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흙과 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경사진 벽이 있었다. 쪼삐는 사람 혹은 어떤 존재가 만든 인공적인 건축물이었고, 그 위로 진흙이 덮혀 있어 바위산처럼 보였을 뿐이란 사실을, 아이는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어떤 집도 건물도 본 적이 없었기에, 저 아이들 외의 사람 역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유일한 어른이었던 아버지도 이제는 없고, 눈앞의 신비와 경이를 누가 가르쳐줄런지. 이 알 수 없는 노란 외벽을 바라보며 아이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의 싹이 벌써 커다란 싹을 틔워 두려움을 슬그머니 가려주었다.

짙은 황색의 벽돌로 이루어진 경사진 벽 한 가운데에는 문이 있었다. 모래가 잔뜩 뒤덮여 자세한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쇠창살이 둘러친 창문임에는 틀림없다. 문에서 계속 먼지구름과 흙더미가 성마른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몇 번의 흔들림이 경련처럼 이어지고 철제 문틀이 흙더미와 함께 앞으로 튀어나왔다.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모래 먼지 이외에는 움직이는 존재는 이제 없었다. 찰나의 생명을 얻은 듯 흙을 토해내던 쪼삐는 다시 바위산이었던 본래의 임무로 되돌아간 듯 긴 침묵에 빠졌다.

혼비백산이 되었던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때쯤이었다. 정말로 쪼삐가 살아서 움직이기라도 할 것만 같았는데, 껍질 일부가 벗겨지며 보여준 속살과 떨어져 나온 창문틀이 짧은 활동이 남긴 흔적이었을까. 한결 가라앉은 고소공포를 달래며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펴보았다.
이제 문틀이 빠져 나간 창문은 반원형의 구멍이 되어 있었다. 조금 지나자 연기 같은 흙먼지가 몽실몽실 새어 나왔고, 움직이는 물체가 구멍을 통해 밖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기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문에서 몸을 빼내었다. 문과 땅까지의 거리는 그의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으나 벽돌도 된 외벽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기에 미끄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어지럽게 널린 흙과 돌멩이, 바위와 자갈 때문에 그의 걸음은 느릿하고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꼭대기에서 그가 흙더미를 건너 평평하고 무른 마른 개펄로 무사히 몸을 옮길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늘 보아오던 아이들 외의 다른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었기에 그 모습,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사실 길고 거친 천으로 온몸을 가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한 후에야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팡이를 무른 땅 위에 꽂아놓고, 그 옆에 앉아서 양 손을 땅에 대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게 된 건 그 순간이었다. 아이는 멀리서나마 두건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조그만 얼굴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얼굴 주위에 일렁이는 머리카락의 물결을 보았다. 그건 아이에게 있어 낯설고 신비로우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아름다움이었다.
짙은 회색의 땅 위에 미친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바로 하늘우물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으니. 아이는 설명하기 힘든 자신의 마음이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임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

그 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이를 향했다. 거리 때문에 서로 또렷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아이는 상대의 호기심을, 그는 아이의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을 터. 수런거리는 소리와 거친 발걸음만 아니었으면 둘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만 같은 정경이었지만, 정지된 것처럼 보였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양손에 돌을 쥔 아이도 있었고, 겁먹은 아이는 덩치 큰 아이의 뒤에 바짝 붙어서 조금씩 따라오고 있었다. 대장의 체면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야말로 위엄과 권위를 보여줘야 겠다는 호승심도 생겨서, 불룩이는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세게 울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고 난 후에야 불룩이는 상대가 자신들과 비슷한 덩치의 작은 소녀임을 알았다. 커다란 두건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자기들보다 큰 줄로만 여겼던 탓이다.
소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건이 머리보다 위로 비쭉 솟아 있었을 뿐 키 역시 자신의 어깨 정도밖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두건 사이로 흘러나온 가늘고 긴 연녹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타고 쉴새없이 일렁였다.

아이들은 모두 여기서 태어나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란 지라 처음 만나는 낯선 인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불룩이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아이란 걸 확인하고는 괜히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뒤에는 충실한 심복 배툭이도 있지 않은가. 혹시 싸움이라도 나면 혼자서 열 명도 넘는 자기들을 이길 리가 없다.
그렇게 마음 먹으며 용기를 냈지만 역시 처음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넌 누구냐 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디서 왔는지 부터 물어야 할까. 그것보다 저 바위산 속에서 어떻게 나온 건지, 바위산 안에 어떻게 저런 집과 창문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일단 입을 열어보았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아…… 너는……"
"목이 마르구나. 마실 것을 주지 않겠니?"

소녀의 말이 더듬거리는 불룩이의 말보다 먼저였다. 낮고 단조롭지만 시냇물이 흐르듯 잔잔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 뭐? 물? 없어. 우린 하늘우물에서 줄 때만 물을 먹걸랑."

불룩이는 상대방이 갈증과 피로로 지쳐 있음을 알고는 한층 자신감을 얻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우리가 잡은 벌레랑 짐승들이 있지. 근데 그냥은 못주겠고, 그보다 넌 뭐야? 산을 뚫고 나온 거야? 저 바위산 속에는 뭐가 있는데?"

