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 천년의 세월 속에서 가치가 퇴색하지 않는 이유는 후세의 사람들이 한번에 소화하지 하는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라고 해도 고전 독서를 시작하면 번에 책의 내용을 결코 5 % 이상 획득하지 한다고 나는 장담할 있다. 평생에 걸쳐 파고든다고 해도 60 % 이상 넘어가기 힘들다.

교수들도 어차피 여러 읽어도 모르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방법 밖에 없다. 전문가라고 해서 그렇게 많이 수는 없다. 대부분 남들의 발걸음이 미처 닿지 않은 같은 조그마한 공간으로 파고들어 이것은 영토이므로 덤비지 말아라 하고 선을 긋고 선언할 뿐이다. 똑똑한 것으로 말하면 둘째 가라 하면 서러워 교수들도 정도인 상황에서 남보다 의욕이 조금 많고 이해력이 조금 뛰어난 사람 하나가 번의 독서로 얻을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나? 높고 험한 산에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도전해 나가는 것은 무모하다는 이상으로 표현할 없다.

산을 먼저 올라가려고 시도했던 사람이 무수히 많다면 내가 하나의 시도를 하기 전에 물어볼 있지 않을까? 고시나 자격,입사 시험을 하나 보려고 하더라도 경험자에게 찾아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수학의 명제에서 정의가 애매한 말로 구성을 한다면 전체적인 효용이 없게 된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조금 쉬운 문장으로 바꾸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정의를 정확히 알고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독자가 지닌 문제들 가운데는 거의가 자신들에게 어려움을 유발시키고 있는 단어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자유인을 위한 책읽기> 191

 

지겨움이란 이와 같이 모르는 단어와 명제가 과도하게 나타나 전체적인 상이 만들어지므로 흥미가 유발되지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읽은 내용을 되돌아 보아 페이지 일정 비율 이상의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면 책은 일단 덮는 것이 좋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다 짧은 칸트의 다른 책을 권하는 경우나 마르크스의 <자본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짧은 책을 권하는 것을 경험이 있다.

가령   역사는 자유의식의 발전과정이다라는 단순한 문장이 있다고 하자 문장을 A + B = C 라는 수학 형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 여기서 A 5 C 8 이라고 알고 있지만 B 도대체 무슨 숫자인지 알지 한다면 어떻게 등식의 성립과 불성립에 대해서 판단할 있겠나? 마찬가지로 역사,자유의식,발전과정 등의 용어가 명확히 들어오지 않는다면 혹은 저자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다면 명제로서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작용이 무의미 것이다. 독서 과정에서 저자가 중심으로 사용하려는 단어들의 개념은 되도록 정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활에 도움이 있는 가지 정도의 지침을 가질 있는데

하나는 신문의 기사를 이해하는데 시사용어사전의 활용이 필요하다.학자나 언론인이나 자신의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해 보통 용어를 낯설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른 하나는 회사생활에서 업무별로 용어집을 구축하여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당히 많은 회의가 겉돌게 되는 이유는 서로 사용하는 용어의 범위와 문맥상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설서와 강좌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줄기의 방향을 잡아주고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내용을 잘게 뽀개어서 쉽게 풀어내며 각종 사례를 든다.

이와 같은 해설가가 고전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 하나의 고전에 해설자가 수도 없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개설서는 무수히 많을 밖에 없고 시대에 맞추어 계속 다시 쓰여진다.

앞서 친구와의 철학논쟁이라는 일화에서 이야기 했듯이 정확한 독서를 하지 한다면 차라리 만화책의 독서가 개인의 이해를 빠르고 풍부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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