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ody’s fool

폴 뉴먼이 정말로 나이에 걸맞게 늙은 노친네의 역할을 담당한다. 공간은 뉴욕 북쪽의 어느 조용한 시골이다. 식당도 하나 술집도 하나 순찰차도 동일한 차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정말 작은 동네다. 배우가 많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그 중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도 특이하게 느껴진다. 정말 미국의 시골 촌구석의 전형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동네였다.
이곳에 살고 있는 설리는 나이 육십이 다되었지만 하숙하면서 하루 하루 벌어야 근근이 살아가는 날품팔이 노동자다. 그는 얼마전 일을 하다가 무릎을 크게 다쳐서 수십개의 병원을 왔다갔다 해보았지만 돈만 많이 쓰고 완치되지 않았다. 더욱 큰 불행은 고용주가 약간의 서류상 착오를 이유로 치료비를 대납해주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억울해서 재판까지 가보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관객들은 영화의 제목에 ‘바보’라는 단어가 들어갔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설리는 화풀이를 하기 위해 고용주의 사무실에 갔지만 여전히 고자세인 고용주는 법률상의우위를 활용해 치료비 지불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설리가 하루를 벌어야 하루를 살수있다는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새로운 일거리를 떠맡게 한다. 참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게 일하러나간 설리는 차에 블록을 내던지는 자신에게 고용주를 던져버리는 용기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현실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꿈이다. 더해서 짐을 다 싣고 몰고가던 차가 갑자기 펑크가 난다.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저렇게 낡은 차도 굴러갈 수 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할수없이 길가에서 태워줄 사람을 기다리다가 세워진 차에서 아들이라는 사람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뭔가 어색한 장면이다. 몇 년만에 처음 서로 만났지만 결코 반갑다는 환영의 제스처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보니 설리는 아들이 육개월밖에 안되었을 때 집을 나와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설리의 불행은 그가 스스로 가정을 나옴으로써 하나의 결손가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그가 아버지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집을 나온 과거에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받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 베풀지도 못할 것 같이 느꼈을까?
이런점은 특히 그가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완전히 내팽겨쳐버린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금만 수리해서 세를 주거나 아니면 팔아도 꽤 괜찮은 수입이 되었을 그런 집을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완전히 방치해버린 것은 그의 고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고 그의 전부인은 누누히 강조한다.
이런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하숙집 여주인의 아들로 성공한 은행직원인 그는 이제 마을옆에 대규모 위락시설단지를 꾸미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수억불이 투자되는 돈벼락 프로젝트를 끌어들이는 그의 눈에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육체노동자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집에서 내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만 답은 노우다.
이런 무시를 받는 설리에게도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 마을의 조금 정신이 어지러운 노친네가 추운 겨울에 길을 가겠다고 나섰을 때 그는 자신도 허겁지겁 나오느라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였지만 잘 유도해서 가게로 돌려보낸다. 무척 발이 차가왔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남을 위해 베풀줄 알고 있었다. 하숙집의 주인 아주머니를 위해서도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나서서 도와드린다. 아주머니가 가장 곤란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아들은 없다. 가장 어려운 고민을 하는 순간에도 아들에게는 그말을 하면 안된다. 이렇게 빡빡해진 미국 가정의 모습의 단면이 잘 보여진다. 물질적 욕구속에 매몰되어 정말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 아닐까하는 물음을 성공했다고 혹은 성공하려고 노력하며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설리는 반대다. 비록 삶이 고달프더라도 그의 마음은 결코 메마르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여럿 이어진다.
그는 새로 만난 손자에게는 뭔가 다른 새로운 애정을 느끼게 된다. 아직 여리게 느껴지는 소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감싸안고 돌봐주려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왜 아버지 노릇은 거부했으면서 할아버지 노릇은 하려고 드시죠”하며 묻게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손자에게 애정을 쏟아가는 것을 보면서 아들과도 점차 화해를 하게된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현명함도 있다. 용기가 부족한 손자에게 용기를 키워주기 위해서 몇가지 교육을 시키는데 제법 요령이 있었다. 손자에게 처음에는 시계를 쥐어줘서 일정 시간 버티도록 만들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의족을 들고 곤란을 겪고 있는 변호사 양반에게 갔다주는 험난한 임무를 수행시킨다. 어린 아이의 모든 것을 바로잡는 것은 교육아닐까? 한편으로는 아들의 문제도 해결한다. 서로 고집을 세우며 평행선을 긋고 맞서던 아들 부부를 보면서 반은 강압적으로 아들에게 먼저 전화연락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본래 그럴 자격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결국 아들도 부인과 화해를 하게된다.
영화 막판에는 그의 곤란이 극에 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늘 자신에게 시비걸던 동네 경관이 그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차를 인도로 몰고 있는 것을 보더니 느닷없이 체포하겠다고 나섰다. 나도 어쩔 수 없다면서 계속 차를 몰고가는 그에게 총알이 발사된다. 물론 위협사격이었지만 화가난 그가 나가서 경관의 코를 쥐어박아버렸다.
유치장에 갖히는 신세가 되다보니 다 부질없이 보인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신은 한 가난한 남자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
하지만 이 순간부터 그에게 상황이 바뀌어나간다. 먼저 영화시작에 나왔던 법정이 다시 등장한다. 법정은 개인과 사회가 가장 곤란한 얼굴로 만나서 결정적 방향을 결정짓는 장소다. 영화의 시작에서 법정은 설리에게 제법 가혹한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나이 지긋한 판사는 경륜을 담은 판단력으로 상황의 불가피성을 인정해 간단한 처벌로 설리를 놓아주고 요령없고 단순한 경관을 나무라게된다. 나가는 경관의 입에서 “미국이 어떻게 되려고 이 따위 판결이 나오게 되나”하는 소리가 튀어나오지만 반대로 판결이 나왔다면 아마 설리를 비롯한 관객의 입에서 똑 같은 소리가 나왔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영화에 푹 빠지지는 말아달라. 요즘도 뉴욕에서는 총을 들지도 않은 용의자를 경찰이 마구 쏴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니까.
어쨌든 돈없고 삶이 고달픈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행운이다.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않는 행운이 설리에게도 차례대로 찾아온다. 첫번째 행운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그에게 도주여행에 같이 해달라고 한 것이다. 정말 남자로서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지만 사양한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다음은 그가 세금을 내지 못해 억류당했던 집을 하숙집 여선생님이 대납해준덕에 되찾게 된것이다. 물론 앞서서 그가 친절과 애정으로 가족같이 살아온 보답이다. 가족을 찾아도 머무를 집이 없다면 곤란할 것이지만 이 문제도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경마에 걸었던 행운의 수가 통해서 육천불 정도의 배당금을 받게되었다. 육만불도 육십만불도 아닌 육천불 정도의 돈도 주머니에 단돈 40불 밖에 남지 않았던 그에게는 정말로 크게 느껴졌다. 갑자기 모두가 그의 존재를 보다 소중히 여기게 되면서 그에게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풍족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정말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착한 마음을 지켜나가다보면 무엇인가 돌아올 것이다.

관객으로서는 결국은 앞서 떠올렸던 바보라는 영화제목에 “아무도 아니라” 수식어가 붙어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 나는 어렵고 이는 몇가지 조건과 나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삶의 즐거움이 쏟아질 수 있는 그런 행운들이 밀려올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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