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리라이팅 클래식 7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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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동네 중고서점에 가서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순수이성비판>을 구입해 책장에 모셔놓았다. 전원배라는 사람이 옮긴 책인데, 서문 몇 장 훑어보다가 듣보잡 단어들과 메마른 문장에 겁을 집어먹고 다시 책장에 쑤셔 박아버렸다.

 

 사실 좀 수준있는 인문학 책이나 철학책을 읽다보면 정말 지뢰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게 칸트다. 찝찝한 마음에 칸트로 검색해보니 백종현 교수가 새로 번역한 책이 나와 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다. 박봉 월급쟁이인 내가 결국 사놓고 나서 읽지도 않을 그 비싼 책은 개발에 편자일 뿐..

그런 책은 전문연구자나 전공자들, 혹은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헌책방에 가서 3000원 주고 삼성출판사 판을 사서 구색이나마 갖춰보려는 지적허영심으로 그저 만족하려 한다.

 그런데  그 삼성판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끔찍한 일이고 내 독서방향의 앞길에 꾸준히 칸트가 출몰할 것으로 예상되어 결국 진은영씨가 쓴 칸트철학해설서 한 권을 구입했다.

 

 진은영씨의 글은 예상외로 쓸만하다. 처음엔 다소 기교섞인 문체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읽다보니

적응이 되고  칸트철학의 주요개념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분은 시인이라고 하는데 소설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지난번에 한자경 교수의 <칸트철학에의 초대>을 읽었는데 그 책과 진은영씨의 이 책은 나같은 칸트철학 문외한이나 초보자들에게 유용하다. 이 두 권을 읽고 나면 앞으로 튀어나올 칸트에 대한 두려움은 좀 수그러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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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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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구입하지도 않는데 이 책은 주제가

주제인지라 오랜만에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구입해서 읽어봤는데 역시 실망이었다.

도서마케팅과 독서여론이 조작된다고 하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이 책은 겉만 번지르르 하고

속 내용은 한마디로 별볼일 없는 지루하고 따분한 책이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이

죽음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가는 과정은 한마디로 지루함 그자체다. 주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명강의 시리즈인 샌델교수의 "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때와 같은 흡인력이 없다.

 

 철학책 좀 읽은 분들은 이 책에서 얻을게 별로 없을 것이다.. 저자는 다음 책을 쓰기전에

출판사나 주위로부터  중언부언하는 자신의 글 버릇에 지적을 받을 필요가 있다.

 

 역시나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을 초반부터 들먹이며 지루한 설명을 이어가는 글을

따라 읽는 것은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었고 한 장을 다 읽기 전에 지독하게 잠이 쏟아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한 책이다. 몇 몇 장은 독특하고 재치있는 성찰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냥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박탈이론이라는 것이 꽤 유명한 모양인데 개인적으로 유치한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신을 물리주의자라고 선언하였는데 요즘 영미 분석철학의 물리주의는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을 읽는데 참고해야 할 것이다.

분석철학관련 책을 몇 권 접해보았는데 내게 실천적 함의를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 

 

 중세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다고 하는데 현대 철학도 물리학의 시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차라리 하이데거 관련 책을 읽는게 더 나겠다는 생각인데 하이데거의 죽음론이

내겐 더 큰 철학적, 실천적 깨달음을 주었다.

 

 이 책과 거의 비슷한 구성과 내용으로 된 예전에 읽은 국내서 하나가 떠오른다.

<떠남, 혹은 없어짐 죽음의 철학적 의미>, 유호종지음, 책세상.

이 얇은 문고판 책이 내겐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내용도 별로 차이 없는데 마치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이 문고판의 책내용을 뻥튀기한 것 같다. 물론 개인적 느낌이지만...

이 책도 이제 책장에 쳐박혀 오랫동안 먼지로 뒤덮힐 것이다. 앞으로 명강의 시리즈는

안 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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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라슈 2013-01-28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문득 들었던 생각인데, 미국 철학자 김재권은 일원론자, 혹은 물리주의자는 결국 환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 같은데 그 말을 인정한다면 이제 우리는 물질 혹은 자연에 도덕이나 윤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될 것이다. 김재권은 우리의 의식에서 감각질이라는 심성적 찌꺼기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나는 철학을 한다는 사람이 왜 굳이 의식을 심성적 찌꺼기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 못마땅하다. 의식을 두뇌로 환원할 수 있다면 의식의 기능을 모두 정확히 정의해야 되고 이 기능을 수행하는 실체를 찾아내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의식의 특정 기능들을 추려내서 정의할 수 있을까? 즐거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환원 실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모든 의식을 오로지 두뇌의 상태로만 환원하는 것은 정당한가?

