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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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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난 7월 23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인은 대장암. 8월 초 폭염이 한창일 때 그날도 습관적으로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접속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적힌 팝업창이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잘 못 본 것인가 싶어 인터넷서점 앱을 종료하고 다시 열어봐도 같은 팝업창이 떴다. 그가 죽었구나!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네이버를 열어 검색어를 넣어보니 대장암에 걸려 향년 68세로 별세했다고 한다. 비통한 심정에 잠시 묵념을 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제 더는 그의 신작 소설을 볼 수 없겠구나. 그의 소설 공장은 이제 문을 닫는구나. 그의 소설 덕분에 일본소설이라는 신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고 책읽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는 소설을 생산하고 신작을 내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읽는 속도보다 신작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였다. 물론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고 그의 작품을 부지런히 읽지 않았다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그래도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면 항상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소설이 소개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소설 창작은 24시간 365일 가동되는 반도체팹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더는 그의 신작 소설이 인터넷서점에 소개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허망하고 아쉽고 슬펐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106권의 단행본을 집필했다고 한다. 20대 중반부터 글을 썼다면 대략 45년의 필력인데 연간 2~3권의 책을 꾸준히 낸 셈이다. 그야말로 소설을 끊임없이 찍어내는 팩토리 수준이었다. 이렇게 다작을 한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 수준과 편차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 듯 하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망설임없이 구매한 최신작 <투명한 나선>을 단숨에 읽어치웠는데 오래전에 읽은 <나미야 잡화점>이나 <용의자 X의 헌신>만큼의 밀도있는 이야기로 인해 최근 가장 즐거운 독서 경험을 했다. 이번에 <투명한 나선>을 선뜻 구매한 동기는 그의 별세에 대한 일종의 조문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책 값 1만8천원은 큰 돈은 아니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의였다. 그의 작품을 읽고 단조로웠던 삶이 풍족해지고 즐거워지는 경험에 비하면 책값 1만8천원은 너무 싸게 느껴진다. 나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음원등을 저작권에 맞게 정식으로 구입하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일이 얼마나 큰 공력과 노력이 들고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와 좋은 글, 좋은 음악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들은 충분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을 살만한 어떤 이유도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쓴 어떤 작품을 골라도 결코 실망하는 일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국에서는 추리, 미스터리 소설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의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만큼 그의 작품은 읽는 재미와 중독성을 보장하고 밤을 새게할만큼 독보적이다. 그의 작품은 읽기 시작해서 중도에 그만두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읽지 않음이 있을진대 읽게 된다면 끝을 보지 않고는 그만두지 못하리라. 그가 이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 그리고 그가 없는 지금도도 그의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사실 일본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이외에는 아는 작품이 거의 없었고 오래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읽다가 질려버린 경험을 한 이후로 일본 추리소설이나 장르소설에 흥미를 잃었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곁가지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꾸역꾸역 읽고 있으니 시간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껍질처럼 끝없는 곁다리가 이야기가 이어지는 홍명희의 <임꺽정>처럼 <모방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소설 전체와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모래알 같았다. <모방범>을 읽는 내내 먼저 읽었던 페이지를 수시로 펼쳐서 앞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몰입도와 소설적 재미를 크게 떨어뜨렸다. 소설 읽기가 아닌 사전찾기나 색인찾아보기 같은 작업이 되어버린 <모방범> 읽기는 2권째 읽다가 포기해 버렸고 한동안 일본추리소설은 재미없고 지루해라는 선입견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다가 십여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시작으로 일본 장르소설에 새롭게 미친듯이 빠져들었다. 어렵고 복잡한 책들은 잠시 한켠에 제쳐놓고 일본소설 읽는 재미에 매료된 시기였다. 원래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고 장르소설이라 불리는 추리나 스릴러, 공포, 판타지 분야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부터 시작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13계단> 같은 작품을 읽고 나서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일본 소설이 많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다카노 아키아즈의 <제노사이드>는 방대한 전문자료를 토대로 한 지식오락물의 절정 그 자체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의 사랑과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깊게 파고든다는 점이 좋았다. 


