화속의 수 많은 죽음들 속에서 정말 의미가 있는 죽음이 몇이나 있었을까요?
총탄을 뚫고 적 한둘을 더 헤치운들 역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이 영화의 대본이 된 책 두권의 시각이 약간 다른데 요아힘 페스트의 책은 읽다보면
이곳저곳에서 그래도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상대방을 더
많이 죽이는 그런 모습들이 나옵니다. 반면 여비서의 말 하나 하나는 대부분 자괴감이 강했죠.
전쟁, 국가의 운명, 이념, 개개인의 선택 등 여러가지 면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