불룩이가 쌓였던 의문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붓자 역시 호기심이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아이들이 순식간에 달려와 불룩이와 소녀를 둘러싸려는 듯이 모였다. 침착한 눈동자로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던 소녀는 마침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지치고 목이 말라 이야기를 할 기운이 없단다."

소녀의 말에 아이들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소녀가 가볍게 손짓을 했으나 물러나는 아이는 없었다. 불룩이도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아이들의 반응에 힘을 얻고 다시 다그치기 시작했다.

"너 혹시, 저 바깥 세상에서 온 거야?"

아이들은 불룩이의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절뚝이가, 코줄줄이가, 쉭쉭이가, 헬쑥이가, 또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를 쳤다.

"바깥 세상? 바다 건너 산 너머 바깥 세상 말이야?"
"아버지가 말한 겁나게 큰 나라?"
"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이 엄청 많다는 곳에서 왔다고?"
"대장, 그럼 우리도 거기에 갈 수 있는 거야?"
"우와! 우리도 바깥 세상으로 갈 수 있대!"
"바깥 세상! 바깥 세상!"

어느새 아이들은 바깥 세상을 연호하듯 외치고 있었다. 불룩이가 조용하라며 몇 번이나 소리를 친 뒤에야 소란이 가라앉을 정도로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조용히 안 하면 저 꼽등이랑 같이 굴러 떨어지도록 만든다?"

불룩이가 주먹을 들어보이며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아이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불룩이는 물론이고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도 바위산 꼭대기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사실 본인도 자신에 대해 신경쓰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이곳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 이 상태 그대로 조용히 있어. 내가 대표로 물어볼 테니까. 어이, 너. 이제 말해봐. 너 정말 바깥 세상에서 온 거 맞아?"

그 목소리에는 궁금해서 물어본다기보다 동의를 구하는, 확신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소녀는 가만히 불룩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짙고 검은 아이들의 것만 보며 살아오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게 되니 본능적인 외경과 공포가 솟아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아무 말 없는 조그만 덩치의 소녀에게 압도되는 자신을 느끼며, 불룩이는 주위 아이들이 없었다면 진작 도망치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이 작은 높드리에서 나고 자랐구나. 그래서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고 있는 게야."
"빨리 묻는 말에나 대답해! 바깥 세상, 바깥 세상에서 온 거 맞지?"
"바깥 세상! 바깥 세상!"

아이들이 또 흥에 겨워서 대장의 경고도 무시하고 바깥 세상을 외쳐대었다. 소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곤 말했다.

"하늘우물…… 여긴 하늘우물 외엔 물을 얻을 곳이 없나보구나."
"아니면 넌 저 땅 밑에서 온 거야? 아버지가 그러는데 땅 밑에는 무서운 괴물들이 살고 있어서 실수로 떨어진 사람을 잡아먹고 산대."

다분히 두려움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아이들은 외침을 뚝 그치고 불룩이와 소녀의 눈치만 살폈다. 소녀가 흩어놓을 때까지 잠시 동안은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공기에 모두들 휩싸인 채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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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꼽등이 너! 누가 자랬어!"

불룩이의 성난 목소리가 꼽등이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듯 인상을 쓰며 아이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허둥지둥 땅을 파헤쳤다. 하지만 불룩이는 그런 우수룩한 행동만으로 넘어갈 아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잡아놓고 조는 거야, 응?"
"아, 아니. 안 졸았어. 그냥 잠깐 생각하느라……."

불룩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의 주위를 훑어봤다. 애초에 보나마나지만, 늘 굼뜨고 둔한 꼽등이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꼽등이가 건진 건 하나도 없었고, 발치에는 돌로 그린 둥글둥글한 무늬 뿐. 구름이라도 그리려던 것일까? 심술이 난 불룩이는 발로 돌을 하나 걷어찼다. 깜짝 놀란 아이가 고개를 들자 그 겁먹은 동그란 눈망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같이 열심히 저녁거리를 찾느라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구석에서 낙서하고 졸고 있고 말야. 도저히 안 되겠어. 너에게 벌을 줘야겠어."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꼽등이는 얼른 빌기 시작했다. 제발 밥을 굶으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그것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결정권을 쥔 불룩이의 미소는 먹잇감을 잡은 포식자의 것이었다. 뒤에서 절뚝이가 소리쳤다.

"대장, 저 쪼삣 위에서 굴리자. 몸이 둥그러니까 잘 굴러갈 거야."

불룩이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끝이 유난히 뾰족하고 경사가 급해서 쪼삣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그쪽에 있었다. 종종 먹을 것을 빼돌려 혼자 먹거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벌줄 때 저 쪼삣 꼭대기에 올려놓고 내려오게 시키곤 했다. 아무리 애를 써서 조심스레 내려오다가도 한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 가파른 경사를 굴러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흐흐, 불룩이가 다시 꼽등이를 쳐다볼 때는 얼굴이 이미 기대감과 장난기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을 치고 있었으나, 어느새 불룩이의 심복처럼 움직이는 배툭이와 절뚝이가 아이의 양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불룩이의 손가락이 아이의 얼굴을 향했다가 쪼비의 꼭대기로 움직였으니, 형벌의 선포는 그토록 간단했다. 울고불며 잘못을 비는 아이의 외침은 들어주는 이 없는 진흙 위로 흩어지고.

