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미국에서 있었던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누구였나고 묻는 여론조사에서 존 F 케네디가 1위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젊었고 항상 밝았고 또 용기가 남달랐다고 기억된다. 그 최후가 너무나 참혹했기에 아무도 감히 그를 쉽게 비난하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 기억과 꼭 같지는 않다. 실제로 그의 건강은 무척 좋지 않아서 2차대전에 참가하려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될 정도였다. 그래도 기를 쓰고 빽도 써서 전쟁터로 나가서 꽤 위험한 정찰 함정 지휘 임무를 자원했다. 그 덕분에 배가 일본군함에 받혀버려서 죽을 뻔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그의 야망이 컸기 때문이다. 모두들 목숨 걸고 싸우러가는 마당에 건강을 핑계로 가만히 앉아 있던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의 자리에 서겠다고 나서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케네디의 전쟁 경력이 무모했지 결코 화려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블리제 오블리제의 정신에 맞는 자세는 분명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카톨릭이라는 소수계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어려움을 장벽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주저앉지도 않았다.

2000년의 부시와 고어의 대선에서 개표를 가지고 논란이 치열했을 때 공화당이 고어에게 패배를 인정하라며 거론했던 것이 바로 케네디와 닉슨의 선거였다. 그만큼 이 때의 선거전은 극히 미세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득표수로 보아도 차이가 전국적으로 보아도 1% 이하 였고 특히 승패가 달렸던 일리노이 주에서는 그 차이가 0.1%도 채 되지 않았다. 케네디가 백악관에서 밀려들어오는 격무에 투덜대자 케네디의 아버지는 “불평하려면 지금 그만두어도 된다. 아직도 공화당원들이 시카고에서 표를 세고 있다.”고 했다.
케네디의 매력은 어디 있었을까? 먼저 본인이 젊고 활력이 넘쳤으며 가정적으로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자식들에 둘러싸인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모습이었다. 밖으로도 항상 사람들을 만나기 좋아했다. 오픈카를 즐겨 타고 거리감 없이 행동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 컸다. 멋들어진 연설을 했는데 문장뿐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많이 반영되었다.

케네디가 남긴 업적은 여럿 있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역시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를 이끌지 않은 점이었다.
그의 임기 중 대외적으로는 소련과의 대결이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쿠바를 둘러싼 핵대결은 세계를 전쟁 직전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큰 위기를 불러 일으켰는데 여기에 대한 진실은 <13일>이라는 영화속에서 잘 그려져 있다. 사건의 발발에서 해결까지 딱 13일이 걸렸다고 해서 영화의 제목으로 붙여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의 주요 파워엘리트들이 보인 태도는 다양했다. 전쟁을 주장하는 군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계속 강조하는 케네디를 보고 군 장성들은 뒤에 돌아서서 비겁한 놈이라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나가려는 입장을 고집한다. 결국 케네디의 친 동생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소련대사와 나눈 협상안은 소련이 쿠바를 미사일 전진기지로 만들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은 터키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협상이 아니라 대통령 개인의 약속이었지만 이는 지켜졌다. 케네디가 미국의 일반적인 보수강경 세력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 소련 지도층의 태도와 케네디의 적극적 협상의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당시 미디어에는 이 조건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는 소련이 양보하고 케네디가 배짱 좋게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는 비밀스러운 거래에 의해 양쪽이 상호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이를 미디어를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해결해낸 것에 케네디의 솜씨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사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대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륙간 탄도탄(ICBM)의 개발과 잠수함에서 바로 지상으로 쏘아올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기지로서의 쿠바나 터키가 꼭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게 되어갔다. 그래도 무모한 대결 보다는 대화를 존중한 케네디의 의의는 계속 빛나게 남아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 가장 컸던 문제는 흑백통합이었다. 마르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은 백인 중심의 사회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여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놓고 민주당, 공화당 등 정치권과 사회 세력들 모두가 많은 입장 차이를 보였다. 케네디의 입장은 간명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당신이 아프리칸 어메리칸 형제들을 대우할 때 당신이 대우받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 이 메시지야말로 정말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알라배마에서는 주지사가 흑백차별 철폐를 끝까지 거부하였고 흑인학생들의 대학 등록도 연방군대의 파견을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었다. 이 장면은 <포레스트 검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어쨌든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선의 하나만 가지고 일을 이루어낼 수는 없다.