물질에서 도덕과 윤리를 꾸준히 박탈해온 과정이 바로 근대화였는데 이제 이런 존재론이 인간에게 이로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자연에 도덕과 윤리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리고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말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중용의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를 자연주의적 오류로 몰아붙여 비웃는 짓도 어리석게 될지 모른다. 유물론 혹은 물리주의는 물질에서 도덕과 윤리를 설명해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이원론적 발상의 용처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한계가 바로 이것이다.데카르트식 실체이원론에 오염된 존재론을 정화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세워가야 한다.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 FTA의 지구정치경제학
홍기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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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2011년 여름), 한미FTA 번역 오류 문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을 때 읽은 책이다.  글 내용이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FTA를 반대하는 의견을 괴담으로 치부해서도  안되며, FTA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낙관론도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ISD조항에 대해서 물었다. 박근혜후보는 모든 국가간의 FTA조약에 들어있는 스탠다드 조항일뿐이라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지껄였다. 우리 기업의 미국 투자활동을 오히려 보호할 수 있는 조항이 아니냐고  반문을 던졌다. 공식만 달달외우고 다니는 얼음공주다운 대답이다.  그 정도 의견은 논술준비하는 고3수험생에게도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한 나라의 무역, 경제정책을 좌우할 사람의 식견치고는 참으로 간결명료하다. 세상 모든게 모두 그렇게 간단하고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FTA에 비판적인 이유는 우리 삶의 공동체 질서에 직 간접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주는 중대한 조약을 우리 정부는 성급하게 추진했다는 것 때문이다.

 

  FTA(free trade agreement)는 국가간에 관세를 철폐하고 무역장벽을 완화하거나 제거하여 모든 상품과 서비스, 투자의 국경 간 거래를 자유롭게 하는 협정을  말한다. 홍기빈씨가 2006년도에 출판한 이<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라는 책은  한국과 미국간의 FTA협정에서 투자자가 투자국가의 중앙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조항의 해악과 위험성을 알리고 한미FTA의 전면 재검토와 범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로 나온 책이다.

 

 구입한지 5개월이 지난 책인데 근래 한미FTA국회 비준 동의안의 심각한 번역상 오류문제가 불거저 나왔던 터에 완독하게 되었다. 나는 홍기빈씨의 경제관련 저작이나 번역서를 꼭 챙겨보는 편인데 일단 그는 주류경제학의 판에 박힌 원론적이고 보수적인 경제학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쉽고 재미있는 상식적이고 직관적인 경제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홍기빈씨의 저작물에서 진보성향을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요즘같이 자본과 시장이 사회질서를 공공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시대에 시장과 자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늘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이 책의 제목은 다소 무거워 보이지만 책은 쉽고 빠르게 읽혀진다. 한미 FTA협정 중에서 제 11장 “투자” 가 바로 이 책의 직접적인 타깃인 모양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한미FTA협정문의 원문과 번역문이 그대로 공개되어 있었다. 홍기빈씨는 이 11장의 “투자”조항이 바로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라는 치명적인 독소조항임을 강조하고 이 독소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 즉 ISD(Investor-State Dispute )는 투자자인 외국기업이(특히나 초국적 기업들)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 대기업이 한국에서 두부사업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였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날 한국 정부가 중소 두부 사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부사업에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제정책을 채택한다면 한국에서 두부사업을 영위하려던 외국투자자는 한국정부의 두부사업에 대한 대기업의 규제 행위로 인해 한국의 식품시장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마침내 외국투자자는 한국정부의 두부사업 규제로 인해 자신들의 투자에 심각한 손실이 발생했다고 여기고 엄청난 금액의 피해보상금을 한국정부에 청구하는 소송을 국제 중재 심판소에 제기한다. 이 소송은 단 한번의 중재심판만을 확정하고 만약 이 소송에서 패한다면 투자자가 청구한 금액을 즉각 보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물론 상상에 불과하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이 소송이 진행되는 중재심판은 공적재판과는 전혀 다른 원칙과 절차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중재심판의 원류를 중세 유럽의 상인법에서 찾고 있으며 이 상인법이 1990년대의 거대 국제 초국적 자본과의 결탁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FTA와 투자자-국가소송제라고 한다. 중재심판의 원칙은 국제법에 따르는 것도 아니며 또 한 국가의 공공영역이나 환경을 고려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로지 “투자자의 이익”을 국가가 직, 간접적으로 해쳤냐 아니냐만 따져보는 원칙만이 존재한다. 즉, 외국투자자의 정당하고 공정한 영업이익을 보장하지 않는 일체의 국가 정책이나 공공정책, 규제, 보호, 보조 등은 투자자의 투자활동과 권리를 해치는 것이므로 국가가 만일 어떤 직, 간접적인 조치나 정책으로 인해 외국투자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거나 손해를 끼친다면 투자자에게 보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투자자 보호의 의미는 외국 투자자가 투자대상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구조 전체에 걸쳐 돈이 될 만한 어떤 종류의 자산이건 취득하면, 그 자산의 수익성이 떨어지게 할만한 모든 종류의 제도적, 법률적, 행정적 변동을 막아야 할 책임이 국가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본다면 ISD조항이 포함된 한미FTA협정이 발효된다는 것은 일종의 대재앙에 해당된다.