덩치 큰 두 아이에게 팔을 잡혀서 아이는 억지로 쪼삣의 꼭대기까지 끌려 올라갔다. 불룩이는 아이들과 함께 아래에 모여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등의 혹 때문에 웅크리고 앉으면 정말 동그랗게 보이는 아이였기에, 공처럼 잘 굴러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배툭이와 절뚝이가 길쭉한 나뭇가지로 바닥을 찍으며 무사히 아래로 내려오자 불룩이는 꼭대기에서 반쯤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아이에게 외쳤다.

"자, 꼽등아! 거기서 몸을 공처럼 말아서 굴러 내려와. 그러면 오늘 잘못을 용서해주고 저녁도 나눠줄게. 안 그러면 넌 오늘 밤새 거기서 밥도 못 먹고 그러고 있어야 될 거야."

아이는 입 안 가득히 머금은 듯 울음을 세차게 토해내었다. 저 모습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누구도 불룩이 자신에게 반항하거나 덤벼들 생각을 못할 거라는.

꼽등이는 목이 메일 때가지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이런 일은 없었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나면 늘 아버지가 잘잘못을 가려주었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내었다. 불만을 가지는 아이는 없었고 잘못한 아이도 아버지의 엄한 꾸중을 들은 후에는 다함께 밥을 먹으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곤 했다.

아버지. 속으로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목이 막혀서 목소리는 나오지도 않았고 들어줄 사람도 더는 없다. 아버지는 죽었어. 죽는 게 뭐야? 영원히 답을 들을 수 없을 허무한 자문. 죽으면 어떻게 돼? 아버지는 흙 속에 있다. 흙을 파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을 누이고 조그만 돌을 가득 모아 그 위에 쌓았다. 그건 아버지 본인의 부탁으로 한 일이었다. 이제 난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거야. 그게 죽음이지. 아버지는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일어나지 않는 아버지를 몇 번이나 부르며 몸을 흔들었는지 모른다.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나고 벌레들이 날아와 달라붙을 무렵 아이들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죽었어. 몸은 썩고 고약한 냄새를 풍겨. 먹고 버린 벌레와 짐승의 찌꺼기처럼. 죽음이란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거야.

쪼삐의 꼭대기에서 본 아이들은 손가락보다 작았다. 그렁그렁한 눈가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나니 주위 풍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탄식이 새어나온다. 위에서 올려다본 풍경은 이토록 새롭구나, 라고.
늘 보던 거무튀튀하고 단조롭던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크고 작은 뾰족하고 둥그런 바위들이 주위에 불쑥불쑥 솟아 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물결 같은 무늬를 그리며 마른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를 묻은 돌무덤도 희미하게 보이고, 짚과 마른 풀을 모아서 만든 잠자리도 보이고, 저 멀리 낭떠러지 너머엔 검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것마저도.

하지만 아이들의 거친 목소리가 아이의 정신을 빼앗아 현실로 돌려놓는다. 빨리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죽을지도 몰랐다. 다른 아이들도 아이의 등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엄명 때문이었다.
등을 바위에 살짝 부딪히거나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아이는 하루 온종일 고통을 삼키며 드러누워야 할 정도였고, 이를 안 아버지는 좀처럼 힘든 일도 시키지 않는 등 각별히 신경써주었다. 그때만 해도 참 좋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다소곳한 그때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사육사가 없는 아이들은 야생동물처럼 사납고 잔인했다.

누군가 던진 돌이 아이의 근처에까지 날아왔다. 몸서리를 치는 아이의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저마다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고 힘껏 던졌다. 몇 개가 아이의 귀에, 발목에, 엉덩이에 맞았다. 몸에서 가장 큰 부분인 등의 혹에 맞자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의 킥킥대는 소리가 귓전에 벌레소리처럼 맴돌았다.

아이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돌팔매질이 뚝 그쳤다. 얼이 빠진 듯한 아이의 얼굴에서는 표정변화가 사라졌다. 아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그 결과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처럼. 자신의 몸도 곧 썩고 냄새가 나면 아이들이 땅 속에 묻고 돌무덤을 쌓아주겠지.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이는 두려운 와중에서도 궁금했다. 그저 계속 잠을 자는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아이는 절을 하듯 몸을 수그린다. 이제 혹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것이고, 가파른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겠지. 나는 십중팔구 죽을 거야. 아이는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인지 혹의 무게 때문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어어.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아아! 그 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비명 비슷하게 바뀌었다. 비틀거리다 그만 주저앉아 고개를 드니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정신이 없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 후에야 자신의 몸이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누군가가 사정없이 흔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몸에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니 마치 쪼삐 전체가 몸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뾰족한 바위 덩어리가, 생명도 없는 돌덩이 주제에 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려는 짐승처럼 그렇게.