 이런 미친 정신 나간 사랑도 있을까 할 정도로 극단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묘사한 <용의자 X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나는 추리소설을 가장한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 사랑의 형태와 변주의 극단이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수학이라는 이데아에 탐닉하다가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천재수학자이자 수학교사 이시가미. 어느 날 그의 이웃집에 이사 온 모녀. 이시가미가 탐닉한 순수에 대한 의지는 아름답고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순백은 늘 때가 타고 변색 되기 쉽고 맑은 물은 더러워지 쉬운 법. 소설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시가미의 헌신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한국에서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판 용의자x가 제작되었다. 방은진 감독,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 주연이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원작의 묘미와 의도를 잘 살린 수작이었는데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의 연기가 좋았고 방은진 감독의 연출도 좋았다. 이시가미 역을 맡은 류승범의 연기는 원작소설보다 더 잘 된 것 같다. 한국판 용의자x는 원작과 결말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판 영화 용의자x는 결말이 원작과 어떻게 다른지 집중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오버사이즈 무채색 양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에 도시락 가게에 들러 이요원이 파는 도시락을 수줍게 사서 털레털레 학교로 출근하는 지독하게 외로운 이시가미(류승범)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 가슴아린 캐릭터다. 내가 류승범의 연기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이 한국판<용의자X>를 본 이후부터이리라. <용의자X>에서 천재 수학자가 보여준 사랑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비현실적,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들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사람은 심지어 사람뿐만 아니라 로봇, 사이보그, AI와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용의자X의 헌신>처럼 맹목적 사랑 이야기 뿐만 아니라 딸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와 상실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후벼파는 <방황하는 칼날>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도 한국에서 정재영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국판 <방황하는 칼날>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딸을 가진 부모님들은 이 소설이나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게 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철없는 일진 고등학생들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 이야기.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체제에서 살 고 있는 우리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도 역시 빠르게 잘 읽힌다.


또 <새벽거리에서>에서는 탐욕적 불륜이라는 소재로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처절하고 집요하게 파묘해 나간다.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결말의 반전이 대단히 충격적이다. 작가는 불륜에 대한 호오를 말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마지막 몇 십장까지 통속적인 불륜소설처럼 보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 독자들 뒷통수를 무자비하게 후려친다. 결말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불륜은 희미한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처럼 불륜남녀가 동반자살을 하는 비극적 선택은 없지만 불륜이라는 행위 그 자체는 진짜 실감나게 묘사된다. 소설을 읽는 내 자신이 불륜의 당사자가 된 것처럼 들킬지 말지 조마조마하다. 영화로 제작되도 좋을 스토리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대표작 <나미야 잡화점>을 빠뜨릴 뻔 했다. 살아오면서 읽은 최고의 소설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이<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포함될 것이다. 읽으면서 눈시울이 무섭게 뜨거워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 소설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철도원>이후 처음이었다. 오락성과 작품성을 모두 겸비한 최고의 소설이다. 현실과 과거를 잊는 종이 편지라는 설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한국영화 시월애도 이런 설정이었음)요즘 종이편지는 공과금 청구서와 다를 바 없는 시대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편지에 사연과 이야기를 적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쓴 펜팔 편지처럼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미야 잡화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환상 편지에 희망과 사랑을 담는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놓았다. 일본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던 과거와 현대, 그리고 환광원이라는 고아원 출신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요즘 한국소설에서 잘 찾아볼 수 없었던 서사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재미와 진한 감동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작품. 누구한테나 추천하고 싶다.


