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반양장) - 불굴의 도전 한강의 기적
오원철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높은 정상에 올라가면 발아래로 산 전체의 모습이 들어온다.

가끔 그런 경험을 나누어주는 책들이 있다.

캐사르의 갈리아전기는 갈리아 정복 과정 전체에서 그가 가졌던 생각들을 잘 드러내준다.
그의 행동의 결과 갈리아의 로마가 이루어졌기에 그 생각을 따라가보는 것은 꽤 흥미가 있다.
이 책도 유사한 경험을 나누어준다.

박정희 시절은 물리력을 기반한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의 경제를 만들어간 시대다.
유래없을 정도로 강했던 이 드라이브의 정치적 공과는 잠시 놓아두고 성과를 보면 아직도
많은 다른 나라가 궁금해하고 있다.

이 책은 그 힘의 가장 중심에서 자신의 브레인을 최대한 동원하여 경제를 기획해나간 비서관
오원철에 의해 쓰여졌다.
수십년이 지난 경험이라 좀 낡지 않았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기우라는 것이 금방 판명이  났다.
일을 추진해가면서 획득한 지식과 깨달음을 주는 내용은 지금도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평평한 지도 하나를 놓고 이곳에는 화학공장, 저쪽에는 기계공장을 놓자 하는 한마디에
대산 화학단지가 생기고 창원 기계단지가 생겨난다.
공단과 공단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줄을 그으면 바로 길이 생기고 철도가 이어진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위 공무원들의 재테크 노하우가 나온다.
평범한 농지와 공단의 땅값은 다를 것이기에 다들 돈 빌려 투자에 나선다.
대한민국 고위 공직자들이 인사청문회 서면 하나 같이 나오는 투기 문제의 원조가 여기에 있다.

세부적인 산업으로 내려가보면 축적된 지식도 만만치 않았다.
포스코의 성공은 후공정 부분을 완성해 먼저 제품을 만들고 점차 전공정을 채워가는 전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 돌아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북한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화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일일이 따져가면서 상대와 비교를 했고 결과는 폭넓게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인 남한의 승리였다.
Tank를 만드는 것도 독특했다. 왜 소련의 탱크가 미제보다 좋을까?
답은 의외로 작게 만든다는 simple한 이치에서 나왔다. tank가 작으면 어떻게 큰사람들이 탈까?
역으로 작은 사람들만 탱크병으로 선발한다는 해법이 도출된다.
결과는 작기에 낮아서 피격되기 어렵고 철의 무게가 적어서 더 많이 만들고 빨리 기동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읽어가는 것은 때로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의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 같기도 했다.

어설프게 남의 이론 들여와서 입으로 떠벌리지만 막상 권한 주면 하나도 해결못하는 인간들이 있다.
노무현과 주변의 집단들이다.

최근 최장집 vs 조희연 논쟁이 있었다.
과연 지금 집권세력의 문제는 무엇이고 계속 집권하는 것이 사회전체적으로 바람직하냐는 논란이다.

내가 볼 때 노무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조교수 쪽은 아직도 상아탑에서 적당히 가공된 외국산 툴을 조합하고 여전히 신념에만 매달려 자신의 이론과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는 꼴 이상이 안된다고 느껴진다. 차라리 최장집 처럼 안되면 놓으라고 하는 태도가 더 솔직하지 않는가?
최근에도 보면 한홍구 교수를 비롯해서 조희연 교수와 유사한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종이 값이 아깝다는 느낌을 넘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한국의 마오이스트들을 만나보기 보다는 박정희 시대의 테크노크라트 - 황병태 등 - 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박태준을 영입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잘 음미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데 박정희 시대의 모는 과를 안고가서는 안된다.
박근혜가 인혁당 재심논란을 자신에 대한 정치적 공세로 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정치적 선택이다.
386세대가 다시 노무현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혁당 사형까지 박정희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그 정도 수준에 밖에 정치적 조언을 받지 못한다면 대권을 쥐고도 노무현처럼 소규모 측근에 둘러싸야 대세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 입장에서 손쉽게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우습지도 않은 개념 만들고 떠벌리고 다니는 후안무치도 없어져야 한다.
얼마전 한홍구의 글 하나를 보니 아직도 유시민에 대한 꿈을 버리지 말자며 80년대 항소이야기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 그 글은 분명 감독적이었다. 아마 유시민이 정치인이 되지 않고 외곽에서 비판을 해나가고 있다면 여전히 어느 정도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 특히 책임을 맡은 행정부는 그 결과물로 심판받아야 한다.
성과 나오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회비용의 손실이고 한 마디로 밥만 축내는 밥통보다도
못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런 노시민 그룹을 변명하기 위해 추억을 들먹이는 태도는 오늘도 고난의 행군을 써먹는 모 집단의
태도와 별로 차이가 없다.

