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야, 꼽등이 너! 누가 자랬어!"

불룩이의 성난 목소리가 꼽등이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듯 인상을 쓰며 아이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허둥지둥 땅을 파헤쳤다. 하지만 불룩이는 그런 우수룩한 행동만으로 넘어갈 아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잡아놓고 조는 거야, 응?"
"아, 아니. 안 졸았어. 그냥 잠깐 생각하느라……."

불룩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의 주위를 훑어봤다. 애초에 보나마나지만, 늘 굼뜨고 둔한 꼽등이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꼽등이가 건진 건 하나도 없었고, 발치에는 돌로 그린 둥글둥글한 무늬 뿐. 구름이라도 그리려던 것일까? 심술이 난 불룩이는 발로 돌을 하나 걷어찼다. 깜짝 놀란 아이가 고개를 들자 그 겁먹은 동그란 눈망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같이 열심히 저녁거리를 찾느라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구석에서 낙서하고 졸고 있고 말야. 도저히 안 되겠어. 너에게 벌을 줘야겠어."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꼽등이는 얼른 빌기 시작했다. 제발 밥을 굶으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그것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결정권을 쥔 불룩이의 미소는 먹잇감을 잡은 포식자의 것이었다. 뒤에서 절뚝이가 소리쳤다.

"대장, 저 쪼삣 위에서 굴리자. 몸이 둥그러니까 잘 굴러갈 거야."

불룩이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끝이 유난히 뾰족하고 경사가 급해서 쪼삣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그쪽에 있었다. 종종 먹을 것을 빼돌려 혼자 먹거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벌줄 때 저 쪼삣 꼭대기에 올려놓고 내려오게 시키곤 했다. 아무리 애를 써서 조심스레 내려오다가도 한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 가파른 경사를 굴러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흐흐, 불룩이가 다시 꼽등이를 쳐다볼 때는 얼굴이 이미 기대감과 장난기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을 치고 있었으나, 어느새 불룩이의 심복처럼 움직이는 배툭이와 절뚝이가 아이의 양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불룩이의 손가락이 아이의 얼굴을 향했다가 쪼비의 꼭대기로 움직였으니, 형벌의 선포는 그토록 간단했다. 울고불며 잘못을 비는 아이의 외침은 들어주는 이 없는 진흙 위로 흩어지고.

덩치 큰 두 아이에게 팔을 잡혀서 아이는 억지로 쪼삣의 꼭대기까지 끌려 올라갔다. 불룩이는 아이들과 함께 아래에 모여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등의 혹 때문에 웅크리고 앉으면 정말 동그랗게 보이는 아이였기에, 공처럼 잘 굴러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배툭이와 절뚝이가 길쭉한 나뭇가지로 바닥을 찍으며 무사히 아래로 내려오자 불룩이는 꼭대기에서 반쯤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아이에게 외쳤다.

"자, 꼽등아! 거기서 몸을 공처럼 말아서 굴러 내려와. 그러면 오늘 잘못을 용서해주고 저녁도 나눠줄게. 안 그러면 넌 오늘 밤새 거기서 밥도 못 먹고 그러고 있어야 될 거야."

아이는 입 안 가득히 머금은 듯 울음을 세차게 토해내었다. 저 모습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누구도 불룩이 자신에게 반항하거나 덤벼들 생각을 못할 거라는.

꼽등이는 목이 메일 때가지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이런 일은 없었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나면 늘 아버지가 잘잘못을 가려주었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내었다. 불만을 가지는 아이는 없었고 잘못한 아이도 아버지의 엄한 꾸중을 들은 후에는 다함께 밥을 먹으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곤 했다.

아버지. 속으로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목이 막혀서 목소리는 나오지도 않았고 들어줄 사람도 더는 없다. 아버지는 죽었어. 죽는 게 뭐야? 영원히 답을 들을 수 없을 허무한 자문. 죽으면 어떻게 돼? 아버지는 흙 속에 있다. 흙을 파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을 누이고 조그만 돌을 가득 모아 그 위에 쌓았다. 그건 아버지 본인의 부탁으로 한 일이었다. 이제 난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거야. 그게 죽음이지. 아버지는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일어나지 않는 아버지를 몇 번이나 부르며 몸을 흔들었는지 모른다.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나고 벌레들이 날아와 달라붙을 무렵 아이들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죽었어. 몸은 썩고 고약한 냄새를 풍겨. 먹고 버린 벌레와 짐승의 찌꺼기처럼. 죽음이란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거야.

쪼삐의 꼭대기에서 본 아이들은 손가락보다 작았다. 그렁그렁한 눈가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나니 주위 풍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탄식이 새어나온다. 위에서 올려다본 풍경은 이토록 새롭구나, 라고.
늘 보던 거무튀튀하고 단조롭던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크고 작은 뾰족하고 둥그런 바위들이 주위에 불쑥불쑥 솟아 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물결 같은 무늬를 그리며 마른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를 묻은 돌무덤도 희미하게 보이고, 짚과 마른 풀을 모아서 만든 잠자리도 보이고, 저 멀리 낭떠러지 너머엔 검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것마저도.

하지만 아이들의 거친 목소리가 아이의 정신을 빼앗아 현실로 돌려놓는다. 빨리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죽을지도 몰랐다. 다른 아이들도 아이의 등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엄명 때문이었다.
등을 바위에 살짝 부딪히거나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아이는 하루 온종일 고통을 삼키며 드러누워야 할 정도였고, 이를 안 아버지는 좀처럼 힘든 일도 시키지 않는 등 각별히 신경써주었다. 그때만 해도 참 좋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다소곳한 그때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사육사가 없는 아이들은 야생동물처럼 사납고 잔인했다.

누군가 던진 돌이 아이의 근처에까지 날아왔다. 몸서리를 치는 아이의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저마다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고 힘껏 던졌다. 몇 개가 아이의 귀에, 발목에, 엉덩이에 맞았다. 몸에서 가장 큰 부분인 등의 혹에 맞자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의 킥킥대는 소리가 귓전에 벌레소리처럼 맴돌았다.

아이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돌팔매질이 뚝 그쳤다. 얼이 빠진 듯한 아이의 얼굴에서는 표정변화가 사라졌다. 아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그 결과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처럼. 자신의 몸도 곧 썩고 냄새가 나면 아이들이 땅 속에 묻고 돌무덤을 쌓아주겠지.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이는 두려운 와중에서도 궁금했다. 그저 계속 잠을 자는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아이는 절을 하듯 몸을 수그린다. 이제 혹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것이고, 가파른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겠지. 나는 십중팔구 죽을 거야. 아이는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인지 혹의 무게 때문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어어.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아아! 그 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비명 비슷하게 바뀌었다. 비틀거리다 그만 주저앉아 고개를 드니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정신이 없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 후에야 자신의 몸이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누군가가 사정없이 흔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몸에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니 마치 쪼삐 전체가 몸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뾰족한 바위 덩어리가, 생명도 없는 돌덩이 주제에 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려는 짐승처럼 그렇게.

떨림이 가라앉을 무렵 쪼삐의 사분의 일 정도 되는 면적의 옆면에서 모래 먼지가 피어오르며 자갈과 흙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이는 그제야 쪼삐와 양파와 다른 모든 바위 덩어리들의 참모습을 알았다. 그들은 그저 특이하게 생긴 바위산이 아니었음을. 긴 세월에 걸쳐 진흙과 돌에 뒤덮힌 채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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