 

 이 조항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국가의 공공정책과 복지정책은 외국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정부는 투자자들의 이익과 수익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려고 하지만, 국가의 공공정책과 복지정책, 환경정책은 필연 적으로 부의 임의적 제한과 이동, 재분배를 통해 달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외국 투자자들의 이익과 수익을 어느 정도 규제하고 제한하지 않고서는 어떤 공공, 복지 정책도 불가능해진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외국투자자들의 이익과 수익을 고려하지 않고는 국가정책을 수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외국투자자들이 한 국가와 동등한 실체로 등장하여 한 국가의 경제와 사회 질서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결국 주권양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홍기빈씨는 이 책의 말미에서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의 본질과 핵심이 바로 ‘법적 관할의 이동’에 있다고 한다. 투자자-국가 소송이 벌어지는 중재심판소라고 하는 곳은 정규적인 법체계의 밖에서 문제를 푸는 곳이며, 이곳을 지배하는 원칙은 오로지 분쟁의 조정, 그것도 오롯이 상업적 고려에 기반한 분쟁의 조정일 뿐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좀 과격하고 현실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제 중재심판소를 “몇 백억, 몇 천억에 달하는 돈을 놓고서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양측이 다시 몇 십 억원의 비용을 쏟아 부어 가며 법률회사를 앞세우고 서로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모든 주먹을 다 휘둘러 대는 곳”, 혹은 “ 두 당사자가 그냥 쇼부를 치는 곳”, 심지어 “이전투구, 개싸움의 장”이라는 표현까지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국제 중재절차의 실제사례들이 진행된 방식들을 살펴보면 이런 표현으로도 모자란다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가 자국과 외국 투자자 사이의 분쟁을 국제 중재 절차를 통해 해결한다는 데 동의한다는 것은 그러한 분쟁권의 법적 관할권을 완전히 국재 중재 절차소에 군말 없이 넘기고 자신의 고유한 권한인 법적 관할권을 포기하는, 중대한 주권양도의 사안이라는 저자의 논리와 결론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무리 협정문에서 예외 규정을 명문화한다 해도, 이 제도를 포함한 한미FTA가 발효되어 분쟁이 일어날 경우 협정의 세부적인 조항에 대한 해석과 예외규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중재심판소의 권한에 속하게 된다. 한국 정부는 주권국가의 존엄을 버리고 심판소라고 불리는 ‘사각의 정글’ 로 올라가 악착같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초국적 자본과 홀홀단신으로 ‘개싸움’을 벌여한 한다는 저자의 외침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 책의 저자인 홍기빈씨의 비판과 지적이 차라리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일어난 캐나다와 멕시코의 초국적 자본과의 싸움에 대한 생생한 사레를 읽으면서 홍기빈씨의 걱정이 기우임을 바라는 것은 냉정한 현실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리석은 생각이며 비겁한 현실도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 외교통상부 홍보 관계자들은 이 제도가 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며, 다른 국가들간의 FTA협정문에도 존재하는 표준적 스탠다드 사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떠벌리고 있지만, 그들의 설득에 타당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홍기빈씨가 소개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로 황폐화된 멕시코의 사회, 경제를 떠올린다면 정부 관계자들의 홍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공정성과 진실성을 상실한 눈먼 폭주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 들러 한미 FTA협정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재미있지만, 한편으로 분노를 치밀게 하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 책은 2006년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 제 11장 조항과 한미FTA의 11장 조항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이다. 한미 FTA는 2007년도에 타결되었는데 미국 측은 캐나다와 멕시코에 막대한 피해를 준 NAFTA협정문을 마치 붕어빵 틀에서 붕어빵 구워 내듯이 그대로 들고 와서 한국과 FTA 협상을 시작했고 한국정부는 일말의 검토도 없이 붕어빵 NAFTA 11장 협정문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전시작전권 이양에 적극적이었던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FTA 협상을 시작했고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지금은 한미FTA의 극렬한 반대자가 되어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고 기이하다. 이제 한미 FTA는 양국의 국회비준과정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국회 비준 전에 협정문에서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ISD)를 보장하는 11장을 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현 정부는 임기 전에 분명 한미FTA를 처리하고야 말 것 같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은 FTA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또 한미FTA로 인한 혜택이 있다 해도, 그 혜택이 다수의 서민들에게 곧바로 직접적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FTA자체를 무조건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나는 냉정히 인정한다. 그리고 막강한 미국과 초국적 거대 기업, 자본들이 강요하는 FTA를 거부하고서 대한민국이 독불장군처럼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세계경제 시스템도 아니다. 어차피 FTA를 추진해야 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보자는 거다. 이 책에서 소개된 것처럼, 실제로 호주와 미국의 FTA에서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 조항은 빠져 있다. 호주정부와 국민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참여로 그들은 이 조항을 FTA 협상문에서 아예 빼버린 것이다. 그들은 이 조항의 해악을 정확히 인지했고 호주정부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이 조항의 해악성을 널리 알렸다. 호주정부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나라 국민 중에서 이런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적극적인 홍보부족이 많이 아쉽다. 요즘 미국 의회에서 한미FTA비준을 적극 추진하는 뉴스들이 자주 들려온다. 우리나라는 국회 비준을 미루고 미국과의 추가협상이 필요한데 불행하게 남은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다. FTA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한 사고방식과 좀 더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FTA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반미로 몰아세우는 극단적 분열과 적대적 감정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사안과 상황, 혹은 이익에 따라서 누구나 친미적 성향을 가질 수 있고 반미적 성향도 가질 수 있다.