좌냐 우냐 과연 그 기준이 앞으로도 그렇게 중요할까?
자유주의,신자유주의,사회주의 모두들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장단점은 있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각자 몸에 맞는 해법을 다를 수 밖에 없다.
자신에게 맞추는 치열한 고민 없는 모든 논설은 가치 없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그것이 없다면 유시민과 공병호 두 사람의 case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수준의 잡다한 이야기꾼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보면 조희연,한홍구의 책 보다 분명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더 값어치 있다. 가끔 독설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자신감,기획력 그리고 폭 넓은 시야는 분명 배울 점이다.
가까운 중국이 침흘리며 사려는 경험을 우리는 너무 쉽게 내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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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박사 2007-02-1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궁금합니다...^^
남들이 다 지겹다고 했을 때, 박정희를 떠들던 사람의 하나로, 아직도 궁금합니다...
1. 입증가능한 역사적 과거로서의 실체적 경험인지 (아님 그냥 결과론인지)
2. 재생할 수 있는 경험인지 (그냥 교훈 수준의 경험은 아닌지)

▩ 개발독재 뒤집기


개발독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생각은 거대한 담론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건설했다”는 것과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못했다)”는 것으로 대변할 수 있다. 이런 담론구조는 사실확인과는 별도로 일종의 믿음, 즉 신념체계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다수대중이 이런 신념체계를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이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사실”이 된다.



이것은 마치 “이승만은 너무 늙어서 아랫사람들이 그렇게 부정부패를 저지르는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들과 닮았다. 한편으로는 몇 년이 아니라 근 20년(후계통치까지 합하면 3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사실이냐 아니냐와는 관계없이 “사실로 믿도록 강제할 수 있는” 방법과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했던 사실”이 되려면 현재 존재하는 정치이슈로만이 아니라 과거에 실제했던 사실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검증작업은 사실상,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사실 검증할 주체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테에서, 오히려 기득권세력은 줄곧 “민주화”에 대한 공격목적으로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를 “양산”했으며, 이 포화는 이미 시장을 거의 완벽히 독점하고 있는 언론권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 시절 복고적 이데올로기 공세로 굳어진 개발독재에 관한 담론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범사회적으로 검증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그것은 교과서에 그렇게 써놓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이런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야할 과거의 야당 정치권력은 오히려 기득권과 결탁하여 정권을 획득하고자 했고, 그 결과 그들은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의 보조역을 자청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세력”의 결합이니, 경제개발 결과를 새로운 세기에 맞게 재편해야한다느니 하는 것은, 비록 한계를 둔다해도 “개발독재의 올바른 영향”을 인정하는 중대한 선택이었다.