떨림이 가라앉을 무렵 쪼삐의 사분의 일 정도 되는 면적의 옆면에서 모래 먼지가 피어오르며 자갈과 흙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이는 그제야 쪼삐와 양파와 다른 모든 바위 덩어리들의 참모습을 알았다. 그들은 그저 특이하게 생긴 바위산이 아니었음을. 긴 세월에 걸쳐 진흙과 돌에 뒤덮힌 채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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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하늘만큼 그리운 꿈이 있다


검은 하늘에 조그만 구멍이 열렸다.

하늘우물로부터 새어나온 볕뉘가 검은 하늘과 뻑뻑한 공기 사이를 가로지르며 가느다란 빛줄기를 대지에 늘어뜨리자, 아이들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빛을 좇아 달려왔다.
그 소리는 틀림없이 기쁨에 찬 웃음과 환호성이고, 알아듣기 힘들어도 모양새는 틀림없이 인간의 말소리다. 아이들은 두 발로, 네 발로 뛰고 구르며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자기들만의 잔치판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방울이 하나 둘, 한 줄기 두 줄기, 조그맣게 방울져서 흩날렸다. 아이들은 애가 타서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혀를 길게 내밀어본다. 비를 내리는 요정이 있다면, 그는 필시 짓궂은 심술쟁이거나 인색한 욕심쟁이일지도.
그래도 아이들은 투정은 하되 불평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 말씀대로 그 모든 건 하느님의 은총일 테니까. 목을 축일 생명수를 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타게 쳐다보아도 물방울은 아쉬움만 남기고 이내 그치고 만다. 지우개로 지운 듯 하늘우물은 그 모습을 감추고 하늘은 다시 잿빛 장막에 둘러싸였다. 아이들의 세상은 도로 색이 없는 모노크롬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보다. 체념한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느님이든 요정이든 그 누구든 하늘우물에 사는 이는 변덕쟁이임에 틀림없었다. 어느날인가는 빛은 내리지 않고 대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린 적도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잔칫날의 시작이었다. 지저분하고 헤진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물을 맞으며 마음껏 마시고 몸을 씻을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도 말하지 않았던가, 하늘우물에서 내리는 빛과 물은 우리를 위한 하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다른 아이들이 물러간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움푹 파인 땅 위에 고인 물을 손으로 조심스레 떠올려 입술로 빨아들이기를 몇 번. 아이는 혼자 남은 채로 느리지만 신중한 몸짓으로 그러고 있었다. 손바닥이 진흙 투성이가 되자 옷에 슥슥 닦고서 아이는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우물이 있던 자리를 찾아봤다.
분명 저기 어디, 저쪽 어딘가일 텐데. 방금 전까지 환하게 웃던 하늘의 얼굴이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잠깐 그러고 있었는데도 목이 뻐근하고 뒤로 넘어질 듯 몸이 쏠렸다. 필경 아이의 등에 있는 큰 혹이 아이의 몸을 사정없이 땅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듯 잡아당기고 있을 터.

등이 무거운 이 아이는 일어서선 하늘을 볼 수 없기에, 네발 짐승처럼 엉덩이를 땅에 붙여야 고개를 위로 들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이리저리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는 건 온몸이 멀쩡한 다른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미처 놓치고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이의 몫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옅은 먹빛의 땅을 훑어보며 물의 흔적을 찾았다. 아이들이 모여 사는 높드리 전체는 말라서 굳은 개펄, 부드러운 진흙으로 뒤덮인 무채색의 세계였다. 절반쯤은 깎아지른 벼랑에 둘러싸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칠고 황량하며 하늘 너머로 희미해져 그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은 바위산에 가로막힌 땅과 바다의 틈새. 그곳엔 하늘도 땅도 주위의 풍경도 잿빛 가득한 고요와 침묵의 장막에 둘러싸여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무색무취의 정경만이 있을 뿐.

하지만 거기엔 하나가 더 있었다. 커다란 양파, 소라고둥, 피라밋, 그리고 뿔이 있었다. 땅은 완만하고 평탄했으나 주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돌기들이 솟아올라 짙은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열 여남은 정도 되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손을 맞잡고 늘어서도 반도 감싸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바위, 혹은 작은 산이 수없이 흩어져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각뿔, 원뿔, 양파, 고둥 모양. 크기와 모양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땅에 난 뿔들은 아이들의 척박한 환경을 상징하는 듯 무섭고 성질 고약해 보였다.

간신히 갈증을 달랜 아이는 무거운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등에 난 혹은 조그맣고 가느다란 아이에겐 너무 크고 가혹한 징벌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양파' 아래에 모여 있었다.

"꼽등이, 빨리 이리 와."