  당장 FTA비준이 되고 협정이 발효되면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우리 농업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다.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는 어이없는 논리는 여전히 막강하다. 세계1위 휴대폰 업체 노키아도 무너지고 있다. 삼성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삼성과 현대차가 없으면 나라 망한다고 곡을 하고 삼성과 현대차가 대한민국 국민들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협박이 횡횡한다.

 

 대기업과 국민들과의 관계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대기업은 국민들 먹여 살리는 시혜자, 국민들은 그런 대기업 덕에 겨우 먹고 사는 수혜자로 만드는 기괴한 논리를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대기업이 이 나라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대기업이 국민들 먹여 살린다는 논리는 절반의 진실이다. 우리 국민들도 대기업을 먹여 살린다. 대기업과 국민들의 관계는 상생의 관계이지 일방적 시혜와 수혜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서유럽 국가들은 식량 자급률이 대부분 100퍼센트에 육박한다.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농축산물의 생산량이 소비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돼지고기는 생산량이 국내 소비량의 50퍼센트 정도밖에 감당하지 못하고 소고기는 전체 소비량의 3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35퍼센트의 소고기는 한우가 아니라 국내산 소고기다. 즉, 국내산의 정의는 한국에서 생산된 소고기이므로 더 이상은 말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정육점에서 한우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가..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농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다고 해도 식구들이나 주변인들 나눠먹을 극소량의 생산량일 것이다. 환금성 작물의 단작은 장기적, 국가 안보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쌀밥만 먹고 사는 식생활문화를 벗어 난지 오래다. 하루하루 치솟는 밀가루 가격, 과자, 빵 가격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치솟는 물가에 만성화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빵을 먹어야 하고 소고기도 먹어야 한다.