이런 사회적 주류흐름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도덕적 저항에 대해서도 “바르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고, 저항해야 마땅한 나쁜 짓을 행한 군사정권이 행했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서도 “바르다”는 판단을 내리게 강요함으로써, 왜곡된 가치관을 낳고 말았다. 한마디로 독재는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학문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런 “승화”작업은 과거 기득권 세력이 주축이 된 적극적인 부류와 “일단 이루어놓은 것은 부인하지 말자”, “현재가 중요하다”는 소극적인 부류로 나뉘지만, 어쨌거나 개발독재 이데올로기 공세의 아카데미즘으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에는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적 자본주의”같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신종모델이 모두 포함된다. 때로는 이런 이론들이 외국사례까지 차용해 이광요나 마하티르의 서구저항적 자본주의 모델과 박정희의 것을 같은 논리의 연장에 놓고보는 수도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과오다. 왜 그런지는 차차 설명하자.



어쨌거나 우리는 30년의 세월, 멀게는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세계경제가 어떤 식으로 변화했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실상이 어떤 것들이고, 그 결과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또한 개발독재로 인한 “기회비용”까지 냉정하게 따져봐야한다. 이것은 학문적인 과제이며, 결코 정치담론으로 굳어져서는 안된다. 내가 항상 담론에 저항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남한에서 “박정희가 나라를 살렸다”고 하는 동안 북한에서는 “수령께서 우리를 구해냈다”고 가르쳤으며, 남북한을 돌이켜보면 이것이 결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들이밀 수 있는 증거는 한 둘이 아니다. 흔히 우리를 북한이나 중국, 또는 더 못산다는 나라와 비교하면서, 그게 다 박정희 덕이라고 치부하고 마는 것을 보는데, 이게 바로 이 담론구조의 특성이다.



같은 자본주의권과의 경쟁에서는 여지없이 패퇴한 결과, 비교가능한 대상이 겨우 이런 제한된 “봉쇄경제 독재정치”를 펼친 아시아국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아적 발상으로는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기 힘들다. 기왕이면 경쟁대상의 수준을 좀 높이는 것이 어떨까? 하긴, 경쟁대상을 돌리면 비교할만한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도대체 이런 담론구조를 끝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하게 말해 “이땅에서 보릿고개를 없앤 공화당”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복지정책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과연 개발독재가 빚 얻어다가 공장 세우고 농사판 다 뒤집어엎어 시골처녀총각들을 공돌이 공순이로 만들어 잠안재우고 수출해가며 이룩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 했을 경우” 정말 이룩하지 못했을 것인지, 만약 다른 방식을 채용했을 경우 더 나아질 수는 없었을 것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담론구조에 빠지면, “그래도 경제를 이룩한 업적은 있는 박정희”라는 함정에 빠져, 역사를 거꾸로 보는 꼴이 된다. 그러면 거기서는 정신병적인 “운명”과 “필요악”과 “밉지만 고운” 괴상한 괴물이 등장한다. 나는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자긴 잘했다는데 우린 왜 그저 “필요악”이라고 하는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결과는 분명 하나다. 아니라고? 경제는 잘하는데 정치는 못할 수가 있다고? 그걸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괴상한 버릇”이 바로 우민화정책의 결과라는 걸 모르는가?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경제가 뭐라 생각하시는가?



나 역시 이런 담론같은 추상적 어구로 이 글을 맺지는 않는다. 통계에 약하긴 하지만, 통계수치까지 들이대면서, 때로는 이집트나 이스라엘이나 스페인이나 영국까지 비교해볼 것이다. 제한된 자료지만 내가 무슨 박사 따려고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이 정도도 잘 하는 거라고 믿는다. 이 작업은 다음 글에 올리겠다.



※ 자유민주주의의 경쟁력


자유민주주의는 왜 다른 체제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많은 문제를 안고있는 자유민주주의지만 근세에 들어 다양한 정치체제와 경쟁해 “승리”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① 미완결의 현재진행형 정치체제 (원칙만 있다)
- 절대 선보다는 현실적인 악을 피해가는 성격
② 실패에서 반성하고 변화할 줄 아는 유연성
③ 내부에서 발생한 체제전복적 세력을 포용하는 시장성



