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흙과 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경사진 벽이 있었다. 쪼삐는 사람 혹은 어떤 존재가 만든 인공적인 건축물이었고, 그 위로 진흙이 덮혀 있어 바위산처럼 보였을 뿐이란 사실을, 아이는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어떤 집도 건물도 본 적이 없었기에, 저 아이들 외의 사람 역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유일한 어른이었던 아버지도 이제는 없고, 눈앞의 신비와 경이를 누가 가르쳐줄런지. 이 알 수 없는 노란 외벽을 바라보며 아이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의 싹이 벌써 커다란 싹을 틔워 두려움을 슬그머니 가려주었다.
짙은 황색의 벽돌로 이루어진 경사진 벽 한 가운데에는 문이 있었다. 모래가 잔뜩 뒤덮여 자세한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쇠창살이 둘러친 창문임에는 틀림없다. 문에서 계속 먼지구름과 흙더미가 성마른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몇 번의 흔들림이 경련처럼 이어지고 철제 문틀이 흙더미와 함께 앞으로 튀어나왔다.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모래 먼지 이외에는 움직이는 존재는 이제 없었다. 찰나의 생명을 얻은 듯 흙을 토해내던 쪼삐는 다시 바위산이었던 본래의 임무로 되돌아간 듯 긴 침묵에 빠졌다.
혼비백산이 되었던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때쯤이었다. 정말로 쪼삐가 살아서 움직이기라도 할 것만 같았는데, 껍질 일부가 벗겨지며 보여준 속살과 떨어져 나온 창문틀이 짧은 활동이 남긴 흔적이었을까. 한결 가라앉은 고소공포를 달래며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펴보았다.
이제 문틀이 빠져 나간 창문은 반원형의 구멍이 되어 있었다. 조금 지나자 연기 같은 흙먼지가 몽실몽실 새어 나왔고, 움직이는 물체가 구멍을 통해 밖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기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문에서 몸을 빼내었다. 문과 땅까지의 거리는 그의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으나 벽돌도 된 외벽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기에 미끄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어지럽게 널린 흙과 돌멩이, 바위와 자갈 때문에 그의 걸음은 느릿하고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꼭대기에서 그가 흙더미를 건너 평평하고 무른 마른 개펄로 무사히 몸을 옮길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늘 보아오던 아이들 외의 다른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었기에 그 모습,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사실 길고 거친 천으로 온몸을 가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한 후에야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팡이를 무른 땅 위에 꽂아놓고, 그 옆에 앉아서 양 손을 땅에 대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게 된 건 그 순간이었다. 아이는 멀리서나마 두건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조그만 얼굴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얼굴 주위에 일렁이는 머리카락의 물결을 보았다. 그건 아이에게 있어 낯설고 신비로우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아름다움이었다.
짙은 회색의 땅 위에 미친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바로 하늘우물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으니. 아이는 설명하기 힘든 자신의 마음이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임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
그 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이를 향했다. 거리 때문에 서로 또렷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아이는 상대의 호기심을, 그는 아이의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을 터. 수런거리는 소리와 거친 발걸음만 아니었으면 둘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만 같은 정경이었지만, 정지된 것처럼 보였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양손에 돌을 쥔 아이도 있었고, 겁먹은 아이는 덩치 큰 아이의 뒤에 바짝 붙어서 조금씩 따라오고 있었다. 대장의 체면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야말로 위엄과 권위를 보여줘야 겠다는 호승심도 생겨서, 불룩이는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세게 울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고 난 후에야 불룩이는 상대가 자신들과 비슷한 덩치의 작은 소녀임을 알았다. 커다란 두건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자기들보다 큰 줄로만 여겼던 탓이다.
소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건이 머리보다 위로 비쭉 솟아 있었을 뿐 키 역시 자신의 어깨 정도밖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두건 사이로 흘러나온 가늘고 긴 연녹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타고 쉴새없이 일렁였다.
아이들은 모두 여기서 태어나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란 지라 처음 만나는 낯선 인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불룩이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아이란 걸 확인하고는 괜히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뒤에는 충실한 심복 배툭이도 있지 않은가. 혹시 싸움이라도 나면 혼자서 열 명도 넘는 자기들을 이길 리가 없다.
