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제1장 하늘만큼 그리운 꿈이 있다
검은 하늘에 조그만 구멍이 열렸다.
하늘우물로부터 새어나온 볕뉘가 검은 하늘과 뻑뻑한 공기 사이를 가로지르며 가느다란 빛줄기를 대지에 늘어뜨리자, 아이들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빛을 좇아 달려왔다.
그 소리는 틀림없이 기쁨에 찬 웃음과 환호성이고, 알아듣기 힘들어도 모양새는 틀림없이 인간의 말소리다. 아이들은 두 발로, 네 발로 뛰고 구르며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자기들만의 잔치판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방울이 하나 둘, 한 줄기 두 줄기, 조그맣게 방울져서 흩날렸다. 아이들은 애가 타서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혀를 길게 내밀어본다. 비를 내리는 요정이 있다면, 그는 필시 짓궂은 심술쟁이거나 인색한 욕심쟁이일지도.
그래도 아이들은 투정은 하되 불평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 말씀대로 그 모든 건 하느님의 은총일 테니까. 목을 축일 생명수를 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타게 쳐다보아도 물방울은 아쉬움만 남기고 이내 그치고 만다. 지우개로 지운 듯 하늘우물은 그 모습을 감추고 하늘은 다시 잿빛 장막에 둘러싸였다. 아이들의 세상은 도로 색이 없는 모노크롬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보다. 체념한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느님이든 요정이든 그 누구든 하늘우물에 사는 이는 변덕쟁이임에 틀림없었다. 어느날인가는 빛은 내리지 않고 대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린 적도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잔칫날의 시작이었다. 지저분하고 헤진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물을 맞으며 마음껏 마시고 몸을 씻을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도 말하지 않았던가, 하늘우물에서 내리는 빛과 물은 우리를 위한 하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다른 아이들이 물러간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움푹 파인 땅 위에 고인 물을 손으로 조심스레 떠올려 입술로 빨아들이기를 몇 번. 아이는 혼자 남은 채로 느리지만 신중한 몸짓으로 그러고 있었다. 손바닥이 진흙 투성이가 되자 옷에 슥슥 닦고서 아이는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우물이 있던 자리를 찾아봤다.
분명 저기 어디, 저쪽 어딘가일 텐데. 방금 전까지 환하게 웃던 하늘의 얼굴이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잠깐 그러고 있었는데도 목이 뻐근하고 뒤로 넘어질 듯 몸이 쏠렸다. 필경 아이의 등에 있는 큰 혹이 아이의 몸을 사정없이 땅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듯 잡아당기고 있을 터.
등이 무거운 이 아이는 일어서선 하늘을 볼 수 없기에, 네발 짐승처럼 엉덩이를 땅에 붙여야 고개를 위로 들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이리저리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는 건 온몸이 멀쩡한 다른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미처 놓치고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이의 몫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옅은 먹빛의 땅을 훑어보며 물의 흔적을 찾았다. 아이들이 모여 사는 높드리 전체는 말라서 굳은 개펄, 부드러운 진흙으로 뒤덮인 무채색의 세계였다. 절반쯤은 깎아지른 벼랑에 둘러싸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칠고 황량하며 하늘 너머로 희미해져 그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은 바위산에 가로막힌 땅과 바다의 틈새. 그곳엔 하늘도 땅도 주위의 풍경도 잿빛 가득한 고요와 침묵의 장막에 둘러싸여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무색무취의 정경만이 있을 뿐.
하지만 거기엔 하나가 더 있었다. 커다란 양파, 소라고둥, 피라밋, 그리고 뿔이 있었다. 땅은 완만하고 평탄했으나 주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돌기들이 솟아올라 짙은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열 여남은 정도 되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손을 맞잡고 늘어서도 반도 감싸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바위, 혹은 작은 산이 수없이 흩어져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각뿔, 원뿔, 양파, 고둥 모양. 크기와 모양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땅에 난 뿔들은 아이들의 척박한 환경을 상징하는 듯 무섭고 성질 고약해 보였다.
간신히 갈증을 달랜 아이는 무거운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등에 난 혹은 조그맣고 가느다란 아이에겐 너무 크고 가혹한 징벌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양파' 아래에 모여 있었다.
"꼽등이, 빨리 이리 와."
대장격인 불룩이가 아이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등이 곱아서 꼽등이, 배가 불룩 나와서 불룩이.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자기들끼리 생긴 걸 보고 지어 불렀다.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까먹고, 이내 부르기 쉽고 떠올리기 쉬운 자기들끼리의 호칭에 익숙해졌다. 주위의 사물도 마찬가지 이유로, 양파 처럼 생긴 바위는 양파가 되었고, 폴짝폴짝 뛰어 다니는 벌레는 폴짝이가 되었다. 맨 처음 발견하고 먹은 아이가 '푸앗!'이라고 소리치며 뱉어 내었다는 이유로 푸앗이 된 과일, 긴 콧물을 늘 흘리고 다닌다고 코줄줄이, 배꼽이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배툭이, 앞니가 부러져서 웃을 때면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고 쉭쉭이…… 모든 이름은 아이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생겨나고 불렸다. 아버지마저 없이 아이들만 남은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게 그랬다.