※ 한국적 민주주의와 닮은 것들
① 주체적 사회주의 : 보편에 대한 완강한 거부로
② 덩샤오핑의 신중국 : 정경의 극악한 분리개념으로
③ 프랑코 파시즘 : 히틀러/ 무솔리니의 아류로
④ 피노체트 군사정권 : 패거리 쿠데타와 정경유착으로
⑤ 노리에가(파나마) 정권 : 정권유지를 위한 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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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없었으면 경제개발도 없었다는, 그래서 “민족중흥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평가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너무 심한 “자학”이다. 그것은 정말 민족성에 대한 멸시이자 종족의 인간적 능력을 원숭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야만이며, 결국 역사에 대한 정말 낯뜨거운 조롱이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이 사실과 다른 숱한 담론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은 이미 설명드렸지만, 그 담론조차 “신화적 허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흔히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맨손으로 총알을 잡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원쑤들을 혼쭐내신 수령님”타령을 들으면서, 같잖은 웃음을 짓곤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치들은 순진하기나 하다. 그래서 웃음거리로 끝나니 다행이다. 거기에 반해 박정희 신화를 만드는 인간들은 정말 간악하다. 거기에는 역사왜곡과 사실조작이 있고, 때로는 인권을 유린하는 실존인물에 대한 “과감한 공격”의 결단도 있다. 그들의 수호신 박정희를 보호하고 빛내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결사항전도 불사하며, 나라가 거덜나더라도 그 가치는 지켜야한다고 믿는다. 이것조차 북쪽과 너무 닮아있어 가끔씩 착각을 하게 만드는 유치함의 극치이기는 하되, 그 막강한 전파능력과 “관심을 끌어당길 수 있는 권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나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좃선”이 끔찍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그들은 대중의 몽매함에 기초한 사유언론 권력을 이용해, 역사로 가장하고 그것을 자라나는 2세들에게까지 재교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역사 바로잡기”로 오도되는 오늘의 현실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보다 더 끔찍하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살아있는 전두환에 대한 칭송이 더 도덕적이다.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 자신들의 왕국을 지켜내려는 이 세력의 파렴치한 음모는 30년을 뿌리내린 지역차별과 인권유린, 정치유린, 가치파괴, 역사왜곡, 문화말살, 도덕멸시, 환경 거덜내기를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가당치 않은 “그들만의 구호”로 정당화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했던 지식을 악의적으로 편집, 왜곡해 공중망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정치권력에 대한 훈수와 압력행사,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정치 권력화해 실제로 한국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주려는 극우파시스트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우리는, 지향해야할 것과 지양해야할 것을 분명히 알고있었으나, 이제는 섞여버리고 변색해버린 이 위장색 때문에, 그들이 바로 그 파시스트들이라는 사실을 왠만해서는 파악하지 못한다. 지식인이건 일반대중이건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우리는 어려운 경제사정과 계급갈등에 처해있는 20세기 말 한국의 현실이 파시스트들이 살아가는 토양이며, 그들이 이 고통을 거름으로 자라나, 세기초와 세기말에 우리가 경험한 적이 있는, 인간본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파시스트 국가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정말 이 상황이 위험스럽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나 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초유의 권력이동이 일어난 마당에, 대중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을 이 정권이 전 정권에 맞먹는 실패를 반복하면, 파시스트 세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은 무조건 성공할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이 걱정은 결코 과민한 반응이나 기우가 아니다. 419 이후의 정치경제적 상황도 바로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후기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과연 “사실적인 박정희시대”를 찾아내고 진실과 허구를 분리해낸다는 작업은 그렇게 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한다면, 파시스트들의 젖줄기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한, 지루한 소모전으로는 악몽같은 이 시기를 버텨낸다한들, 그들의 또다른 파괴적 유희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시점에서 해야하는 정확한 사실의 복원과 “역사회복”은 정말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고 저 파시스트들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우리민족을 중흥시켜 오늘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용기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날조되지 않은 “우리들의 박정희 수령아바이”의 진짜 모습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은 과연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잘 알고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우리의 문제의식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19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