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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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장기는 원래 회전會戰의 묘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단조롭고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공성전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흥미를 조금도 잃지 않고 지켜볼수 있게 해주었다.

로도스는 원래 터키 앞바다에 놓여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에는 이곳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한 기후 좋은 곳이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 섬에 세워진 아카데미였다. 캐사르도 이곳의 대표적인 졸업생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지중해 세계의 주도권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갔고 과거 바다를 자기 집처럼 여기고 다니던 해양민족도 이제는 조용히 밭을 갈며 이탈리아의 상인들과 군선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살고 있었다.
서구 카톨릭 세계가 십자군을 일으켜 성지수복이라는 명분과 내걸고 약탈이라는 실리를 쫓아 지중해를 넘어 이스라엘로 갔다. 하지만 이슬람의 벽은 두터웠고 성전이라는 대의명분은 빛이 바래게 됐지만 혈전의 선두에 섰던 기사단 중 하나인 요한 기사단이 이 섬을 근거로 삼게된다. 이들은 말을 타고 땅을 달리기보다는 물러서서 주로 배를 가지고 주변을 지나가는 이교도의 배를 약탈하는 해적으로 변모하였다.
당시 투르크 제국은 크게 세력을 떨쳐 비잔틴의 낡은 구조를 압박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병합하여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다. 이제 지중해를 자기들의 내해로 삼고 싶었던 투르크의 입장에서는 안마당에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교도 집단을 쓸어내려고 벼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1512년에 벌어진 이 싸움의 경과를 보면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기사단이 투르크 제국의 거대한 물리력에 맞서 싸워 자존심을 지켜준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레판토 해전의 사이에 놓였던 이 싸움에서는 한편에는 기독교 수호라는 투철한 이념과 귀족의 후예라는 명예심을 가진 기사단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들의 입에서조차 기사들보다 더 기사답다는 평을 들었던 술래이만 대제와 그의 지배를 받는 이슬람의 여러 집단이 있었다.
충돌하는 두 문명의 최일선에 있었던 양세력은 공격하려는 쪽이나 수비하려는 쪽이나 모두 오랜 기간 여러가지를 준비를 했다. 이들에게는 참고가 되는 것은 약 30년 앞선 1480년에 있었던 공방전과 그보다 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었다.

이당시 군사기술적인 측면을 보면 화약이 폭넓게 쓰이게되어서 우선 거대하고 위력적인 대포와 성채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뢰가 등장해서 공격쪽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켜주었다. 이에 맞서 수비하는 쪽의 전술 또한 바뀌었는데 성의 높이를 오히려 낮추어 대포의 파괴력을 줄이려고 했고 성과 거리를 둔 외벽을 구축해서 상대의 접근을 막았다.
이런 식으로 성을 세우고 개조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그 효과는 이 전투에서 양쪽에 발생한 손실을 살펴보면 충분히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슬람 쪽의 손실은 5만명 이상이었는데 방어측의 전투력이 모두 합쳐도 5000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의 공성전의 손실이 이렇게까지 많은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포가 등장한 후에도 성채가 이렇게 위력적이라면 중세라는 세계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활약하던 영주들의 기반도 각자 자기땅에 건설한 이런 성채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작은 기사단 하나가 성채를 의지하고 이렇게 버틸 수 있다면 도시국가가 가졌던 자율성도 충분히 이해가 갈만하다.

당시 이슬람 측의 군사력을 보면 병력만으로도 10만이 넘는다. 하지만 군대를 구성하는 집단이 이질적이고 각자가 싸움터로 나오게된 사유 또한 틀려서
정복지의 병력을 다음 싸움에 동원하는 것은 유목민족의 정복전쟁에 잘 보이던 것이다.

기독교 측의 군사력 또한 신분사회의 틀에 맞추어 기사, 종복, 용병 그리고 현지의 자원자로 구성된다.

그리 넓지 않은 섬이고 보면 방어하는 쪽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성외곽의 곡식, 숙소를 파괴하고 우물까지 다 메워버리는 청견벽야 전술일 것이다.
이렇게 텅빈 땅에서 공격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물자를 바다를 통해 조달해야 한다. 이러한 거대사업은 역시 술탄의 강력한 의지가 있지 않다면 어려울 것이다.

후일 대제라고 불리운 술탄 슐레이만은 당시 28세 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에게는 대위업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교양과 이를 통해 형성하게된 통치자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각이 기독교 문명의 틀을 통해 이슬람을 보게되는 굴절을 겪게 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좀더 파악하고 싶은 흥미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이념에 빠져있던 인간들보다는 현실을 보다 직시하고 개조하려고 노력했던 인간들을 좋아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도 기독교가 지배이념이 된 이후의 자료,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근대자료는 보지않으려 했다는 태도를 보아도 그런 작가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문명의 마지막 잔상들을 주인공들을 삼고 호의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서구 문명을 살펴보면 프랑스,영국과 같은 곳에서는 봉건제의 군주제로의 변환을 위해 벌이는 온갖 모략과 잔학행위가 가득했고 이탈리아는 어떻게든 상업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으로 자신들의 풍요를 만들어보려던 장사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들에 비해 하나의 이념에 충실했던 삶은 외면적으로 훨씬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가의 3부작 중 마지막은 레판토 해전을 다룬 것이다. 이 전투에 참여해서 부상을 입은 것을 자부했기에 항상 레판토의 용사라고 불리기를 원했던 세르반테스의 세계관을 보려면 그가 남긴 <돈키호테>를 보면된다. 기사의 용감한 돌격의 대상은 이제 풍차가 된다. 확고하게 땅에 못박고 있고 그 넓은 팔을 휘두르며 방아를 찧고 있는 풍차에 비해 기사의 무장은 너무도 빈약해 보인다. 그 이상은 당연히 주변의 조소를 받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지도 않다.

어쨌든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했던 세사람의 카데토의 역할은 소설적 서술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사람 중 하나가 남긴 회고물이 후일 이작품이 만들어지는 기초가 되었으니 중시할 수 밖에 없지만 막상 이들 젊은이들이 직접 보인 활약에 크나큰 것은 아니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양쪽 모두에 유태인이 의사와 같은 기술자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 기독교 측에 있던 한명의 의사가 이슬람을 위한 간첩행위를 하다 적발되었다. 당시 유태인들은 기독교 보다는 이슬람쪽이 자기들에게 관대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방식으로 많이 행동했다고 한다.

책 제목을 보면 아래쪽에 "사려깊은 무장은 부하 장병들을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몰아넣는 반면 적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싸우지 않게 하는 계획을 강구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기에 보면 한신이 벌인 배수진이 바로 그런 이치를 가장 잘 살렸던 전술인 것 같다. 진리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나에 수렴한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어쨌든 총포의 발전은 계속 이어져 지구 반대편의 일본에서도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시키면서 군벌들간의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다. 한편 중남미로 건너간 스페인의 도적들에게는 고대제국을 파괴하면서 엄청난 재화를 건져오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의 양상이 결국은 사회제도까지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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