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뉴욕이다. 바쁘게 아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뉴욕의 맨하탄이 적당한 공간인 것 같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컴퓨터 그래픽으로 적당히 디지타이즈된 모습의 뉴욕거리가 나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남자주인공 톰 행크스가 Joe Fox 라는 인물로 나온다. Fox 가문은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대형서점 경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업가 집안이다. 특히 조는 수완이 매우 뛰어난 청년 사업가로 크게는 사업장개설과 같은 기획에서 작게는 종업원의 심리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비결까지 경영에 필요한 요소들을 잘 터득하고 있다. 하지만 사적으로보면 이 집안 남자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여자문제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옛날에 잠깐 보았다는 여자가 미인이었고 데이트까지 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이 여자는 실은 여자주인공인 캐서린 켈리(멕 라이언)의 어머니로 쉽게 계산해보아도 벌써 한세대의 나이 차이가 난다. 아무리 노인이지만 예전해 한가락한 솜씨가 눈에 띈다. 다음을 조의 아버지는 영화시작할 무렵에 막 새로운 결혼에 골인하려는 중이었다. 상대방은 대단히 소비성향이 강한 금발의 미인이지만 나이는 자신의 아들과 별로 차이가 없어보였다. 이런 불균형한 결혼은 보나마나 거액의 위자료 소송으로 결판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손자 조도 할아버지 아버지 보다 조금은 나은편이지만 그리 큰차이는 없어 보인다. 같이 동거하는 연인이 있는데 무엇인가 서로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상태인듯 보인다. 그래서 위안거리로 찾는 것이 바로 AOL(유니텔과 같은 미국 통신서비스) 메일을 통한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이다. 그는 ny1415라는 아이디를 사용한다. 자신의 집주소를 표현한 간단한 아이디일 뿐이다.
그렇게 가상공간에서 만나고 있는 여인이 캐서린 켈리다. 그녀는 어머니가 시작한 작고 아담한 서점 Shop on the corner를 운영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단발의 금발미인인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항상 얼굴에 담고 있다. 잠옷차림으로 막 침대에서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방안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늘 20대 후반정도로만 보인다. 그런 그녀도 동거하는 유능한 남자친구가 있지만 무언가 잘 맞지 않는 듯이 보인다. 잠시라도 짬이 나면 인터넷의 가상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캐서린에 비해서 남자친구는 아직도 틱틱 소리가 나는 타자기를 선호한다. 부드러운 촉감과 소리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 시대에는 너무 느린 것 아닐까? 남자친구의 전공은 평론인 것처럼 보이는데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이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잘 취한다. 캐서린의 통신 아이디는 shopgirl이다.
조나 캐서린 모두 이제는 매일 상대방에게서 온 메일을 기대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다양하다. 조는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에 대사를 거의 외울 정도로 뿍빠져있는데 대부란 영화가 그렇듯이 조의 남성적이고 대결적인 성격을 잘 나타낸다. 캐서린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무려 2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의 영국의 중산층가정을 배경으로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이 자신에게 부가되는 온갖 사회적 규율을 뿌리치며 개성을 확보하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캐서린의 성격 또한 개성과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 섬세하고 여성적으로 보인다.
이 두사람의 가상공간에서의 거리는 측정하기 어렵지만 사실 현실공간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집도 한블럭 정도 거리이고 출근시간도 비슷해서 여러 번 스쳐지나가기도 했고 또 둘다 책을 다루는 비즈니스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얼굴을 대면하고 만나게 된다.
첫만남은 우연찮게 이루어졌다. 조가 새어머니의 아들, 할아버지의 딸을 데리고 잘 놀아주다가 캐서린의 서점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첫눈에 캐서린이 꽤 미인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어차피 둘은 경쟁자이고 보면 조도 자신을 노출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을 물어보는 질문에 그냥 조라고만 불러달라고 했지만 사실은 Fox라는 성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마음 씀씀이 일 뿐이다. 그래서 계산도 크레딧 카드로 하지 않고 백달러에 가까운 돈을 현금으로 내놓는다. 실제 미국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이런일은 흔치 않다. 이런 주의깊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작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조가 데려간 새어머니의 어린 아들에게 캐서린이 여우라는 단어의 스펠링을 물어본 것이다. F-O-X라고 잘 대답한 것까지는 좋은데 똑똑한 아이를 격려하기 위해 이어서 물어본 개, 고양이에 대해 똑같이 F-O-X라는 대답만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FOX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 이유는 단지 하나 자기의 새로운 성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감을 잡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캐서린을 앞에두고 조는 허겁지겁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러면서도 가게의 배치나 운영상의 장단점을 재빨리 눈에 담는다.