 

 나는 일부 과격한 환경근본주의자들의 육식 금지, 가축 사육금지 같은 대책 없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들은 한마디로 무책임하다. 우리는 쌀밥도 먹고 빵도 먹고 고기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량주권을 고스란히 포기하면서도 겁내고 무서워하는 분위기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과연 FTA가 발효되면 더 값싸고 질 좋은 소고기, 밀가루, 콩과 쌀을 마음 편히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가? 어쩌면 당장은 그 낙관이 유효할지 모른다.


 나의 이런 전망이 비관적이고 부정적 시각임을 지적한다면 기꺼이 인정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비관적 전망을 희망으로 바꿀 노력을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고 반문을 할 것이다. 누구든 나의 이런 의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이 책과 글들은 그저 의미 없는 식자우환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비무환이지 식자우환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미래가 달린 중대한 결정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후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2년 작성

 

 

2015년 5월 현재, 홍기빈씨의 기우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바로 미국금융회사 론스타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5조원의 ISD 손해배상소송을 걸었고 아랍에미리트의 부호 만수르가 소유한 석유회사인 `하노칼 홀딩 비브이"사도 한국정부를 상대로 1,800억원대의 ISD 소송을 걸었다. 두 개의 소송은 한미FTA의 ISD조항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외국이 그동안 체결한 수많은 경제협정에 포함된 ISD조항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통적인 사실이다. 홍기빈씨의 표현대로 이제 한국정부는 국제중재심판소라는 사각의 정글로 올라가 5조원을 놓고 개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패소하게 된다면 국가예산 5조원을 고스란히 다국적 금융회사 론스타에게 갖다 바칠 수 밖에 없다. ISD가 얼마나 무서운 조항인지 론스타와의 재판결과가 나오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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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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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경 교수가 쓴 칸트철학 소개서 <칸트철학에의 초대>를 읽고 있다.

한자경 교수는 독일에서 칸트를 전공하신 분인데 쉬운 우리말로 어렵고 딱딱한 칸트철학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제목만 들어도 겁에 질리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같은 칸트철학을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는 분도 없을 것이다.

 

한자경 교수는 독일에서 칸트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서 다시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유식불교)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배움의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다. 나는 한자경 교수의 <일심의 철학>을 읽고 한자경 교수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 책에서 다룬 물리주의 비판글은 정말 대단했다.

 

 그러고 보니 학부시절에 한자경 교수의 철학수업 하나 들어보지 못했던 것은 불운이다.

그 불운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철학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한자경 교수가 수도권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지가 오래다. 좋은것은 늘 지나간 뒤에

알게 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칸트철학이라 하면, 막연히 어렵고 관념론적인 것이라 쉽게 다가갈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칸트라는 사람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철학을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초월적 관념론, 초월적 자아라는 것은 지금까지 많이 오해되었다는 느낌.. 도올이 그의 저서에서 자주 언급하는 칸트 철학.. 시공의 외재성, 절대성을 부정하고 인간 자체의 근거로 다시 태어난 시공과 절대적 자아라는 주제들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것인데 칸트가 살았던 당시의 유럽 과학지식을 뛰어넘는 칸트의 철학적 통찰력은 정말로 대단하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따라 절대적, 객관적 실체로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증명했고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객체가 아닌 말 그대로 "시공"(space time)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시공은 나의 인식(혹은 정신)과 어떤 관계인가?

시공은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인가? 아니면 그것은 그저 우리의 감각 인식의 작용이 만들어낸 허구인가? 

 

 칸트가 말하는 "선험"은 범심론적 세계관 같다. 서양문명을 흔히 물질문명이라고 하는데 서구적 전통에서 칸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론적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고어찌됐든 칸트와 헤겔의 이해는 앞으로 내 독서의 주요한 주제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철학관련 책들만 자꾸 읽다 보니까 소설이 재미없어졌다. 사실, 소설은 이미 오래전에 흥미를 잃어버렸는데 시시한 소설보다 이런 철학책들이 더 재미있다니.. 내가 이제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주제를 꾸준히 소화해 나가는 과정에 절대적 도움을 주는 책이 바로 국내 철학자들이 쓴 이런 이해하기 쉬운 좋은 책들이다. 한자경 교수의 <칸트 철학에의 초대>같은 책은 가까운 책장에 꽂아두고 원전을 읽을 때 헷갈리는 개념이나 용어가 나오면 다시 찾아볼 좋은 참고서다.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원전 번역서보다 이런 책이 칸트철학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유용하다. 칸트를 이해한답시고 아무런 준비없이 순수이성비판 원전에 달려드는 것은 아주 무모한 짓이다.

