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세트 - 전5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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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레미제라블 영화의 최대 장점이 혁명이야기를 디테일하게 보여준다는 점으로 꼽고 싶다.
소설은 박애와 연애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지만 그 공간은 분명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회상이였다.

여기서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바리케이드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장례식에서 충돌이 있은 후 혁명가들은 평소 모이던 술집을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여기는 빈민촌이다. 그래서 주변의 호응도 높은데 여자들의 얼굴만 봐도 확 나타난다. 

혁명가들이 주변 곳곳에 도와달라고 외친다. 여자들이 창문에서 던져진 가구를 쌓아서 바리케이드는 만들어진다. 
그들은 기다린다. 이제 봉화를 들었으니 다들 호응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긴 하루밤이 지난다.
혁명편이든 체제편이든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다.

여기서 만든 불씨가 이어져 파리 전체가 타오를 수도 있고 그냥 여기서 꺼져버릴 수도 있다.
전자가 되면 치안은 유지하기 어렵다. 바리케이드도 늘어나고 동조자에 의해 움직이기도 어렵다.

당시 파리의 장군 하나가 말하기를 "거리를 행군하다가 머리 위로 아낙네들이 창문에서 요강물을 던진다면 다 끝장이다"라고 했다.

갸녀린 여인들이 목숨을 걸고 대든다면 그 여자들에게 일일이 총을 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이 정도로 인심을 잃은 정부에서 적당히 빠져나와 깃발을 삼색(프랑스혁명)으로 바꾸어 다는 쪽이 현명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이니 치안경감이라는 중요한 직책의 자베르가 직접 뛰어들어 상황을 살피려고 한 것이다.

반대로 작게 머물다가 그냥 끝나버릴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이 편이 훨씬 많았다. 파리의 경우 거의 해마다 봉기와 진압이 반복되었고 그 중에서 성공한 경우가 30년과 48년이었다. 71년의 경우는 코뮨까지 만들었지만 진압되고 만다.

1832년은 어땠을까?

해당 년도가 우리 머리 위에 남아 있지 않는다면 실패한 경우다.

조금 전까지 박수 치며 호응하던 사람들이 벽 뒤로 숨고, 창문을 닫고, 문을 잠궈버린다. 살육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지려는 소수의 혁명가들의 애처로운 문 두드림을 거부한다. 그렇게 한 순간에 외면 받으면서 역사의 선구자들은 사라져버린다.

영화는 이 장면도 너무나 잘 묘사해낸다. 원작 소설도 이 부분에 대해 긴 토로를 담고 있다.

혁명가들이 바라던 세상은 먼 훗날에는 필연적으로 실현되었다.그들이 방향을 옳게 본 것이 맞다.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가 지금도 전세계의 많은 민주국가의 기본이 되고 있다는 걸 보면 그들은 충분히 의로운 행위를 한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너무 빨리 가려는 사람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한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꽃망울을 보면서 애틋해하는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거리의 모서리에서 그는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살육이 이루어지는 장면 하나 하나를 다 지켜보았다.

누구일까?
바로 소설의 지은이 빅토르 위고다.

그의 몸 안에 이미 외할아버지의 왕당파적 기질, 아버지의 보나파르트적 자유주의 기질이 하나가 되어 있다.
그의 의식은 왕정복고 방식의 귀족적 긍지에서 자유주의적 혁명 지지자로 크게 오갔다.
그 덕분에 그는 넓은 시야를 가졌다. 한쪽편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위고는 혁명가들의 높은 이상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바로 오늘 그들이 이기지 못하는 점도 이해한다.

각자의 시대는 자신만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훗날은 훗날이고 오늘 나에게서 이 순간을 가져가고 싶다면 힘으로 빼앗아 보렴 하고 오늘의 주인들은 이야기 한다.

그들의 태도 또한 위고는 이해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다라는 주장은 혁명가들이 미래를 만들어가면서 하는 이야기다. 
그의 반대편에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라는 주장이 있다. 
좋아하지 않아도 현실에 존재하는 건 가능한 이유가 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와 비추어 이해해보자. 주변에 이번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이 많다. 특히 사회가 바뀌기를 원하는 청년들이 그렇다.
지금의 386세대는 유사한 경험을 87년 12월에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하는 정말 억울하고 황당한 상황에서 이해도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이들은 지금 소설이 묘사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다. 굽이치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도 밀려간다.  
바꾸어 말하면 옳다고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쪽의 생각을 강요만 하다가는 막대한 유혈이 일어나기도 한다.

덕분에 길고 긴 이 소설이 탄생했다.

소설은 현실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역사속에는 마리우스와 같은 열혈청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자크가 묘사한 불쌍한 수전노 고리오 영감도 있다. 테나르디에의 야비함 또한 정말 치가 떨리지 않은가?
이들을 다 보듬어 안아서 묘사해내었기에 이 소설은 공허한 주장을 담은 팜플렛이 아니라 시대를 넘는 걸작이 된 것이다.

어쨌든 혁명은 실패하고 이상은 무너졌지만 오늘 작은 기적 하나가 탄생한다. 바로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커플이다. 
앞서 이야기한 "매춘부의 딸이 남작부인이 된다"라는 기적의 헤드라인을 본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보인 헌신의 결과물을 본다. 

그 씨앗은 멀리 올라가서 장발장에게 주어진 신부님의 은 촛대로 이어진다.

은촛대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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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약하기 짝이 없는 바리케이트에 기대어 '기나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참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더군요. 그 장면이 1832년에 파리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1980년대의 이땅에서도 무수히 반복되었었고, 심지어 작년에는 중동의 수많은 국가들에서도 여러차례 재현되었었죠.

그런데 역시나 가장 경악스러웠던 건 '대포'를 동원한 정부군의 무자비한 진압이더군요. 잔인한 유혈진압에 늘 뒤따르는 꽃다운 청춘들의 숭고한 희생이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올바른 길로 되돌려놓긴 하지만, 그들이 치른 희생이 비할 데가 없다는 게 늘 가슴아픈 일이겠지요.

마리우스가 홀로 동지들이 스러지고 난 아지트로 되돌아와 '그들의 죽음을 나에게 묻지 말라'고 노래부를 땐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리암 니슨이 주연으로 나왔던 '예전의 레미제라블'에 비해 이번 뮤지컬 영화는 사마천님 말씀대로 '혁명적 상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줬던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마천 2013-01-02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맞습니다. 위고는 아주 아주 디테일하게 이 장면을 묘사했고 이것이 역사에서 반복될 것이라는 점도 예견한 셈입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 읽을 때 깨달음이 아하 이건 로맨스가 아니라 역사 소설이구나 였습니다.
그게 이번 영화에서 제대로 묘사되고 과거 보다 훨씬 더 공감이 커진 것 같습니다.
중국도 지니 계수가 태평천국 즈음 까지 커졌다고 하더군요..
요즘 주변도 악 소리가 커지다 보니 힐링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필요 없고 주변을 좀 더 넓게 보고 같이 가자는 태도, 넘어진 사람에게 손 내미는 행위 등이 모여야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