이번에 읽은 <투명한 나선>은 혈통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얽어놓은 카르마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매력적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투명한 나선>인가. 책을 읽어 보신 분이나 앞으로 읽게 될 분은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의 제목 <투명한 나선>은 바로 DNA이중나선을 문학적으로 변형시킨 표현이라고 보는게 중론이다. 실제로 일본의 출판사에서도 <투명한 나선>은 DNA이중나선을 뜻한다고 한다. <투명한 나선>은 바로 생명과 혈통을 유전하는 물리적 실체인 디옥시리보핵산이 화학적 상보성으로 결합된 모습인 이중나선이다. 이 책의 내용이 자식을 보육원에 버린 한 여인이 수 십 년 뒤 그 아이를 다시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고 그 과정에서 혈통과 출생에 얽힌 사람들의 거짓과 탐욕, 핏줄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빚어내는 파멸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DNA 이중나선은 극미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물리적 실체여서 인간들의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이라 할 만하다. 이 투명한 나선은 보이지 않지만 혈통이라는 유전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하면서 인과 연이라는 업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고 창조하는 씨앗이다. 소설에서는 히데미라는 여인이 자신의 딸을 보육원에 맡긴 뒤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성취하지만 자신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딸을 찾아나섰다가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되는데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히데미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딸의 자식, 즉 손녀가 자신의 친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손녀를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는다. 이 상황에서 합리적 인간이라면 손녀가 정말로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친자확인 작업을 하겠지만 히데미는 그러지 않았다. 인간은 혈통이라는 결정론적 인연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지만 히데미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어떤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지만 히데미는 주저 없이 그 믿음을 밀고 나가 스스로 살인자가 되고 만다. 히데미라는 여인은 결국 유전적 핏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 매몰된 인물이었다. 그 매몰이 바로 투명한 나선이고 마음의 길이었다. 이런 설정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인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이미 동일하게 반복되었던 적이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할 날만 꿈꾸던 천재수학자 이시가미가 우연히 마음을 나눈 옆집의 여인에게 자신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는 어이없는 행동을 이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행위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선이라는 마음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가식 없이 진정으로 행동하고 뭔가에 미치도록 빠져든 인간이 가는 길은 투명한 나선의 홈이다. 종교가 없어도 모종의 믿음 체계는 모두에게 있기 마련이고 그 믿음이 인생의 토대가 되는 게 인간들이 가진 고유한 삶의 양식이다. 그 믿음은 자신만이 품은 고유한 이야기나 서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이 작품에서 히데미가 품은 이야기는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완전한 가족이라는 서사였다. 딸을 보육원에 버린 뒤 술집을 차려 크게 성공하지만 껍데기일뿐인 삶이었고 가짜였던 인생이었다. 히데미 자신이 꿈꾸던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끝내 키우지 못한 딸에 대한 죄책감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히데미를 움직이게 하는 추동력이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결핍된 존재다. 결핍을 깨달을 때 자신이 품을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크지 못한 자식을 평생 그리워한다. 부모님을 일찍 잃은 사람은 식당에서 부모님을 닮은 노인이 있으면 노인의 식사비를 기꺼이 부담하는 일도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다. 그런 결핍으로 인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순전히 인과적으로 결정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하고 확고한 자유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투명한 나선(이야기)은 아주 잘 이해되기도 하고 전혀 이해 할 수 없어 완벽한 부조리로 보일 때도 있다. 투명해서 훤히 보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보일 수도 있는 나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투명한 이야기 타래를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서로 얽고 풀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의 제목 <투명한 나선>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보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 작가이므로 작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반전이 있는 결말은 늘 독자에게 지극한 즐거움을 준다. 작가는 연관성이 부족한 사건과 이벤트를 레고블럭처럼 차곡차곡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전체적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데 이 과정을 그려내는 작업이 너무 능숙해서 천의무봉이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 이번에는 또 어떤 기막힌 설정이나 반전이 있을지 무척 설렌다. 무려 106권의 작품을 쓰면서 얻어진 내공이고 그를 미스터리의 대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SNS에서 우연히 본 글인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첫 문장을 쓴다, 그 다음 문장을 이어서 쓴다. 이 두 가지 과정을 무한 반복하면 소설이 한 편 완성된다” 정말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확인 할 수 없지만 그 두 과정의 무한반복이라는 작업 없이는 어떤 글이든 글이 나올 수 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두 과정의 단순 반복 작업 이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 십년 간 해왔던 이야기 만드는 비밀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많다. 시골길을 걷다가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오래된 옛집을 보면 그 집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다. 소설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가 허구라도 이야기로서 흠결은 전혀 없다. 이야기는 듣거나 말해질 때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마음을 울리거나 서늘하게 한다면 그 이야기의 가치는 충분하다.


 한 명의 작가가 세상을 떠나도 그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살아 생전의 인연으로 빚어낸 106권의 소설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말과 글이 세월이 지나도 이어진다면 그의 글도 잊혀지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잠시 같이 살았고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읽어서 더없는 행운을 누렸다. 아직 읽지 않는 그의 책이 많음은 다행인 것일까? 다시 한번 히가시노 게이고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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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혜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9
크누트 함순 지음, 안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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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90 년즈음, 북유럽, 노르웨이의 황무지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었다.

경상도 사나이처럼 무뚝뚝하고 억센 남자 이사크. 이사크는 아무도 없는 공유지에 들어가 혼자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나무와 풀을 베고 감자를 심고 염소를 기르고 오두막을 짓는다. 이사크는 힘이 좋고 부지런하여 순식간에 황무지는 각종 농작물로 가득차고 풍성해진다. 이사크는 집도 땅도 가축도 있었지만 일을 도와줄 하녀는 없었다. 친절하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목소리는 거칠어서 짐승 같았다. 그래서 혼자 살 수 밖에 없었다. 외롭고 고생스런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날 이사크를 도와줄 사람이 우연히 찾아왔다. 키가 크고 피부가 그을린 여자였고 큰 체격에 손이 단단한 서른에 가까운 여자였다.