덕분에 남부에서는 일대 반란이 일어난다. 백악관으로는 수많은 암살위협 편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은 왜 우리를 니그로들과 같이 취급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케네디가 암살당한 텍사스의 달라스가 속한 이른바 deep south라고 불리우는 남부 지역의 반발은 심했다.
이런 반발로 실제 케네디의 정책은 의회에서 번번히 부결되기 일수였다. 그럼 정말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결론은 케네디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더말할나위 없이 비극적으로 죽어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 죽음을 다룬 올리버 스톤의 만큼 논란이 많았던 영화는 별로 없다. 역사학자들은 줄곧 이 영화가 가지는 허구성에 대해서 실랄한 비판을 가했다. 가령 검사 존 게리슨이 영화에서만큼 훌륭한 인물도 아니었고 그가 워싱턴에서 만나서 케네디가 암살되었다는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는 정보요원 또한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 등등 영화의 논리의 중요 기반이 되는 팩트들의 취약성이 주로 공격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스톤의 태도 또한 일관되었다. 허구적인 부분은 영화라는 매체가 다큐멘타리와 같은 기록물이 아니기 때문에 묘사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랄 따름이고 정작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 보다 주목해달라고 한다.
케네디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베트남전쟁에 보다 더 개입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스톤의 주장을 놓고 특히 논란이 치열했다.
그 핵심은 케네디가 베트남 참전을 축소해나가는 법안에 사인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냉전세력의 반발을 사서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존슨은 집권하자 바로 전쟁확대 조치에 사인했고 이것이 결국 비극적 결말로 치닫게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스톤은 존슨에대해 닉슨 만큼이나 가혹하게 평가한다. 특히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존슨의 역할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를 둘러싸고 역사학자들의 엄청난 반박이 있었지만 스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스톤의 비판은 계속 이어져서 존슨이 경제를 망치고 평화를 지연시켰는데 잘했다고 인정해줄 수 있는 점은 딱 하나 전임대통령의 유지에 따라 인권법안들을 통과시킨 것 뿐이라고 못박는다. 역사학자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생들은 스톤의 견해를 믿는다고 한다. 언제쯤 제대로 진실이 밝혀질지는 아직 모른다.

케네디가 살았으면 베트남전쟁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주장도 무리지만 아주 불가능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케네디가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보듯이 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이끌어갔을 것은 분명하다.
케네디 박물관에서 들었던 케네디의 죽음을 회고하는 어느 역사학자의 멘트가 인상 깊었다. “일찍 죽게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에게 하늘은 소명을 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케네디가 해낼 수 없던 많은 일들이 그가 죽었기에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케네디의 죽음으로 우연찮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존슨이지만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긍정적인 면은 케네디가 시도했지만 이루어내지는 못했던 수많은 개혁입법들을 케네디의 의도에 맞게 처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당시 의회가 젊은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에 미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유언으로 생각해서 원뜻을 최대한 존중해주자는 분위기였기에 가능했다. 어쨌든 수많은 법률들이 통과되었고 실현되었다. 존슨 박물관의 한쪽 벽면은 그렇게 통과한 법률들의 동판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정말 벽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분량이라면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아마 케네디 본인이 살았다면 절대로 다 이룰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케네디가 죽고 조금 지나 루터 킹도 암살당했는데 이에 반발해 미국 60개 도시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영상이 나온다. 법안이 제때 통과되지 못했다면 미국사회는 계속 이어지는 갈등속에 살았을 것이다.

사후에 백인들이 가졌던 거부감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도 한번 더 짚어 보아야 한다. 먼저 미국이라는 사회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 보면서 이해해야 한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남부와 북부간의 깊은 골을 만들었는데 남부에서 전쟁 당시 집권당이 민주당이었기에 이들은 계속 지지세력을 바꾸지 않았다. 북부는 공화당 남부 민주당이라는 정치 지도는 수십년간 계속 되었는데 케네디 이후의 민주당의 흑인 포용정책으로 본격적으로 바뀌게 된다. 심지어 2000년 미국 선거에서 고어가 자기 고향 테네시, 클린턴의 고향 아칸소 모두에서 이기지 못했던 것에서도 알 수있다.

케네디의 삶을 다시 되집어 보면 역시 한마디로 소명을 받았고 이를 위해 죽을 때까지 헌신했던 지도자로 감히 정의해본다. 그런 삶이 비록 짧았지만 그 끝이 장대했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빛으로 역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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