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시대로 보면 승자였던 조조는 후대에 와서 악인으로 묘사되고 패자였던 유비가 선인으로 평가되는 것은 쉽게 풀리지 않는 의문인 같다. 실제 유비의 가계는 한의 황족으로 보기에 명확하지도 않다. 조조를 비난하는 근거도 신하의 위치에서 군주를 몰아세운 이외에는 그렇게 뚜렷한 것이 없다. 조조는 이들에 비해서 전란에 휩싸인 농민들을 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서는 이미 무너졌던 과거의 체제를 고집하거나 왕가의 혈육을 찾아 자리에 앉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조 자신은 끝까지 신하의 자리에 머무르고 아들의 대에 와서 한으로부터 선양이라는 형식을 취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했다. 피를 것도 아니었고 전대의 황제를 죽음으로 내몬 것도 아니다. 이러한 식의 정권교체는 이어서 계속 발생하는데 때로는 평화적으로 때로는 피를 보면서 중국의 중세기간 내내 계속된다. 유독 조조는 간웅이라는 평을 넘지 못한다.

역사적인 평가를 그리 쉽게 내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정치가로서 둔전법을 실시해 국가체제를 안정시켰고 구품관인법이라는 중앙과 지방의 교류에 관한 법을 만들어 전국의 통합을 추구했다. 정책은 과거의 효시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개인적인 면에서도 문학에 관한 조예는 건안 7 걸에 자식 둘과 함께 포함될 정도로 뛰어 났고 당대의 여러 명사들과 지혜를 논할 있는 재주가 있었다. 전쟁에 있어서 상대방보다 세력의 열세에 놓인 적은 많았지만 항상 빠른 결단과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로 앞서 나갔다. 죽는 순간에도 도굴에 대비하여 자신의 묘에 아무런 보물을 넣지 말라고 하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역사적 존재 위에 덧씌워진 소설의 허구가 하나의 인물을 공정하게 바라보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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