이사크와 잉에르의 첫 만남을 묘사한 대목은 이 소설의 백미다. 투박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담담하게 그려내는 두 사람의 만남을 그려내는 대목부터 나는 이 소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잉에르랍니다"

"그쪽은요?"

"이사크요"

"이사크라, 여기 사시나요?"

"그렇지요,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삽니다"

"괜찮네요"

그녀가 칭찬하며 말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이 갖고 온 음식을 좀 먹고 그가 내놓은 암소젖을 마셨다. 그러더니 따뜻하게 싸 온 커피를 데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아늑한 시간을 보냈다. 자리에 누운 그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고, 그녀는 그에게로 왔다.


아침이 되어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고, 낮이 되어도 머물렀다.


여자의 이름은 잉에르였고 남자의 이름은 이사크였다.


 외로운 남자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여자에게서 흠잡을 것이라면 발음이 또렷하지 않고 언청이라서 늘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것뿐이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입술이 아니라면 그녀는 그에게 오지도 않았을테니, 그녀의 토순은 그에게에는 행운이었다. 그 자신은 어떤가. 그에게는 흠잡을데가 없던가? 수염은 뻣뻣했고 체구는 땅딸막했으며, 생김새는 울퉁불퉁한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흉측했다. 그는 언제라도 날강도로 변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잉에르가 도망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가 나갔다가 돌아오면 잉에르는 오두막에 있었다. 둘, 오두막과 그녀는 하나가 되었다.

                                                                                                                                   -p16-



 잉에르는 이사크와 같이 농장을 일구어 나간다. 둘은 어느새 서로 믿고 의지하는 동반자가 된다. 잉에르는 언청이였다. 그런 잉에르를 이사크는 땅처럼 사랑한다. 잉에르는 마을에 가서 자신이 키우던 소 금뿔이를 데려온다. 금뿔이는 송아지 은뿔이를 낳고 잉에르도 아이를 여럿 낳아 땅의 혜택으로 키워간다. 이사크 부부는 늙어 마침내 대농장의 영주가 된다.


 소설에서 끊임없이 묘사되는 것은 이사크와 잉에르 가족의 노동이다. 그들은 황무지에서 풀을 베 건초를 만들고 돌을 걷어내고 나무를 자르고 염소젖을 짜 치즈를 만들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오두막과 가축우리를 만든다. 일상의 노동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노동은 수고롭고 고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기찻길의 침목처럼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자 고갱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고단했던 한국 시골 농부들이나 화전민의 삶이 그려지기도 하고 산업화 시대에 땅을 지키려 했던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나기도 한다. 묵묵히 땅을 지키는 이사크 가족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감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지만 흥미롭게도 함순은 소설 곳곳에 불안감을 일으키는 복선을 깔아 놓았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작품을 읽는 내내 이사크와 잉에르에게 불행한 일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져서 페이지 넘김을 서두르게 된다. 


 이사크가 터전을 잡은 곳은 공유지였고 국가소유의 땅이었다. 이사크의 농장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잘 되고 있을 때 지방행정관 게이슬레르가 나타난다. 게이슬레르는 이사크가 현재 무단으로 농사짓고 있는 국가소유의 땅에 대해 소유권 이전을 제안한다. 이 대목에서 혹시 이사크가 게이슬레르에게 사기를 당해 농장을 전부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결국 게이슬레르라는 인물도 땅의 혜택을 믿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이사크의 농장에서 구리광산이 발견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이사크가 종사하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의 대척점에 있는 광산업과 상업의 물결이 이곳에도 휩쓸려 오기 때문이다. 돈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사크는 농장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이사크의 아내 잉에르, 그녀는 대단히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인물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제일 매력을 느꼈던 인물이 그녀였다. 그녀는 순수해 보이면서 가슴 가득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다. 언청이라는 결점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탓일까? 그녀는 자신의 딸을 죽인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가는데 거기서 언청이 수술을 받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출소한다. 이사크도 몰라보게 예뻐지면서 그녀는 이사크 몰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잉에르에게 교도소 경험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새로운 날개였던 셈이다. 그러나 잉에르는 결코 농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잉에르가 농장을 떠났던 것은 단 한번, 감옥에 갔을 때 뿐이었다.


