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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엑세쿠탄스 1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가 돌아왔다. 소설로.
각종 잡문을 신문에 늘어놓으며 정치판에 기웃거리며 훈수하던 그가 다시 작가로서 돌아왔다.
늘 더 좋은 것은 다음에 남아 있으리 하며 우리에게 여운을 남기던 작가.
80년대 흑백이 분명하고 폭력으로 폭력에 맞설수 밖에 없던 그런 시대에 많은 여린 정신들에게 색다른 지적 충격을 주던 작가. 상업적으로 보면 베스트셀러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며 부를 거머쥐었고
사회적으로 보면 말 한마디가 활자로 찍혀 수백만명에게 배달되는 그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얼마간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쳐보았다.
하지만 나의 책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가고 마지막은 훌훌 넘기다보니 1권이 끝이 나버렸다.
물론 읽는 장소가 지하철이 되어버린 것은 독자의 지나친 무성의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나도 얼마간 찔린다. 그래도 여전히 그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론에는 큰 변화가 없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인물들은 80년대 운동에 심취한 군상들로서 여기서는 20년 뒤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아주 위악적으로. 즉 악을 덧씌운 모습으로 말이다.
절대적 신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또 다른 절대를 찾는다.
이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실제 운동의 이념을 버리고 종교 그것도 적극적 몰입을 요구하는 모 종교에 빠져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뒤집어 보면 박정희의 신화가 아직 남아 있는 현상에서도 같은 맥을 찾을 수 있다.
논쟁을 거부하는 숭배라는 점에서.
증권회사에서 그날 그날 돈을 만지다가 사고로 벼랑끝에 몰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념의 추억은 한편 하지만 이제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보이는 금융산업의 종사자의 모양새다. 그런 그를 교묘하게 유도해서 정치자금 세탁소 내지 관리소로 보낸다. 아주 유치한 모습으로.
물론 세상에는 공돈이 필요하다.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남에게 자유롭게 퍼주기 위해서는 원래 돈이 무지 많거나 아니면 돈 나오는 화수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권노갑 처럼 신라호텔에서 수십만원짜리 저녁도 먹고 김대중 3남처럼 최고급 클래스의 항공권을 1천만원 들여 자유롭게 타고 다닐 수 있다.
그 뒷받침은 누가 할까? 바로 후원자들이다. 여기에는 규모가 크고 고전적인 방법인 사업권 획득이 있을 수 있는데 SK의 한국통신 인수 등 각종 이권이 이렇게 결정된다.
반면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런 게임이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증권이다. 김대중 정권의 코스닥 바람 당시 마찬가지로 막대한 공돈이 만들어지고 뿌려졌었다. 이를 놓고 이문열이 씹어댄다면 할말은 없다.
하지만 나도 기억 하나를 떠올려주겠다. 한국 최초 최대의 증권 사기사건이 바로 박정희가 5.16 쿠데타 일으키고 벌인 주식조작이었다는 점을. 그 주도자가 중앙정보부였고 김종필이었다는 점을.
조금 더 나아가면 노태우의 아들도 SK와의 관계를 교묘히 이용해 주식시장에 상장하여 돈을 마련한다.
주인공이 바뀌어도 똑 같이 악이라고 비판해대면 할말이 없는데 반대파의 잘못을 씹어대지만 자기편의 과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결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이문열의 여러 활동에 그런 모순들이 나타났던 것 같다. 사람의 아들이 당시 종교 분야에 끼친 충격은 대단했다. 모세가 사실은 이집트의 신관이었다는 주장은 꽤 깊은 뿌리를 가지고 지적인 파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것이 실은 프로이드의 책 한권의 내용을 교묘히 짜집기 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젊은날의 초상을 보면 바로 똑 같은 대목이 나온다. <중간 이층이 있는 집>이라는 체홉의 소설 한권을 번안해놓고 제 것인냥 너스레하고 내놓았다가 개망신 당하는 그런 주인공의 모습이 아마도 이문열 자신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아들>을 보면서 늘 그런 느낌을 떨치지는 못했고 처음의 신선한 기대가 많이 반감되었다.
이문열의 승리는 계속 이어졌고 꼭 자신이 역사의 심판자인양 행세하는 태도는 여기 저기서 이어졌다.
삼국지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마구 붙여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는데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주장들은 소설속에서 흘려 듣고 넘어가기에는 참을만 하지만 신문의 논설에 담기는 것은 그냥 그렇다.
내가 너무 이문열에게만 혹독한 것이냐고 반론해주지는 말아달라. 나는 똑 같은 논법으로 한홍구의 역사책은 봐줄만해도 그의 유시민 옹호는 구역질이 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은 놀아야 할 물이 있는데 과거를 들어다보며 반추하는 수준의 행위는 학교와 소설에서는 쓸만하지만 이를 현실에 끌고오고 미래에 대한 주장을 할 때 똑 같이 대접해줄 수는 없다.
이문열의 모습이 점점 중첩되어 가는 존재는 바로 이병주다.
그야 이병주의 지리산(상당수가 남의 글을 카피했던) 보다 영웅시대가 한결 낫지만 어쨌든 결론은 권력의 언저리를 맴돌며 점점 시대와 멀어져가는 잊혀져가는 작가 이병주의 꼴이 바로 마지막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품게 된다.
괴테의 말처럼 노력하는 인간은 구원받는다. 뒤집어 말하면 노력하지 않는 인간 오늘에 만족하는 인간 이제 충분하다고 하는 그런 인간들이말로 죽은 존재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