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입신하여 유비를 만나서 천하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을 나이가 아직 20 였다. 오랜 기간 동안 그를 보좌하게 되는데 먼저 손권을 설득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겨뤄 이겼고 촉이라는 천하의 귀퉁이를 차지하여 계속 양쪽에서 견제하는 전략을 추진하여 삼국이 마치 솥의 발과 같이 균형을 잡아 서로 견제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유비가 떠난 그의 아들을 보좌하여 여러 위에 대한 전쟁을 일으켜 유업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전장에서 명을 다했다. 삼국간의 대립 당시에도 촉과 대치하던 진의 장수들도 그를 존경하여 휘하의 병사들이 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할 정도 였고 후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끊이지 않는 추앙을 받았다. 문학적인 재주는 후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士表에 드러나 있고 사회 경영에 대한 이해는 맹획을 잡았다가 놓아주는 전설에도 나오듯이 깊이와 폭이 제법 되었다.

 

유비가 쫓기는 신세에서 촉에 안착하는 과정까지 제갈량이 보여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견력은 매우 탁월했다. 당시 유비는 별다른 영토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세력의 수준이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벌였던 촉과 한중의 공략은 후세에 보아도 정확한 방향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그의 안목의 정확함이 많이 확인되었다.

 

다음 리더의 요건 중의 하나가 따르는 사람들이 적절히 자기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라면 제갈량의 업무수행은 높은 점수를 받을 있다. 촉이라는 나라는 유비를 따르던 떠돌이 세력에 의해 다양한 지방 호족들을 정복하거나 연합하면서 세워졌다. 이런 조건에서 후일 까지 불화 없이 정권을 유지할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부의 단합을 유지했다는 증거다. 이를 통해 그의 리더쉽을 상당부분 확인할 있다. 이는 특히 조조의 위가 촉과의 전쟁을 통해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사마의에 의해 무너졌던 것에 비교해볼 보이는 장점이다.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나이 어린 군주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 의지하고 일을 꾸려갔지만 막상 제갈량이 떠나자 궁안에 머무는 군주를 둘러싸고 환관을 중심으로 파당이 생겨서 의사소통을 가로막아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이반되었다. 이래서는 결코 전쟁을 이길 없었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 것은 제갈량이 신하의 분수를 지켰다고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한계를 일찍부터 그었다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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