대장격인 불룩이가 아이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등이 곱아서 꼽등이, 배가 불룩 나와서 불룩이.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자기들끼리 생긴 걸 보고 지어 불렀다.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까먹고, 이내 부르기 쉽고 떠올리기 쉬운 자기들끼리의 호칭에 익숙해졌다. 주위의 사물도 마찬가지 이유로, 양파 처럼 생긴 바위는 양파가 되었고, 폴짝폴짝 뛰어 다니는 벌레는 폴짝이가 되었다. 맨 처음 발견하고 먹은 아이가 '푸앗!'이라고 소리치며 뱉어 내었다는 이유로 푸앗이 된 과일, 긴 콧물을 늘 흘리고 다닌다고 코줄줄이, 배꼽이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배툭이, 앞니가 부러져서 웃을 때면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고 쉭쉭이…… 모든 이름은 아이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생겨나고 불렸다. 아버지마저 없이 아이들만 남은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게 그랬다.

"너도 이리 와서 땅을 파. 벌써 쉭쉭이가 지렁이랑 물렁이를 몇 개 잡았어. 여기 놈들이 모여 사는 소굴이 있나봐."

몇몇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양파의 그림자 아래 거무칙칙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겉의 말라굳은 흙을 조금만 걷어내면 이내 거칠고 축축한 진흙이 살결을 드러내었다. 아이들은 조금씩 쌓이는 경험을 통해 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 아래의 흙이 부드럽고 물기가 많다는 걸, 그런 흙 속에 벌레나 먹을 만한 생물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걸 알았다.
아이도 그들 가까이로 와서 양파의 거대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서 땅을 손가락으로 긁어내고 돌을 주워 할퀴었다. 등에 혹을 기대니 한결 편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어 좋았다. 왜 진작 이러지 않았을까? 몸이 굼뜨고 느려서 늘 구석자리를 차지하던 아이는 우연히 벽의 울붕불퉁한 표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움푹 들어간 곳에 등의 혹을 갖다놓고 앉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로 아이는 근처에 벽이나 조그만 바위가 있으면 그쪽에 붙어 앉곤 했다.

"게으름피지 마, 꼽등이. 너도 저만큼 잡지 못하면 오늘 저녁은 굶을 줄 알아."

대장격인 불룩이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쉭쉭이와 절뚝이가 잡아놓은 작은 생물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게, 지렁이, 민달팽이…… 아이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아궁이에서 저것들을 구워먹고 살았다. 불룩이 자신은 아버지처럼 다른 아이들을 닦달하면서 불룩 나온 배를 흔들면서 어슬렁거렸다. 꾀 많은 아이들은 갖가지 모양의 돌을 모아서 그걸로 땅을 파고 파헤쳤다.

아이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마도 뺨도 온통 검댕을 뭍힌 듯 진흙 투성이. 팔다리가 저리고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아이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하늘로 향한다. 하늘우물은 언제 또 나타날까. 요 며칠은 비가 너무 뜸해서 목마름을 참기가 힘들었다. 많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타나 물을 뿌려주던 하늘우물.
그럴 때면 작은 웅덩이가 생겨나기도 했고, 아이들은 아예 그 근처에 죽치고 앉아서 우물이 열리길 기다리곤 했다. 누구도 정확하게 가리킬 순 없었지만, 하늘우물은 아무데나 생기는 게 아니라 몇 군데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둥과 양파가 아이들의 잠자리였다. 아버지는 그런 곳에 마른 풀을 모아 잠자리를 만들고 바위의 겉에 덮인 흙을 파내어 아궁이를 만들어주었다.

잿빛 하늘에 금이 간 듯한 무늬가 떠오른다. 그 무늬는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움직이며 모양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구름이라 부른 커다란 덩어리가 바다 저편의 하얀 수평선을 향했다.
아이의 시선이 구름을 따라갔다. 저 구름은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이 있다고 아버지는 얘기했다. 저 하늘지붕에 닿을 정도로?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은 왜 높이 떠 있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너희가 더 크면.
단지 그런 얼버무림 뿐. 구름은 언젠가 비가 된단다. 조그맣게 덧붙인 한 마디. 하지만 비는 하늘우물에서 나오는 건데?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아버지는 웃음으로 넘기려 한다. 저 구름은 너무 작잖니. 그리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왜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요? 이쪽으로 와서 비가 되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름은 그 사이에 더 멀리, 아이들의 땅에게서 더 먼 곳으로 떠나간다.

나도 데려가면 좋으련만. 아이는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이 야속했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실어다주었으면. 저쪽은 하늘이 하얗고 바다는 푸르게 보였다. 구름도 하얗고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게 가득 있을 것만 같은데. 아이의 마음은 구름을 따라 하늘지붕에 닿으려는 듯 두둥실 떠올랐다.