조가 왜 그런행동을 했는지는 곧 두사람이 파티에서 만나게되었을 때 알게되었다. 이 시점에서 조는 벌써 대형 서적 체인점을 바로 길너편에 만들었다. 무려 35%의 할인율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해 편한 공간과 전문점 못지 않은 카푸치노 커피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런 복합공간을 선보였다. 여기를 잠시만 훑어보아도 벌써 상당부분은 캐서린의 가게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차용한 면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조는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솜씨까지 나무랄 것이 없는 민완한 사업가다.
파티장에서 모든 것을 알아채고 분개한 캐서린이 조를 보면서 말을 쏘아붙일 때 조도 지지 않으려고 맞받아친다. 그렇게 싸우고 난 두 사람이 실은 자신만의 메일박스에서 서로를 기다리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우습지 않은가.
어쨌든 사업상 물러설 수 없는 캐서린의 반격에 조와의 싸움은 치열해지고 그 공간은 조의 가게 앞에서의 시위, 방송을 통한 선전 및 TV토론회 등으로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shopgirl은 ny1415의 조언을 받아 전투의지에 불타오르며 기세당당하게 조에게 맞선다.
이렇게 현실의 치열해지는 전투에서 지친 shopgirl과 ny1415는 한번 서로 얼굴을 맞대면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만나러 나간자리에서 조는 캐서린이 바로 shopgirl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아주아주 놀라게된다. ny1415를 기다리던 캐서린이 눈앞에 나온 조를 보고 귀찮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잠시 산만해진 머리를 뒤로 하고 조는 문을 나왔고 우리의 둔한 캐서린은 바람맞은 것에 대해서도 그리 화를 내지는 않는다. 참 좋은 성격의 아가씨라는 티를 한번 더 내는 것 같다.
다시 쇼핑몰의 전쟁으로 돌아가보자. 미국의 대형체인점들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푼이라도 싸게 사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심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쿠폰, 카드, 세일 등 별의 별 방법이 다 동원되는 이 전쟁에서 중소가게들이 살아남기란 무척 힘들다. 캐서린이 운영하던 전통과 문화의 공간은 이렇게 조의 체인점 앞에서 허물어지게 된다. 할수없이 점포정리를 위한 40% 디스카운트를 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걸어나오는 캐서린의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게된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서 들러본 조의 슈퍼스토어는 한마디로 화려함과 편리함이 잘 조화된 복합체였다. 여기저기에서 캐서린의 가게에서 훔쳐온 아이디어를 잘 이용해 꾸며놓은 매장 사이를 걸으며 캐서린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형체인에도 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한 손님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책 하나를 어렴풋한 기억으로 찾아달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하자 신속, 단순, 정형으로 잘 무장되었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종업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이디어를 훔치고 규모의 경제로 몰아붙이지만 상대가 축적해놓은 가치만은 쉽게 모방하지 못한다는 이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켈리가 저자와 관련서적까지 대답해주는 것을 멀리서 조는 지켜보고 있다.
조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여자친구와 함께 켈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친구는 출판사의 기획자로 실은
켈리가 남자친구의 결별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켈리가 이모같이 여기는 어머님 친구분이 자신의 추억을 더듬으며 스페인의 통치자와 사랑에 빠졌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했다. 이 대목을 짚고 남자친구는 아주 경멸스러운 말투를 던진다. 요즘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보고 유럽의 지식인들이 느끼는 혐오스러움과 같은 맥락이다. 거기에 대해서 켈리가 나도 지난 선거에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남자친구는 화를 내고 다시 용서해줄께라는 말을 던진다. 이에 발끈한 켈리는 결국 헤어지는 빌미를 잡게된다.