 잉에르가 교도소에서 풀려나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이사크의 설렘, 잉에르가 교도소에서 낳은 딸과 셋이서 그들의 농장 셀란로를 향해 가는 여행길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잉에르가 농장 셀란로와 이사크를 끝내 떠나지 않는 이유는 언청이였던 자신을 받아준 이사크를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세기 말 노르웨이의 시골을 그린 작품이다. 멀고 생소한 북유럽의 노르웨이의 시골이지만 과거 산업화시절 우리의 시골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 이사크의 농장은 셀란로라는 이름이 붙고 이웃 악셀 스트룀의 농장은 모네란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려진다. 농장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 전통 농촌에서 집집마다 택호를 붙이던 관습과 비슷하다. 집주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그의 집과 농사짓는 땅 전체를 아우르는 별도 이름(택호)를 붙이는 관습이 그 먼나라 노르웨이의 옛 시골에도 있다니 인간의 삶의 양식에는 확실히 보편성이 있다.


 80년대 방영하던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디지털 문명에 지친 내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땅과 자연에 대한 동경이 더 커졌다. 실제로 함순이 이 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1920년.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으니 전쟁에 대한 환멸과 공포에 극도로 시달리던 때. 그때와 지금도 여전한 게 있다면 또 다른 경제전쟁이 끝도 없이 사람들을 피곤하고 소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변하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고단하지만 소박하고 작은 세계에 만족하는 소설 땅의 혜택이 가지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을 소유해야하고 일과 쉼이 구분되지 않아 만성적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처방은 작고 소박한 이사크의 농장이면 충분할 듯 하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자는 곳.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소득도 있었다. 북유럽의 먼나라 노르웨이의 시골모습을 마음껏 상상하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아는 세계가 훨씬 더 넓어진 풍성하고 경험을 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황무지를 일구며 이사크와 잉에르가 노르웨이의 깊은 산골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북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면 노르웨이를 맨 먼저 가보려고 한다. 다만, 함순은 이사크의 농장이 위치한 곳의 구체적인 지명을 소설에서 설정하지 않았던 점은 아쉽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 곳을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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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 김동인 단편전집 1 - 배따라기, 태형, 광염 소나타, 배회, 약한 자의 슬픔 외 36편 한국문학을 권하다 3
김동인 지음, 구병모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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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한자의 슬픔> 김동인 처녀작

1919년 2월 3일 김동인 자신이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에 발표한 소설이 소설을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2025년인 지금부터 무려 106년 전에 쓰여진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없었다는 점이다그리고 무엇보다 무척 재밌게 쓰여진 소설이었다김동인의 처녀작이라고 하는데 처녀작치고는 너무나 완성도가 높지 않은가게다가 김동인이 1900년 생이므로 이 소설은 김동인이 불과 약관의 나이에 쓴 첫소설.


 이 소설이 발표된 1919년 2월 3일이면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한달전당시 조선 전국토가 일본제국주의 군화에 짓밟히고 신음하던 시대였다고 역사 교과서는 말하고 있고 당시 모든 조선인들은 오로지 식민지 독립만을 열망하고 있었을 거라고 여겼으니 문학이니 낭만이니 이런건 사치에 불과하지 않았던 시대였지 않았나하는 내 편견을 말끔히 때려부순 작품국어 교과서 지문에서나 부분 부분 조금씩 접할 수 있었던 근대 한국문학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김동인의 이 처녀작 하나만을 읽었을 뿐인데 당시 한국문학 수준이 이 정도로 높고 성숙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온몬에 전율이 일었다당시 문학가들의 문학적 성취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요즘 한국 문학작품 읽을거리가 없었던 터라 우리 근대문학이라는 새로운 읽을거리 발견에 즐겁기도 했다김동인하면 <감자>,<배따라기>가 너무나 유명하지만 내가 지금 내가 읽는있는 김동인 전집은 그의 작품을 발표순으로 편집해서 처녀작<약한자의 슬픔>을 맨먼저 읽게 되었다이 소설에 대해 내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

