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조, 유비, 손권의 정립

 

3.1 조조의 정치

 

남방원정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조조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는 내부 체제의 정비였다.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조조의 통치권은 과거 원소, 공손찬의 세력권을 모두 통합하고 이제 형주까지 합쳐서 외형면으로 매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치열한 싸움 끝에 점령한 땅들이라 충성도도 높지 않았고 민심 또한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 인구들 상당수는 미망인, 고아들이었고 쓸만한 장정들은 전장터에서 많이 쓰러진 상태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확장을 하려고 싸움을 벌였다가 만에 하나 진다면 제국이 동시에 흔들릴수도 있다. 그래서 우선 시간을 두고 새로 정복한 지역들을 계속 관리해나가는 쪽으로 무게를 두었다.

 

아울러 풀어가야 문제로는 명목상 황제로 모시고 있는 한나라 헌제와의 관계였다. 당시 중앙정부는 한과 위라는 개의 정권이 외형적으로 병립하는 형태가 이루어졌다. 헌제와 한나라의 귀족들 측에서는  신생 무력집단인 조조를 무너뜨리고 한왕조의 위업을 이어가려고 시도했다. 원소와의 싸움 이전에 동승과 유비에게 한번 밀지를 주어서 자신을 몰아내려고 했기에 조조로서는 헌제가 부담스러웠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밀어내기에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주변에 크게 두려워할 적이 없는 마당이라 조조는 급격히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고 정부내에서도 세력을 키워나갔기에 마찰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그동안 기득권을 존중해서 최대한 예우하던 한나라의 귀족들에게 압박이 가해졌다. 공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당대의 명사로 꼽히던 공융은 조조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해서 억울한 죽음을 받아 일족이 멸하게 되었다. 법보다 조조의 사적인 권위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조조를 오랫동안 따르던 세력 내에서도 이탈자가 생겼다. 최염이라고 오랫동안 조조가 친구로 가까이 하던 사람도 이러한 처사에 분개하였다. 조조도 아까웠지만 자기의 분노를 조금도 감추려하지 않는 최염을 살려두지 않았다. 어차피 욕을 먹기로 했다면 많이 먹는 자체를 개의치 않은 것이다. 최종적으로 순욱이나 순유와 같이 조조의 초반기부터 계속 그를 수행했던 신하들까지 조조의 욕심에 등을 돌렸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조조의 정권에서 이들이 공이 많았던 인물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처벌되었던 것은 이상 한에 연연한다면 누구도 같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결국 대목에서 사가들이 조조의 냉혹한 면모를 그려내게 된다. 삼국지연의 또한 여러가지 표현을 통해 권력의 냉정함을 보여준다.

피를 나눈 친아들과도 권력은 나눌 없다고 한다. 또한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없다.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어도 내려올 때는 그냥 밑바닥까지 바로 추락할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권력추구의 냉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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