 

그런데 칸트와 헤겔이라는는 훌륭한 철학을 배출한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쩌다가 파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그런 어마어마한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이데거도 한 때 나치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하는데 아무튼 독일은 대단하면서도 끔찍하다. 일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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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궁리하는 과학 6
자크 모노 지음, 조현수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의 분자 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과학철학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받은 충격과 감동은 워낙 강력한 것이어서, 책을 완독하고 1주일이 지나서도 아직 책을 책장에 집어넣지 못하고 다른 책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인류의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자크모노의 과학 도그마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과학철학의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평범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바라본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그 평범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크 모노가 쏟아내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들은 내게 친숙하고 습관적이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주었고 그럼으로써 근본적으로 내게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나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면 친숙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어렵다. 그리고 그 친숙했던 세계관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 책은 내게 생명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안(開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왜 혁명적일까?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과 사상의 근원부터 파고들어 마침내 그 지식과 사상의 시초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류의 사상과 종교, 철학의 시원을 신(神)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로부터 연유했다고 주장하는 모노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공리(公理)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과학적 객관성이다. 그러나 모노가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의 실체는 내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과학적 객관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모노가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의 공리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과학에서 시작한 인과율과 필연적 자연법칙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노는 생명의 기원이 극도로 미세한 물질들의 우연적 조합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은 정확히 필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그 우연의 시작에 어떤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구상의 원시바다에서 최초의 생명이 우연히 발생하게 된 것은 마치 쓰레기장에 태풍이 휘몰아쳐 그 쓰레기들이 보잉747비행기로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마찬가지이거나 그 확률보다 훨씬 더 희박하다. 모노의 말대로라면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이 탄생할 확률도 거의 0에 가깝다.

 

 이 확률들은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들이 저절로 보잉747로 조립될 확률보다도 더 희박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한다면 얼마나 일어나기 힘든 것이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건들의 선험적 출현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에는 분명 생명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모노의 철학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은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인 존재임을 직시하자는 것이 모노의 주장이다. 우주에서 생명과 인간은 인간이 아는 한 단 한번 탄생했고 인류의 출현 또한 단 한번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써 그 자체로 모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고 하는 모노는 이제 그동안 인간존재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고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나 신의 의지에 의해 탄생했다는 종교적이고 물활론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자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 세계와 우주의 주인도 아니며 인간존재의 근원도 필연이 아닌 그저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차갑고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은 한 점의 티끌 보다 더 미미한 존재이며 한없이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관과 생각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불안하도록 만든다. 모노는 이 사실이 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성향과 상충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노는 운명의 존재에 대한 진한 향수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명에 대한 진한 향수애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과 사상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이런 운명에 대한 향수가 중세까지 서양을 지배했던 목적론적 세계관이었고 근대과학은 이 목적론적 세계관을 인과적 세계관으로 대체했다. 모노가 말하는 우연은 인과적 세계관의 절정이다.


  모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생명의 진화현상은 더욱 놀랍다. 보통 사람들은 진화현상을 생명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써 생명과 물질을 초월한 특정한 진화의 법칙이 존재하여 그것이 생명을 진화하게 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필연적 진화론을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노가 바라보는 생명의 진화 현상은 그저 러시안 룰렛게임처럼 양자적 요란의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

 