권력과 재력이 있는 가문에서 방과후 선생 노릇을 하면서 숙식을 제공받아 학당에 다니는 스므살 여자부모도 형제도 없는 고아출신인 듯한데 당시 여자나이 20살까지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엘리자베트가 당시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신여성임을 짐작케한다.
이 소설은 처음에 평범한 로맨스 소설같아 보였는데 읽어나갈수록 꽤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양반집 주인 남작이 엘리자베트의 방을 찾아오면서 모든 비극과 갈등이 시작된다남작과 육체적 관계를 맺어가는 대목이 무척 흥미로운데 적극적으로 남작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어느새 그녀는 남작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간다는 묘사그럴만하다비록 신교육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근대의 악습과 관행이 힘을 쓰던 시대였고 여자가 독립적으로 살기엔 어려웠을 것이니 가난한 시골출신의 엘리자베트에게는 남작의 부정행위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에서 엘리자베트는 똑똑한 신여성으로 묘사되지만 그녀 역시 세속적 인간이고 원초적 욕망을 가진 인간임을 김동인은 놓치지 않았다남작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은 제법 에로틱하다남작의 욕정을 채우는 비극적 순간에 난데없이 에로틱한 느낌이란 또 무엇인가그런데 그 비극적 상황에서 스며나오는 정념에 이질감이나 거부감이 들지않는 점도 신기하다근대문학사 책들을 보면 김동인은 극단적인 문학지상주의자탐미주의자라고 평가하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직접적인 묘사없이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만으로도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기법에 능해서 읽는 내내 김동인이라는 작가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탐미주의자 김동인이 작품 주인공 엘리자베트 불과 20살의 여인이었고 남작의 아이를 지우려 병원에 가는 동안 전차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기도 하고 병원 의사가 진찰하면서 자신을 만지는 동안 의사의 손길에서도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묘사들.. 당시 억압된 성에 서 눈을 떠가는 신여성들의 모습이었던가하지만 김동인은 진취적인 신여성들을 혐오했다고 하는데 소설속 엘리자베트의 이런 이중적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는 단편소설이라는 분량의 한계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

 

 엘리자베트는 남작의 아이를 지우는데 실패하는데 병원 의사가 가짜약을 줬기 때문이다가짜약이라니.. 여기서 소설적 재미와 긴장감이 배가된다아이를 지우는 약이 당시 있었을까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정상적으로 아이를 지웠다면 소설의 행방과 결말은 어찌되었을까엘리자베트는 아이를 지우고 못하고 결국 남작의 집을 떠나게 된다그녀는 시골로 가서 남작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서생아의 승인신문상 사죄광고 게재 청구소송을 걸게 되지만 재판부는 엘리자베트의 주장에 신빙성도 없고 증거도 없다며 재판자체를 기각해버린다재판에 패소하여 그 충격으로 앓아눕게 된 엘리자베트신열을 앓다가 결국 아이를 사산하게 된다사산한 핏덩이를 손에 쥐고 그녀는 약한 자의 슬픔을 생각한다자기의 설움열패자의 설움좀 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피력하지 못했던 약함그 약함을 엘리자베트는 표본생활 20년이라고 했다자신의 20년 인생이 약한 자의 슬픔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한 것이다그녀는 유산후 더욱 날카로워진 이성을 가동하여 뜬금없이 인류애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다나도 시방은 강한자이다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다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어찌 알 수 있으리요?(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중략-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우주에 널려있는 사랑자연에 퍼져있는 사랑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그렇다 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 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 올랐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엘리자베트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뜬금없이 거대한 사랑 담론이 펼쳐지긴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몰락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에 나도 즐겁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이 소설을 읽는 내내 엘리자베트를 은근히 응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1900년 태어나 1951년에 사망했다지금의 내 나이에 죽은 것이다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않은듯하다약물중독(아마 마약인듯)과 지병에 시달렸는데 6.25 한국전쟁때 그는 몸이 아파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가지 못했다몸져누운 상태서 북한군에게 심문을 당했고 그 다음해 사망했다고 한다불과 50년 남짓 생존했던 김동인생전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을 발표한 다작 작가였다그의 짧은 삶에서 아쉬운 것은 그가 너무 일찍 타계하여 말년에 집필중이던 장편역사소설<을지문덕>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그의 단편전집은 애플북스라는 출판사에서 <김동인단편전집1>, <김동인단편전집2> 총 2권 출판되어 있다내가 지금보고 있는 김동인 전집이다. 김동인 단편전집에는 얼마전 영화화된<파과>로 유명한 구병모 작가가 쓴 김동인 소개글 '바랜 붉은 빛'이라는 글도 정말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다. 김동인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병모의 추천글을 읽어봤으면 한다. 김동인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질 것이다. 


