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캐리를 처음 <마스크>라는 작품에서 볼 때는 그냥 다양한 안면근육 움직임을 무기로 남과는 다른 방식로 사람을 웃도록 만드는 재주 정도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지만 과히 특별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이어서 배트맨 시리즈에서 웃기는 역할을 하는 걸 보고 그런 시각이 좀 더 굳어졌다. 뒤에 만들어진 <라이어 라이어>를 보고 약간 생각도 하게 만드는 배우라고 바뀌었는데 결국 <트루만쇼>를 보면서 완전히 다시 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한 가지 더 하자면 2002년에 나온 <마제스틱>이라는 작품에서도 사회성이 담긴 짐 캐리의 연기를 볼 수 있다. 비록 이런 작품들이 흥행에서 참패를 면하지 못했지만 분명 머리에 담아두어야 할만한 가치 있는 창조물이다.

트루만쇼는 꽤 진지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소재를 담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세상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트루만이라는 한 사람의 삶의 모든 모습을 그냥 TV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 배우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누가 자신을 관찰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냥 날 것 그대로 리얼하기에 연출되었기에 사람들은 더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주인공은 단 한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이 TV에 나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하면서 삶의 모두를 담기 위해서 대규모 작업을 해야만 한다. 우선 작은 섬 하나를 모두 뒤덮을 수 있는 거대한 스튜디오를 발견하게 된다. 다음 만나는 사람 누구도 트루만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가식 없이 모두 드러내보이는 사람을 진실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역으로 트루만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트루만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진실한 사람 하나의 모습을 보기 위해 물질적으로는 거대한 스튜디오라는 비용이 들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거짓말쟁이 수천 수만명을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려면 경제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제작자는 광고가 없는 방송이라고 주장 하지만 영화 속에서 트루만의 부인을 비롯해 여러 등장인물들은 늘 각종 물건을 들고 매우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트루만이 눈치채지 못하게 광고성 발언을 해야만 한다.

그래도 트루만이 진정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선 사람은 돌아다니며 세계를 발견하려고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 트루만을 마치 길러지는 동물처럼 제한된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있을까? 제작자는 트루만 자신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로 자신을 방어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보아야 할 진실이 있다.
정말 트루만의 생활 반경은 매우 좁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수도 없고 차를 몰고 다리를 넘을 수도 없다. 이렇게 트루만을 제약하는 가장 큰 콤플렉스는 물에 대한 공포다. 그래서 늘 좁은 세상에 갇혀 살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콤플렉스의 발생 원인을 따져보면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주입된 기억이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처럼 말이다. 원래부터 트루만이 좁게만 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꿈을 보면 그는 탐험가가 되고 싶어하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답은 이미 세상이 거의 발견되었다는 것이었지만 이것 만으로 억누르기에 너무 컸기 때문에 강도 높은 조치가 취해진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의 성적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거세하듯이 인공을 위한 부자연스러움이다.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는 방송이지만 실은 그렇게 리얼하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주변에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운 일들에 의해 의심은 계속 깊어져가고 있을 때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앞에 나타나면서 정말 트루만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발생한다. 막 트루만이 섬을 벗어나겠다는 결단을 내릴 때 제작자 측에서는 아버지를 다시 부활시키는 절묘한 해결책을 내세운다. 잠시 트루만 부자와 시청자들 사이에서 감동이 흐르고 제작자들은 쇼의 중단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쉰다.

그러나 트루만은 이제 정말로 떠날 결심한 것이었다. 수천, 수만개의 카메라의 추적에서 벗어난 트루맛?찾아보니 그는 요트로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여기서 아버지를 다시 도입시킨 제작자의 선택이 한가지 역설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것을 알 수 있다. 바다를 무서워하던 콤플렉스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게 되는 순간 사라진 것이다. 분명 차로 가는 것이 좀 더 편한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으로 지금까지 자신을 억누르던 콤플렉스에 도전하는 길이었다. 트루만이 탄 요트의 이름이 <산타 마리아>라는 것도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콜롬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찾아 나서던 배의 이름이 바로 <산타 마리아>였는데 트루만 또한 그렇게 정말로 낯선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려 험한 항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는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마지막 시련이 다시 다가온다. 그를 붙들어 놓으려는 제작자의 도착적인 욕망은 스튜디오 세트의 장치를 이용해 거센 폭풍우를 일으키게 한다. 트루만이 파도를 두려워해서 돌아오도록 바랬지만 배가 뒤집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상황에서도 트루만의 의지는 꺽이지 않았다.

헤세의 데미안에서 나오듯 알을 깨는 과정에서는 부리로 두꺼운 벽을 깨는 고통도 있지만 새로운 빛으로 눈이 부시는 아픔도 있어야 한다. 제작자는 마지막으로 새로운 빛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너에게 익숙한 너를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트루만은 마지막 시험을 극복하고 시커먼 문 너머로 발걸음을 딛는다. 아마 거기서 그는 피지를 발견할지 모르겠다. 젊은 날 추억을 남긴 여인, 트루만을 둘러싼 세계가 거짓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오직 단 한사람이 바로 그녀다. 거짓에 대비되는 진실의 표상이 담겨진 여인을 쫓아 그의 걸음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미디어의 횡포에 분노하지만 찬찬히 짚어 보면 그런 미디어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결국 시청자라는 사실 또한 밝혀진다. 쇼가 끝나자 모두들 트루만의 결정에 환영하고 격려하지만 방송에서 또 다른 드라마를 찾는다. 이런 시청자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리얼한 것에 대한 욕구는 많은 관련 사업들을 만들어내었다.
자신의 침실에 설치한 카메라를 인터넷으로 방송해서 돈을 번 여대생, 성행하는 수많은 몰래카메라들 리얼을 강조하는 각종 TV 프로그램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하지만 한편에서 우리 자신이 모두 수도 없이 많은 카메라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 덕분에 인터넷 메일로 날라오는 몰래카메라에서 찍은 영상물을 모은 CD를 보내준다는 광고 사이트를 보면서 자신의 감추고 싶은 면모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한다. 한편으로는 남의 리얼함을 더 찾으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리얼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모순적인 현실에 대해서 이 영화가 주는 가장 강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각자는 자신이 관찰자가 아니라 사실은 관찰의 대상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또 하나 배워야 할 점은 역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앞서 트루만의 케이스에서 보면 진실은 불명확하고 기억은 종종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 모두를 거대한 스튜디오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어쩌면 우리 자신이 바로 트루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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