  즉, 생명현상의 본질은 진화가 아니라 DNA의 불변적 자기복제 시스템이며 진화는 이 DNA의 불변적 자기복제 시스템의 부차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모노의 의견이다. 이 모노의 의견은 DNA에서 RNA로만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만 가능하다는 정보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이라는 엄연한 생물학적 연구 성과로부터 뒷받침된다. 다시 말해 기후나 자연적 변화가 생물체 세포내의 유전자인 DNA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DNA를 구성하는 극미한 양자들의 우연적 요란이 DNA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DNA는 돌연변이를 낳게 되는데 이 돌연변이가 개체 생명으로 성장하여 환경과 조화하여 생존할 수 있다면 이 돌연변이가 곧 진화현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극미한 양자세계의 우연적 요란은 바로 양자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미시적 원자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뉴튼의 물리학처럼 거시세계에서 보이는 인과율과 기계론적 필연성은 미시세계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원자와 전자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확률게임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고전물리학의 최후를 장식했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분자생물학의 성과를 보면 아쉽게도 아인슈타인의 유언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생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정보의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이라는 모노의 주장은 혁명적이고 충격적이다. 진화란 유전정보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고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면 그동안 진화란 것은 생명체내에 내재된 고유한 필연의 법칙의 발현으로 여겨왔던 내 인식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는 또 하나의 혁명이다.

 

  이제 모노가 보여주는 생명의 참모습과 진실을 접하고 나면, 눈을 들어 창 밖에보이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새 한 마리도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툭하면 자연을 살리자, 환경을 살리자라는 오만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하리라. 인간은 이 우주의, 지구의 주인도 아닌 그저 길가의 풀 한포기와 같은 우연적 운명이며 자연은 더 이상 인간들이 죽이고 살리고 자시고 할 노예적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운명에도 무관심하다. 자연과 인간이 존재하는데 결코 어떤 목적이 있을 수 없음을 직시하고 나면 비로소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생명과 자연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의 운명이 결코 우주를 초월한 절대자가 미리 써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장의 부품들이 보잉747로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같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노는 분자생물학에 근거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지만 그가 의지하는 분자생물학이 결코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이 아님을 지적한다. 모노는 분자생물학에서 지식의 최전선, 즉 미지의 수수께끼 영역으로 최초 생명체의 기원, 인간의 중추신경계(뇌 포함), 유전암호의 기원 등을 들고 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단백질, 그리고 그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분자구조가 왜 그렇게 생겼고 그것이 어떻게 기원했는지, 또 그 아미노산의 분자구조 순서를 결정하는 DNA가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해 현대 과학과 생물학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책이 출간된 1970년 이후 40여년이 지났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궁이다. 21세기 블루오션은 바로 분자생물학이 될 것이다.

 

  모노가 설명하는 리보솜과 박테리아 퍼지 바이러스의 재구성,  단백질 분자들의 입체 특이적 결합력, 알로스테릭 효소의 피드백 촉매작용, 그리고 생체세포들 간의 합목적성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의지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리고 이 책의 본질을 모르고 독서를 시작했던 사람은 이 희한한 생명체의 작동방식과 진실을 소개하는 모노의 본심이 필경 초자연적인 의지와 운명을 끌어들이고자 함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오해는 순전히 모노의 글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모노의 글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하는 미스테리 소설처럼 독자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에 떨구어 놓는다. 그만큼 그의 글은 재미있다. 물론 약간의 모호함과 난해함이 매끄러운 독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모노의 글은 매력적이며 흥미롭다. 또 그의 글에는 이 짧은 독서평으로는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가 넘쳐난다.


   모노의 글을 읽고 초월적인 神的 의지의 출현을 바랐던 독자들은 모노의 철저한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했다. 그러나 모노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객관적 과학적 공리에 의지해 나간다. 그리고 그는 섣불리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의 문장에 우글거리는 “나” 라는 1인칭 주어의 반복적 등장은 확신에 찬 그의 문장에서 겸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한편의 지독한 도그마에 빠진 종교경전을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도그마 말이다.

 

  과학책으로써 이 책만큼 재미있는 책을 읽어 본적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노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위험해 또 하나의 과학 근본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모노의 일관적 태도와 객관적인 설득력에 근거한 압도적인 위력에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할, 아니 그렇게 생각할 그 어떤 이유도 필연성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세계가 어떤 원인자를 가져야 할 필연성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강력한 백신이다.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내가 읽은 책 중에 최고의 책이며 최고의 지적 희열을 제공한다.

 

 분자생물학에 생소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알로스테릭 효소의 메커니즘 설명부분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데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알로스테릭 효소 부분은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책의 전체적 내용과 모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만화로 쉽게 배우는 생화학>  김성훈 옮김, 성안당 출판사, p163~212

 <내몸안의 작은 우주, 분자 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저, 황소연 옮김, 전나무숲 출판사p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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