 김동인이 말년에 약간의 친일행적을 보인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친일행적이 그의 문학적 성취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리 짙어 보이지는 않는다동시대 활동했던 춘원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이 이광수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무색해진 것에 비해 김동인의 작품에 계몽주의 이념이 크게 녹아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의 친일행적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이것은 물론 내 개인적 느낌일 뿐이지만 앞으로 계속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가면서 확인해 볼 숙제로 남겨둔다그의 친일이 말년에 약물중독과 망가진 신체에서 정신이 무너져 내린 결과의 과오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 그의 친일에 대한 공과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다역사가와 문학평론가들이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연구나 논평을 해왔을 것이므로..

 

오늘은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이다당시 식민지 시대를 견뎌낸 우리 선조들의 고단했던 몸과 정신을 생각해본다그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은가..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삶에 매진했던 선조들에게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약한자의 슬픔>줄거리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 시골출신, 약관의 나이, 경성에서 학당을 다니며 양반집 자제 방과후를 돌봐주면서 그 집에서 기숙한다. 엘리자베트는 매일 등굣길에서 마주치는 청년 이환을 편연(짝사랑)하지만 감히 고백을 하지 못하고 애태우기만 한다. 한편 자신이 기숙하는 양반집 주인 남작은 엘리자베트를 밤마다 찾아와 육체적으로 유린한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저항한번 해보지 못하고 급기야 남작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만다. 남작의 후처가 될 수도 없고 정조를 잃은 상태로 짝사랑하던 청년 이환도 포기하고 학업조차 그만두고 파멸하게 되고 경성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서 남작에게 손해배상의 재판을 청구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녀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결내리고 패소한 그녀는 신열을 앓다가 뱃속의 아이를 유산한다. 유산되어 쏟아진 자신의 아이, 그 핏덩이를 안고 약한자의 슬픔을 오열하다가 마침내 강한자가 되기로 한다. 하기싶은 일을 자유로이 하는 자가 비로소 강한자가 될 것이고 거기서 사랑과 진리를 발견하게 되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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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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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딸아이에게 줄 책 선물로 고양이를 다룬 책을 찾아보다가 이용한 시인이 쓴 고양이 3부작 포토에세이집이 눈에 띄었다. 이용한 시인 약력을 살펴보니 시인이었고 고양이 작가로도 유명한 분이셨다. 3부작중 첫번째 책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품절이라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구입했는데 내친김에 3부작 전체를 알라딘중고에서 구입했다^^

출판순서로 보면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명랑하라 고양이>,<나쁜 고양이는 없다> 이렇게 되겠다. 세 권 모두 공히 이용한 작가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은 책과는 거리가 멀고 스마트폰 게임(배틀그라운드를 열심히 하는데 세상에, 여자 아이가 배틀그라운드를 즐기다니..)에 너무 빠져 있는 현실을 타개할 묘책이 없을까 고민했다. 마침 딸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기에 그렇다면 고양이를 주제로 한 책을 선물해 준다면 글을 좀 읽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점에서 이용한 작가의 고양이3부작 포토에세이가 제격이었다. 일단 내가 3권을 속도으로 훑어봤는데 상당히 좋은 책이다. 작가는 동네에서 만난 길고양이들의 생노병사, 희로애락을 정갈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그려 보인다. 길고양이에 대한 한없이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 느껴지고 페이지마다 가득찬 이쁘고 귀여운 길고양이들 사진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저자의 세밀하고 집중력 있는 관찰력 덕분에 길고양이들은 저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새로 태어난다. 저자는 책에 등장하는 수십마리의 길고양이들에게 모두 이름을 달아주었다. 딸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은 분명한데 혹시나 딸이 고양이 사진만 대충 후루룩 훑어보고 책을 탁 덮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왜냐하면 길고양이들 사진뿐만 아니라 작가가 담담하게 따스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한 보고서를 읽히는게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어쨋든 딸아이가 한동안 스마트폰 대신 이 책들을 좀 열심히 뒤적여주면 좋겠다.

 

 

 고양이 3부작 중 가장 안타깝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2권 <명랑하라 고양이>에서 길고양이 바람이가 기생충 감염으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부분이었다. 이용한 필자가 새로운 동네로 이사와서 처음으로 만난 녀석이었고 먹이주기 3개월만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 정말 바람같은 녀석이다. 먹이를 먹으로 올때도 먹이를 먹고 갈 때도 늘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졌다. 필자는 그래서 녀석 이름을 바람이로 지었다고 한다. 필자가 각별한 애정을 쏟은 녀석인데 어느날 바람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린채로 나타난다. 눈에서 고름이 흐르는 바람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해보니 기생충 감염이었다. 야생에서 감염된 기생충이 뇌를 파고들어 전신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병이었다. 치료할 약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바람이는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갔다. 길고양이 바람이는 이름 그대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갔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바람이는 평소 자주 다니던 꽃다지 방죽에 묻혔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람이가 끝내 애석하고 섭섭해서 이용한작가는 바람이의 무덤에 민들레 한 포기를 심어준다.