저 높디 높은 구름 위에서 본다면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앉은 아이들은 모두 뻘밭 위에 놓인 돌멩이처럼 보이겠지. 땅이고 바위고 모두 하나가 되어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 그저 검은 땅과 잿빛 바다만이 보이겠지. 이토록 작은 땅덩어리 위에, 벌레를 캐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문득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힘 없이 드넓은 하늘지붕 위를 마음껏 달려봤으면. 하지만 아이의 몸은 너무 무겁고 등에 얹혀진 혹의 무게는 감당하기에 벅차다. 잠깐이나마 꿈결처럼 떠올랐던 마음이 억센 손에 이끌려 내려오듯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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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의 일정이 끝난 금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3월이 끝나고 봄이 개화하는 남해는 이미 은혜로운 따스한 햇살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들 음료수 캔을 들고 재잘거리며 즐거운 하굣길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여양은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모든 일은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해결된 문제는 없었다. 금윤의 혐의를 벗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진범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밤 이후부터 3일 연속 교내신문은 특종으로 가득했고 학생들은 소문에 파묻혀 허우적거렸다. 다음날 메이브는 약속대로 직접 신문부를 찾아가서 여왕 선발에 나가지 않을 것을 밝혔고 그 즉시 신문 1면 전체를 차지하는 중대 기사로 실리며 전교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후보 등록 이전부터 굳어져 있던 양강구도가 일시에 무너지자 메이브를 지지하던 이들의 충격과 혼란은 상당했다. 자연히 왕당파가 힘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에 반발하던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현상이 빈나련 이외의 후보들에게는 기존 메이브가 가진 막강한 지지 세력을 모아서 흡수할 수만 있다면 지지도를 일거에 급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메이브의 미모와 카리스마가 학생들에게 일종의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왔고 외국 유학생이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오는 인기도 큰 지지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든 후보들의 세력 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은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날엔 여양 자신이 교장의 대리인으로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원나영이 새벽 1시에 기숙사를 나가서 산책을 하던 중 살해되었고, 범인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시신을 갖고 들어와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LXG 일원의 이름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전날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사회에선 이미 자살로 발표했고 부모님이 와서 시신을 인수해간 후였다. 여전히 영화궁은 남자의 접근을 막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바람에 배에서 내리려는 나영의 아버지와 이를 막는 직원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씁쓸한 뒷이야기를 남긴 채로 말이다.

그렇게 사건을 일단락 했다고 여긴 상태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고 결국 경찰 수사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이에 덧붙여 여양은 인터뷰를 통해 지난번 승미와 의견 일치를 본 문제를 언급했다.
전날 메이브가 후보 사퇴를 밝히면서 초월랑이 졸업을 하지 않아 새 여왕 선출이 불가능하며 그는 이사회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 데 이어서, 여양은 금윤이 받은 고통을 예로 들며 학생을 감옥에 가두는 비인권적인 처벌을 하는 현재의 상황을 외부로 알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이사회의 시정과 원나영 사건을 경찰에 신고할 것을 요구하며 이사회를 거듭 압박했다.

일순 궁지에 몰린 듯 보였지만 다음날 이사회는 대변인격인 교무주임을 통해 초월랑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학적상으로는 졸업을 한 것으로 처리되어 문제가 없고 여왕의 증표[여왕으로 선출된 이가 받는 세 개의 장신구로 망토, 왕관 모양 뱃지, 홀(笏)을 말한다]도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고 반박했고, 새로운 결과에 대해서는 학생 개인의 조사일 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만을 거듭했다. 학생들의 이사회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지만 그들은 눈도 꿈적하지 않은 듯 보였다.
여양은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바로 새 여왕이 선출될 때까지 말이다. 지금의 자신에겐 아무런 힘도 없고, 이사회와 접촉할 수단도 방법도 없다. 학생 중에서 이사회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징벌방에 감금되기 위해 지하로 끌려가는 걸 제외한다면 여왕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한 세 번째 특종이 바로 여왕님의 신문 발표문이다. 스스로 여왕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으니 앞으로는 후보로 거론하지 말아줄 것, 대신 곧 선거활동을 시작할 마트료나 후보를 지지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나이프 사건’의 인질로 얼굴은 알려져 있었으나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1학년생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선거 정국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졌다. 더구나 메이브의 낙마로 늘어난 부동층이 주목하던 후보 중 하나였던 여왕님이 자기 대신 밀어준다는 참신한 후보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자 그야말로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다음 주에 발표되는 지지도 순위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두각을 나타낸 후보에게 부동층의 쏠림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음 주부턴 우리도 선거 운동 뛰어줄 테니 걱정 마!"

지란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트료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실어준다는 것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지만, 노혜는 지란이 과연 도움이 되어줄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내가 못 미덥다 이거야? 영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데?"
"앗, 아, 아냐. 난 그저……"
"그래, 나보단 네가 더 도움이 되겠지! 가슴이 확 트인 옷을 입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거야. 남녀공학이었으면 남자애들이 줄을 서서 받아갔을 텐데 참 아쉽네!"

그렇게 말하면서 남의 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어 움켜쥔다. 하지만 손아귀에 넣기에는 너무 커서 그저 손을 얹기만 할 뿐이었다.

"아악!"
"이 기분 좋다는 감탄사하며! 역시 넌 내가 만져줄 때 제일 기뻐하는 것 같아, 으흐흐!"

