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조의 활약

 

2.1 조조 황제를끼고 천하를 호령

 

2.1.1 성장

 

조조의 본거지는 땅이다. 이곳은 유방이 처음 세력을 일으킨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영웅의 고향이 같은 곳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일일까? 일본의 중국사 분야 대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분석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서는 지방이 서로 다른 개의 문화권이 맞물리는 경계였다고 한다.

난세에는 단선적 사고 보다는 이중적 사고를 수행할 있는 사람이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있다고 한다. 정치적 혼란을 크게 겪은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인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경계에서 태어난 것이나 스탈린이 그리스정교와 카톨릭이 부딪히는 경계에서 태어난 것들 모두 같은 맥락의 사례다.

 

앞서 이야기한 동탁에 맞서는 연합봉기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고향에 가만히 앉아있기에는 시대가 조조의 능력을 요구했다. 우선 황건군의 잔당이 중앙정부가 무너지자 다시 일어나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지방정부들을 공격했다. 이런 위협을 받는 지방관들 몇몇은 과거 토벌전쟁의 명성을 기억하고 조조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청을 받은 조조는 고향에서 군대를 만들어 지원을 다녔는데 곳을 돌아다니다가 연주에 근거지를 만들게 된다.

연주에 자리를 잡아 좋다고 생각하는데 우환이 생겼다. 그의 부친인 조숭이 아들이 자리 잡혔다고 좋아서 연주로 오다가 지나치는 길에 서주자사 도겸에 의해 죽게되었다. 삼국지 연의에는 도겸의 고의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정사에서는 도겸이 일부러 그랬다고 한다. 유비 중심으로 창작된 연의는 도겸을 자신의 자리를 유비에게 물려준 의인으로 기록한다. 실제 도겸은 황제를 직접 옹립할 것을 꿈꾸던 야심가였는데 자신이나 아들이 이겨내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알자 깨끗이 경쟁을 포기하고 유비에게 넘긴 것이다.

어쨌든 철천지원수를 만나게 조조는 보복의 군사를 일으키는데 과정에서 직접 관련이 없는 서주의 평범한 관민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조조의 잔학행위는 피해자였던 서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본거지로 삼은 연주에까지 거부감을 남기게 되었다. 조조와 절친한 친구였던 장막과 뛰어난 참모였던 진궁 사람은 조조를 버리고 떠돌던 여포를 맞아들였다. 반란에 대다수의 군이 호응을 해서 조조는 위기에 빠진다. 특히 장막과 조조의 관계는 조조가 자신이 잘못되면 가족을 맡기려고 정도로 친밀했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이로부터 조조와 여포는 연주라는 조조의 본거지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다. 조조는 한때 한두 곳만 남기고 거의 빼앗길 정도로 코너에 몰렸다.

 

반란군의 대표는 여포였는데 최대 문제점 또한 여포에게 있었다. 원래 여포는 말을 타는 이민족 출신이라 용감하지만 사람이 단순해서 주변의 말에 쉽게 혹해가지고 가볍게 움직이는 경향이 강했다. 뚜렸한 주견이 없다 보니 대외관계가 일관성이 없어서 동탁, 원소, 유비 등과 가깝게 지내다가 배신하기를 반복하니 나중에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조조와의 오랜 전투에서 결국 여포는 힘이 모자라 도망을 치게 된다. 싸움을 거치면서 조조는 외부 세력과의 싸움만큼 내부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후에 다른 지역을 점령했을 그는 죄없는 백성을 죽이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깨달음에 의한 변화가 그가 천하를 통일해가는데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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