잠자리를 요트로 옮기고 있었던 조는 거기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에서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에 대한 상징이다. 요트 자체 값도 엄청나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영화 초반에 나왔던 Fox III라는 조의 요트 옆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Fox II는 물론 조의 아버지 소유일 것이다.
엄청난 부와 대조되는 갈 곳없는 초라함을 배경으로 잘 보여주면서 부자간의 대화는 요트안으로 옮겨간다. 이 대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컨데 조는 대단히 불안정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보여진다. 조의 실제 어머니와는 아마 이혼한 상태인 것처럼 보이고 아버지의 나머지 연인들은 조의 유모들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조가 안정된 가정을 바라는 갈증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는 다시 메일박스 앞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머리를 쥐어짜서 갖은 핑계를 만들어보았지만 다 지워버리고 솔직히 사과하는 짤막한 편지를 쓴다. 아무리 화려한 언사도 진지함이 빠져있다면 결국 기교에 그칠따름이다.
결국 shopgirl을 찾던 조와 ny1415를 찾던 캐서린 이 두사람은 진정 갈망하던 서로를 확인하게 된다.

전에 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남녀의 만남은 결국 함께 할 공통의 기반과 서로의 약점을 잘 메워줄 수 있는 보완관계 두가지가 다 있을 때 이상적이지 않을까 한다. 캐서린의 강점은 매우 가정적이고 평온한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책을 파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내는 매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아동서적을 창작을 할 정도로 전문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 저변에는 역시 풍부한 감수성이 깔려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아주 꽝이었다.
여기에 비해 조는 대단히 수치에 밝다. 모든 것을 이익과 손해, 투입과 손실로 환원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커피가게와 책가게를 짬뽕시켜놓은 복합매장으로 성공하지만 늘 가슴 한편에는 허전함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껏해야 책을 올리브 기름과 다름없이 취급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할까? 이런 물음들이 성공의 그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상이한 성격의 두 사람이 벌이는 결합은 요즘 벌어지는 M&A 바람과 맥이 통한다고 느껴진다. 둘의 장점과 약점이 잘 조화된다면 상승효과가 기대된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내면을 볼 기회를 갖지 않고 시선을 외면에만 고정했다면 상대방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을까? 이런식으로 우리가 포기해버리고 마는 기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래서 영화는 우리에게 가상공간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가상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기본적인 변화는 접촉의 기회를 급격히 증가시켜 준다는 것이다. 점점 이웃집 주인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게되는 낯설음 속에 있으면서도 체면과 구김없이 자신을 보다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가상공간으로 몰려가게 된다. 낯익은 일상에서의 늘 하던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어떨때는 당당한 정치평론가로 어떨때는 진지한 탐색자로 변모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행동들을 기껏해야 아이디 뒤에 숨어서 벌이는 소시민의 오버액션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런 행동을 즐기게 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대기업의 광고판을 많이 담고있다. 먼저 배경으로 활용하는 통신 자체가 AOL이라는 거대 통신회사가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를 보고 올라가는 수익은 어느 정도가 될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다. 약간 교묘한 광고도 있었는데 톰 행크스가 스타뷰익이라는 커피전문 체인점을 놓고서 커피 하나를 주문하는 과정에서도 무려 여섯가지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점에서 사람을 결단력있게 만들어준다고 격찬해 마지 않는다. 잠시 이런 광고를 내보내주고 돈을 얼마나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요즘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늘어나는 제작비를 벌충하기 위해 광고를 한껏 껴안고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워낙 다양한 이슈들이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이 영화를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알아둘 것들이 있다. 대화중에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것이 나오는데 이 두사람은 1950년대에 미국의 핵기술을 소련에 넘긴 스파이로 처형되었다. 증거는 불충분했지만 재판은 강행되었고 형벌이 과도한 편이었지만 당시 미국 사회 전반에 불었던 매카시즘의 흐름에 맞추어 처벌되었다. 그냥 스파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핵의 세력균형을 통한 전쟁방지까지 내다보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거리로 삼을 수 있는 인물들은 확실히 지식인들이고 영화는 그런 뉘앙스를 잘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 브루클린에 가면 450$에 방 여섯개의 집을 구할수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맨하탄에 있는 아파트들의 방세가 월에 수천불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브루클린이 얼마나 싸구려 동네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본 사람은 아마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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