"너도 이리 와서 땅을 파. 벌써 쉭쉭이가 지렁이랑 물렁이를 몇 개 잡았어. 여기 놈들이 모여 사는 소굴이 있나봐."
몇몇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양파의 그림자 아래 거무칙칙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겉의 말라굳은 흙을 조금만 걷어내면 이내 거칠고 축축한 진흙이 살결을 드러내었다. 아이들은 조금씩 쌓이는 경험을 통해 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 아래의 흙이 부드럽고 물기가 많다는 걸, 그런 흙 속에 벌레나 먹을 만한 생물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걸 알았다.
아이도 그들 가까이로 와서 양파의 거대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서 땅을 손가락으로 긁어내고 돌을 주워 할퀴었다. 등에 혹을 기대니 한결 편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어 좋았다. 왜 진작 이러지 않았을까? 몸이 굼뜨고 느려서 늘 구석자리를 차지하던 아이는 우연히 벽의 울붕불퉁한 표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움푹 들어간 곳에 등의 혹을 갖다놓고 앉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로 아이는 근처에 벽이나 조그만 바위가 있으면 그쪽에 붙어 앉곤 했다.
"게으름피지 마, 꼽등이. 너도 저만큼 잡지 못하면 오늘 저녁은 굶을 줄 알아."
대장격인 불룩이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쉭쉭이와 절뚝이가 잡아놓은 작은 생물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게, 지렁이, 민달팽이…… 아이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아궁이에서 저것들을 구워먹고 살았다. 불룩이 자신은 아버지처럼 다른 아이들을 닦달하면서 불룩 나온 배를 흔들면서 어슬렁거렸다. 꾀 많은 아이들은 갖가지 모양의 돌을 모아서 그걸로 땅을 파고 파헤쳤다.
아이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마도 뺨도 온통 검댕을 뭍힌 듯 진흙 투성이. 팔다리가 저리고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아이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하늘로 향한다. 하늘우물은 언제 또 나타날까. 요 며칠은 비가 너무 뜸해서 목마름을 참기가 힘들었다. 많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타나 물을 뿌려주던 하늘우물.
그럴 때면 작은 웅덩이가 생겨나기도 했고, 아이들은 아예 그 근처에 죽치고 앉아서 우물이 열리길 기다리곤 했다. 누구도 정확하게 가리킬 순 없었지만, 하늘우물은 아무데나 생기는 게 아니라 몇 군데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둥과 양파가 아이들의 잠자리였다. 아버지는 그런 곳에 마른 풀을 모아 잠자리를 만들고 바위의 겉에 덮인 흙을 파내어 아궁이를 만들어주었다.
잿빛 하늘에 금이 간 듯한 무늬가 떠오른다. 그 무늬는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움직이며 모양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구름이라 부른 커다란 덩어리가 바다 저편의 하얀 수평선을 향했다.
아이의 시선이 구름을 따라갔다. 저 구름은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이 있다고 아버지는 얘기했다. 저 하늘지붕에 닿을 정도로?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은 왜 높이 떠 있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너희가 더 크면.
단지 그런 얼버무림 뿐. 구름은 언젠가 비가 된단다. 조그맣게 덧붙인 한 마디. 하지만 비는 하늘우물에서 나오는 건데?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아버지는 웃음으로 넘기려 한다. 저 구름은 너무 작잖니. 그리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왜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요? 이쪽으로 와서 비가 되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름은 그 사이에 더 멀리, 아이들의 땅에게서 더 먼 곳으로 떠나간다.
나도 데려가면 좋으련만. 아이는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이 야속했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실어다주었으면. 저쪽은 하늘이 하얗고 바다는 푸르게 보였다. 구름도 하얗고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게 가득 있을 것만 같은데. 아이의 마음은 구름을 따라 하늘지붕에 닿으려는 듯 두둥실 떠올랐다.
저 높디 높은 구름 위에서 본다면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앉은 아이들은 모두 뻘밭 위에 놓인 돌멩이처럼 보이겠지. 땅이고 바위고 모두 하나가 되어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 그저 검은 땅과 잿빛 바다만이 보이겠지. 이토록 작은 땅덩어리 위에, 벌레를 캐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문득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힘 없이 드넓은 하늘지붕 위를 마음껏 달려봤으면. 하지만 아이의 몸은 너무 무겁고 등에 얹혀진 혹의 무게는 감당하기에 벅차다. 잠깐이나마 꿈결처럼 떠올랐던 마음이 억센 손에 이끌려 내려오듯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