그렇게 마음 먹으며 용기를 냈지만 역시 처음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넌 누구냐 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디서 왔는지 부터 물어야 할까. 그것보다 저 바위산 속에서 어떻게 나온 건지, 바위산 안에 어떻게 저런 집과 창문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일단 입을 열어보았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아…… 너는……"
"목이 마르구나. 마실 것을 주지 않겠니?"
소녀의 말이 더듬거리는 불룩이의 말보다 먼저였다. 낮고 단조롭지만 시냇물이 흐르듯 잔잔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 뭐? 물? 없어. 우린 하늘우물에서 줄 때만 물을 먹걸랑."
불룩이는 상대방이 갈증과 피로로 지쳐 있음을 알고는 한층 자신감을 얻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우리가 잡은 벌레랑 짐승들이 있지. 근데 그냥은 못주겠고, 그보다 넌 뭐야? 산을 뚫고 나온 거야? 저 바위산 속에는 뭐가 있는데?"
불룩이가 쌓였던 의문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붓자 역시 호기심이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아이들이 순식간에 달려와 불룩이와 소녀를 둘러싸려는 듯이 모였다. 침착한 눈동자로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던 소녀는 마침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지치고 목이 말라 이야기를 할 기운이 없단다."
소녀의 말에 아이들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소녀가 가볍게 손짓을 했으나 물러나는 아이는 없었다. 불룩이도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아이들의 반응에 힘을 얻고 다시 다그치기 시작했다.
"너 혹시, 저 바깥 세상에서 온 거야?"
아이들은 불룩이의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절뚝이가, 코줄줄이가, 쉭쉭이가, 헬쑥이가, 또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를 쳤다.
"바깥 세상? 바다 건너 산 너머 바깥 세상 말이야?"
"아버지가 말한 겁나게 큰 나라?"
"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이 엄청 많다는 곳에서 왔다고?"
"대장, 그럼 우리도 거기에 갈 수 있는 거야?"
"우와! 우리도 바깥 세상으로 갈 수 있대!"
"바깥 세상! 바깥 세상!"
어느새 아이들은 바깥 세상을 연호하듯 외치고 있었다. 불룩이가 조용하라며 몇 번이나 소리를 친 뒤에야 소란이 가라앉을 정도로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조용히 안 하면 저 꼽등이랑 같이 굴러 떨어지도록 만든다?"
불룩이가 주먹을 들어보이며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아이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불룩이는 물론이고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도 바위산 꼭대기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사실 본인도 자신에 대해 신경쓰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이곳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 이 상태 그대로 조용히 있어. 내가 대표로 물어볼 테니까. 어이, 너. 이제 말해봐. 너 정말 바깥 세상에서 온 거 맞아?"
그 목소리에는 궁금해서 물어본다기보다 동의를 구하는, 확신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소녀는 가만히 불룩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짙고 검은 아이들의 것만 보며 살아오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게 되니 본능적인 외경과 공포가 솟아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아무 말 없는 조그만 덩치의 소녀에게 압도되는 자신을 느끼며, 불룩이는 주위 아이들이 없었다면 진작 도망치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이 작은 높드리에서 나고 자랐구나. 그래서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고 있는 게야."
"빨리 묻는 말에나 대답해! 바깥 세상, 바깥 세상에서 온 거 맞지?"
"바깥 세상! 바깥 세상!"
아이들이 또 흥에 겨워서 대장의 경고도 무시하고 바깥 세상을 외쳐대었다. 소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곤 말했다.
"하늘우물…… 여긴 하늘우물 외엔 물을 얻을 곳이 없나보구나."
"아니면 넌 저 땅 밑에서 온 거야? 아버지가 그러는데 땅 밑에는 무서운 괴물들이 살고 있어서 실수로 떨어진 사람을 잡아먹고 산대."
다분히 두려움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아이들은 외침을 뚝 그치고 불룩이와 소녀의 눈치만 살폈다. 소녀가 흩어놓을 때까지 잠시 동안은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공기에 모두들 휩싸인 채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