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적벽대전
조조로서는 앓던 이 하나가 쉽게 빠졌고 세력 또한 형주의 군대를 포함시켜 훨씬 커지게 되었다. 특히 강을 끼고 강동과 맞서왔던 형주의 수군을 끌어안은 것은 상당한 수확이었다. 그래서 다시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다. 형식은 정중하지만 내용은 항복권유가 담긴 문서였다. 하지만 유종과 손권은 달랐다. 이 때 손권 진영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보면 꽤 재미있다. 문관들은 대체로 형주의 예에 따라 조조에게 머리를 숙이자는 쪽이었다. 기득권을 누리는 호족의 논리였다. 반면 무관들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다면 자신들의 대우가 지금 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싸워보자고 주장했다. 특히 바다와 같다고 비유되는 양자강에 익숙하기에 어느 정도는 조조에 맞설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제 공은 손권의 결단으로 넘어갔다. 이때 방문객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제갈량이었다. 20대의 청년이었지만 유비의 군사로 임명된 상태였기에 쉽게 다루기에는 어려운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권이 굳게 의지하는 제갈근이라는 중신의 친동생이다. 제갈량이 가져온 논리는 보지 않아도 분명하다. 조조와의 싸움에 함께 나서자는 매우 위험한 제안이다. 하지만 여기서 제갈량은 성공적인 설득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이 거래가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좋은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 시킨 점이다. 천하가 지금은 조조에게 쏠리는 것 같지만 유비와 손권이 힘을 합쳐 이 고비를 넘기면 셋으로 나뉘게 되어 균형을 잡는다는 논리를 납득시켰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손권으로서는 한 지방을 차지한 주인에서 천하를 놓고 다투는 패자의 지위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당장 문신들과 항복하느니 마느니 다투는 골치 아픈 상황에서 벗어나 같이 싸우자는 우군도 생기고 성공 했을 때의 밝은 미래 전망까지 듣고 나니 손권은 싸움이라는 결단을 내리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결심을 하는 것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시 유비의 세력은 수만명 수준이었다. 유표의 아들 유기가 강하에서 얼마간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북방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오던 세력을 합친 것이다.
손권쪽은 훨씬 여유가 많아서 10만에 가까운 규모의 군대였다고 추정된다. 특히 강을 끼고 생활하다보니 수군이 무척 강했다. 조조가 아무리 막강해도 그건 넓은 평지를 누비는 기병이 좋았기 때문이다. 말을 타던 병사를 배에 태웠다고 해서 여전히 강병은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인식에 의해 손권의 군대는 강쪽에서 조조가 넘어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유비는 지상에서 외곽으로 기습하고 손권은 강쪽에서 조조의 주력을 공격을 하는 것이 전략이었다.
조조 쪽 군대는 매우 많았다. 연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100만에 가까운 대군은 아니지만 20만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대군이 위세 좋게 내려왔지만 대병력을 보급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리고 북방과 강남지역은 기후가 달랐다. 먹는 곡식도 다르고 계절도 바뀌는데 풍토병이 돌아 면역이 약한 북방군대의 전투력에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새로 편입한 형주의 수군이 소극적이라 기대만큼 활약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차례 수군끼리의 대결이 있었는데 조조의 군대 쪽이 대부분 패한 상태였다. 자신감을 가지게 된 손권의 수군이 계절의 변화를 잘 읽어 동남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에 업고 조조의 선단에 꽤 강한 타격을 둔다. 안에는 풍토병으로 떨어진 사기에 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은 걸 보고 조조는 퇴각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이때 관우가 화용도를 지키고 있었다던가 하는 부분은 모두 소설의 창작으로 작가의 재미있는 상상력이 발휘된 부분이지만 결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소설에 나온 것처럼 적벽의 전투가 조조의 군대를 궤멸시킨 것도 아니다. 실제 형주를 항복시킨 조조의 기득권은 대체로 유지되었는데 강하와 양양을 비롯한 북쪽은 조조에게 계속 충성하는 상태로 남게된다. 이 곳들을 뺀 형주의 남쪽은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차지하게 된다. 이 경계선은 거의 삼국시대 끝까지 이어져서 유비나 손권은 관우의 번성 공격 이외에는 이 선을 넘지 못했다.
이 전쟁에서 유비의 공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과연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대체로 손권의 장군인 주유의 활약이 컸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항상 손권은 형주의 일부를 갈데 없는 유비에게 빌려 준 땅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유비가 정면으로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기껏 들이댄 논리는 유표의 아들인 유기가 자기와 같이 있다는 점을 들먹이는 수준이었다.
조조의 패배 또한 순전히 동남풍과 같은 운이었다면 아마 다음해에 일으킨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두는 것이 맞는 진행이었을 것이다. 다시 남쪽으로 치닫아 적벽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양자강이라는 지리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손권의 군대는 강을 의지하여 단독으로 잘 선방하였다. 이렇게 유비와 손권이 조조가 물리치고 살아남았으니 삼국병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