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이종각 지음 / 동아일보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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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토 히로부미

한국인과 일본인이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는 인물이다. 조선에게는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욱일승천기의 리더다. 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미워할 수 밖에 없어도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서 그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토의 출신은 지금의 시모노세키 주변 죠슈 번의 최말단 무사계급이었다. 어려서부터 용기가 특출 났고 어학과 사교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다.
큰 의욕을 보이고 자질이 있는데 마침 좋은 후원자를 만나 영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여기서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웠고 영어를 잘 하게 되었으며 서양인들과 사교에서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렇게 닦은 능력은 하나 하나가 후일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변혁의 마무리 단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유신의 큰 흐름을 만들었던 사이고, 오쿠보, 료마 등이 이런 저런 일들로 단명한 상태에서 그 성과를 거의 다 물려받게 되었다. 덕분에 성장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는데 막판에는 일본의 수상이 될 수 있었다.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간 그의 인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잘 비교된다. 본인은 이런 비유를 싫어했지만. 하나 더 참고로 말하면 조선 최초의 주미대사도 신분이 매우 미천한 통역관 출신이지만 발군의 어학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이 책은 그런 이토라는 인물에 대해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한국적 시각에서 정리해내었다. 이토라는 존재는 접근해갈수록 편하지 않은 진실들이 드러난다.
그 진실은 주로 당대 조선인들의 치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고종이 실제로 이토에게 사정을 많이 했고 덕을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반대로 이토 또한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에 데려와 상당히 후하게 대우 했고 조선에 대해서도 보호국이지만 체면을 살려주려 노력했다.
이토는 국제정치는 미묘해서 힘으로만 밀어 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다. 조선의저항이 강해지고 모양새가 나빠지면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내린 현실적 판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당근을 제시하면서 한발한발 자기 쪽으로 유도해낸다.
조선이 왕족에게는 왕가의 보전을, 대신에게는 보상금과 가문의 지속을, 궁녀들에게 까지 각종 선물을 주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관철하려고 했다. 그리고 청일,로일 두번의 무력 행사의 결과 조선의 주변에는 아무도 의지할 이웃이 없어져버린다.
실로 교묘한 솜씨를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어진다.

영친왕의 경우도 일본에서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다보니 거의 이토를 보호자로 여겼다고 한다. 이토는 자신의 천황인 메이지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니면서 필요한 일은 거의 강제로 시켰다고 한다.

반면 조선쪽의 입장을 보면 안타까움이 많다. 고종과 이토의 대화, 이토의 조선 대신들 휘어잡기 등 진행의 경과를 보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무척 서글프다.
고종이라는 인물은 돈많은 집 아들로 세상물정 모르고 가만 있다가 이제 기업이 망한다고 하니 아쉽기는 한데 무엇을 할 줄도 모르겠다는 그런 태도가 많다.
그는 끊임없이 주변 탓을 했다. 아버지, 아내 그러다가 맨 나중 한일 합방조약에는 대신들에게 최종책임을 떠넘기고 적당히 역사를 비판을 동점심을 뒤집어 쓰면서 빠져나왔다.

이토는 그런 고종에게 나라를 포기시키는 결심을 촉구하는 마지막 해결사 역할을 자임한다.

아주 직설적으로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굿이나 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정말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고 질타한다.

나중에 고종은 이토가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자 그를 위문하였고 후일 서울에는 이토의 이름을 딴 커다란 절이 세워졌다. 박문사라는 이름의 절이 지금의 호텔신라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마치 로일전쟁의 영웅 도고의 신사가 메이지신궁 앞에 있는 것 처럼 그의 이름은 한일합방의 주요공로자로 각인되는 꼴이다.
더 우울하게 만드는 사실은 안의사의 아들이 마치 사죄하는 형태로 이토의 아들을 위문하는 장면이다. 그가 아버지를 부정하는 형태를 취했을 때 속마음이야 어떠했겠는가? 김구 선생이 한스러워 했던 장면이다. 지금 남산의 주변에는 안의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반대편의 박문사는 호텔신라가 세워졌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과거의 흔적을 무조건 지워서는 안된다. 큰 비용을 지지불했다면 그만큼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

저자는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체계적인 공부와 정리를 통해 우리가 자각해야 할 점을 드러내주었다.
역사를 모른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웃나라에서 말단 사무라이가 수상이 되어 한국에 나타날 때 한국의 조정은 그에게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인생이 연극이고 배우들은 늘 가면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토는 수제자에 가깝다.
덕분에 이번에는 히데요시의 꿈이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

다음 대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진정한 앎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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