지란은 노혜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뒤틀자 더 신이 나서 손을 움직였다. 그 서슬에 책을 읽으며 뒤따라오던 체링이 노혜의 등에 부딪혀 비틀거렸지만 지란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체링은 못 봐주겠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책등이 파란, 앞장에 손가락 끝이 그려진 하얀 문고본을 주머니에 넣고 마트료나와 힘을 합쳐 둘을 떼어놓기 위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이 그 소란을 벌이는 동안에도, 여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될 선거전. 선거 전략이며 연설이며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걷던 도중 문득 자신의 앞을 걸어가는 여학생의 모습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싶었는데 기억이 되살아났다.
CCTV의 영상, 밤 12시 이후로 나간 모습이 없는데도 새벽 6시 이후에 기숙사로 들어온 모습만 찍혔던,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의 소녀.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인데, 왼손을 다쳤는지 붕대를 매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탄력이 있어 보이는 붕대. 여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빨리 하며 접근하고 있었고, 주위의 눈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그 소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이미 소녀의 왼쪽 손등과 손목을 거쳐 팔꿈치 아래쪽까지를 덮고 있는 붕대에 꽂혀진 채였다. 그래, 이 정도 너비라면 딱 맞겠어……. 여양의 뇌리에 원나영의 목에 난 이중의 자국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가상의 영상이 흘렀다. 목의 상처 위에 저 붕대를 얹어본다. 한 바퀴 감아본다. 딱 들어맞는다. 붕대의 양끝을 잡아당기는 작지만 억센 손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소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등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언젠가 식당에서 보았던, 화상을 당해서 머리로 얼굴을 가렸다는 그 아이였다. 자신과 같은 1학년생이라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신문부의 승미가 말해준 덕분에 그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왼손도 화상으로 다친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는 그날 밤의 일이 더 궁금했다. 밤새 어디에 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것일까.
그걸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커먼 장막으로 가려진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혐오감과 공포감을 자아내었다. 그때 느낀 충격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왜 이 아이를 봤을 때 그렇게 놀랐는지, 그리고 지금도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이성을 초월한, 좀 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검은 커튼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직 코끝과 입술의 일부, 그리고 왼쪽 눈뿐이었다. 오른쪽 얼굴의 반 정도는 왼손과 마찬가지로 붕대로 감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왼쪽 눈이 여양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메이브나 돌로리스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 끝이 저렸다.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어.’

입이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그 입이 당장 좌우로 죽 갈라지며 상어의 것과 같은 송곳니를 드러낼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건넨 한 마디.

"오랜만이야."

그 말만 남긴 채 석상처럼 굳어진 여양을 남겨두고 소녀는 유유히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고가 정지한 듯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여양은 두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하다니, 이상했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자신은 그를 알고 있고, 그도 자신을 알고 있다. 둘은 언젠가 만났던 사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상대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말은 여양 자신이 무심코 꺼낸 말을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잘 있었니?’

갈색 벽돌로 몸을 감싼 기숙사 건물을 보며 떠올린 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연스레 속으로 중얼거린 한 마디. 처음 간 장소에서 처음 본 건물을 보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양은 분명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양은 자신이 이곳을 알고 있고, 머리카락과 붕대로 얼굴을 가린 그 소녀를 알고 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서운 무언가가 혀를 날름거리며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알고 있어, 라고.

"왜 그래? 쟤랑 아는 사이야?"

지란이 아무 생각없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으나 여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보여준 한쪽 눈, 살짝 드러낸 이빨, 낮게 속삭인 듯한 한 마디 말이 마력을 발휘하여 석상으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이.

차가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작은 얼음 조각들이 몸 구석구석을 훑은 것만 같아서, 여양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떨고 있었다. 계절은 이제 완연한 봄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직 차가운 서리가 걷히지 않은 채였다.



-1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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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10-10-0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재를 마치며)
이로써 '화원의 여왕님'은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 연재되었습니다.
대충 책 1권 정도 되는 분량인데, 제가 처음 구상할 때 4권을 예상했으니 전체 이야기의 1/4 정도되는 셈이죠.
여러 사정에 의해 연재는 여기서 일단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인기가 없고 반응이 적기 때문이라는, 씁쓸한 결과 때문이지만, 글이 재미없는 것은 쓴 사람 때문일 테니 누굴 탓하겠어요. 그냥 받아들여야죠.

그러나 사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깔아놓은 복선과 뿌려놓은 떡밥이 그대로 남아 있고 초월랑 실종 등 수수께끼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긴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도 밝혀내지 못한 상태니까 말 다했죠 뭐. 미스테리라는 태그를 붙이는 게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목욕탕에서 잠깐 나왔던(엑스트라 수준;) 일본 유학생들이 대활약하는 등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입니다……만, 시간과 여력의 관계로 미뤄두게 되었네요. 안 되는 글 잡고 있느니 신작에 도전하는 게 낫거든요. 제가 전업작가도 아니고 출간이 보장된 상황도 아니니까.

아무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비록 접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도 놓고 싶지 않은, 애착이 담긴 이야기니까 언젠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재미가 있었다고 느꼈거나 뒷 이야기가 궁금해진 분이 있다면 피드백을 부탁드리며,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윤정애 2010-11-1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읽다가 사라지는바람에 겨우찾아서 이제야 재미있게읽고있는데 중단이라니 많이 서운하고 앞으로 벌어질일이 궁금하네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언제든 연제바랍니다. 즐겨찾기에 담아놓고 수시로 확인해볼까해요 그럼 작가님 겨울이오는데 감기조심하시구 좋은글 빨리만날수있기를 바랍니다.

pilza2 2010-11-12 20:11   좋아요 0 | URL
찾기까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따로 지우거나 감춘 적이 없어서 사라졌다는 말씀을 들으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언젠가는 반드시 연재를 재개할 생각이니 기대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윤정애님 같이 요청해주시는 분이 열 분만 있어도 당장 할 텐데 말이죠.;;;;

송민영` 2012-03-2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미있어 보이는데 이걸로 끝인가요? 인기가 없는 것은 이야기의 퀼리티 문제가 아니어 보입니다. 알라딘 말고 다른 곳에서 연재해보세요.

pilza2 2012-03-27 20: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더 좋은 반응을 받을지 모르겠네요. 판타지가 아니니 판타지 소설 사이트에서 연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무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multir 2013-04-2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보고 갑니다. 언젠간2부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애써준 여양을 앞에 두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울 정도로, 마트료나는 초월랑을 생각해왔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 LXG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았어. 여왕이 되고 싶어서 욕심을 내는 사람은 절대 여왕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 여왕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착하고, 모든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리고 내가 아는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마트료나 바로 너야. 너만이 될 수 있어. 네가 말했잖아? 초월랑을 동경한다고. 그에게서 바라던 미래를 보았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비밀이라고 한 결심이 있었지? 그게 바로 이거야. 너를 여왕의 권좌에 앉히겠다는 거.”

생각해보면 여양은 늘 자신의 곁에 있었다. 곤란하고, 외롭고, 슬프고, 힘들 때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위로해주고, 달래주고, 웃게 해주었다. 어둠을 밝혀주었다.

그랬는데, 자신은. 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자신은.

“그렇게 굳은 표정 짓지 마. 넌 나를 대신해서 얼굴만 내미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내가 네 이름으로 권좌에 대한 도전장을 내미는 셈이니까, 너무 부담 가지진 마.”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아팠지만 마트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위해 헌신한 이 사람을 마주본다. 참으려고 해도 눈가가 흐려진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솔직히 떨리고, 자신이 없어……. 메이브 선배가 물러났다고 해도, 전임 학생회장님이 있고, 북도그룹의 3세가 있고, 쟁쟁한 선배들이 후보로 나와 있는데 내가 나간다고 해도 잘 될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내 몫이니까. 너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만 믿고 있어. 나를 믿고 따라오기만 해줘. 반드시 너를 여왕의 권좌에 앉힐 테니까.”

마트료나는 어느새 눈을 촉촉하게 적신 눈물을 소매로 훔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를 믿을게.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그걸 원하고,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도 네가 원하는 걸 원하고 네가 믿는 걸 믿을 거야. 그럴 거야. 왜냐하면 널 믿으니까.”

“나도 널 믿어. 그리고 널 원해. 하지만 넌 나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돼. 그러기에 너는 너무 아깝거든. 그래서 난 너를 여왕으로 만들려는 거야.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프고 쓰라리지만, 내가 널 독점하는 건 그보다 더한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믿음. 굳건하지만 너무나 간단히 도망가는 한 마디. 다시 움직이는 시선. 여양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한다. 말을 하지 않고 담아두기엔 너무나 크게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내게 작은 부탁이 있어. 들어줄래? 내 작은 욕심이라고 해도 좋아. 꼭 들어줘.”

마트료나는 무슨 부탁이냐고 되묻지 못했다. 너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여양의 두 손이 마트료나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고, 서서히 목으로 올라왔고, 가늘고 부드러운 목을 쓰다듬듯 거슬러 올라가, 양 뺨을 가볍게 감싸 쥐고는, 그 자세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이마가 혹은 코가 부딪히겠다고 생각한 순간, 두 사람이 맞닿은 곳은 이마도 코도 아니었다. 입술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바람의 소리도 벌레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숨을 죽인 비상등의 깜박임과 달과 별의 숨소리만이 있었다.

여왕님은 그렇게, 자신의 첫 키스를 마트료나 M. 불가코프에게 바쳤다. 비록 마트료나의 첫 키스 상대는 그가 아니었지만 그 사실이 자신의 감정을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가벼운 충동과 욕심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상대에게 바친다는 증거로 마주 댄 입술이다. 그래서 숨소리마저 가라앉은 그 조용한 밤에, 눈을 감고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맡긴 그 모습은 마치 고결한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군주의 앞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기사처럼, 그의 어깨에 검을 얹고 자신의 기사임을 선언하는 군주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며 자신의 체온과 숨결과 마음과 영혼을 남김없이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둘의 숨결은 하나로 섞이고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서로의 영혼을 이어주리라.

그 순수하고 신실한 감정은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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