                늠름했던 왕초 고양이 바람이

 

 

 바람이가 묻힌 꽃다지 방죽에 민들레 한 포기가 피어있다.

 

 길고양이들이 삶은 쉽지 않다. 차에 치어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수많은 길고양이들뿐만아니라 고양이를 혐오한 동네 어른이 놓아둔 쥐약을 먹고 길고양이 온가족이 급사하고 자동차에서 흘러나온 부동액을 먹은 녀석들도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다. 이용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길고양이 평균 수명은 대략 3년정도. 집에서 키우는 집고양이 수명 15년에 비하면 놀랍도록 짧은 삶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길고양들중에서 3년 이상을 사는 녀석이 드물어 보인다. 작년에 봤었던 길고양이를 해를 넘겨 다시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녀석들의 삶은 조건은 가혹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도 생존의 조건이 녹록치 않겠지만 유독 길고양이들의 삶이 힘들어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생존 공간과 인간들의 생활 공간이 가장 밀접하게 중첩되기 때문일 것이다. 먹이를 얻을 가능성이 많은 곳은 바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이기에 길고양이들도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체수가 훨씬 많다. 다른 종과 상생할 줄 아는 법을 아직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인간들 세상에서 공생을 시도해야 하는 길고양이들에게 가장 위험은 적은 바로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길고양이들이 사람들이 챙겨주는 사료나 음식같은 먹이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현실은 정말 안타깝다. 그들은 애초에 자연과 야생에서 인간의 조력없이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었으나 이제 그들이 마음놓고 사냥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대신, 사람들의 공간에서 불규칙적으로 공급되는 한정된 먹이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내 차 트렁크에는 늘 고양이 사료 한봉지가 있다. 어느 곳을 가든 고양이들이 눈에 띄고 그 중에서 배고픈 녀석들한테 사료를 놓아두고 간다. 녀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엔 역부족이지만 한끼라도 든든히 먹고 힘내서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도 여전히 명랑하라 고양이들아!. 좌절과 실패는 분별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언어일뿐 고양이들은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잘 살아남을 것이다.

 

 

ps. 내가 만난 길고양이 이야기

 

 동네 편의점 앞에 출몰하던 누렁이.

길고양인데도 사람들한테 거부감이 없었다. 편의점 앞 의자를 아예 전세내고 누워있던 놈인데 재작년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전에 사라졌다. 그 후로 1년이 지나 현재까지 다시 볼 수 없었다.  

 

 우리 시골 어머니집에 출몰하는 욕심쟁이와 겁쟁이.  

아래 검은털과 갈색털 조합이 욕심쟁이 암컷, 누워서 노는 노랑이가 겁쟁이 수컷이다. 둘은 모자사이인데 욕심쟁이가 겁쟁이 어미다. 욕심쟁이는 먹이를 혼자 독차지하는 못된 습관을 가진 덕에 딸아이가 붙여준 이름이고 겁쟁이는 먹이를 줘도 경계심이 너무 강해 사람한테 접근하지 않는 성격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고양이의 외모가 아닌 성격으로 이름을 붙여준 딸이 참 재밌다.

어미 욕심쟁이는 제법 나이가 들었다. 대략 7년 이상을 산 것으로 추정된다. 먹이에 욕심이 많아서 자기 자식인 겁쟁이가 사료를 같이 먹으려고 접근하면 앞발로 냅다 후려패버린다. 하긴 아들인 겁쟁이는 이미 젖을 뗀지 1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어미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겁쟁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겁쟁이가 성묘가 되자 욕심쟁이는 앞발로 후려치는 짓을 그만두고 모자가 나란히 겸상을 해서 다행이었다.

 

겁쟁이가 성묘가 되자 비로소 겸상을 하는 어미 욕심쟁이.

수컷인 겁쟁이가 어미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 욕심쟁이는 일년에 3~4차례 정도 새끼를 놓는다. 거의 매달 임신상태인 셈인데 그래서 촌에 갈때마다 사료와 간식을 듬뿍 주고 온다. 시골에 혼자 사시는어머니는 고양이를 굉장히 싫어하셔서 늘 녀석들이 나타나면 "저놈에 꼬내이들 다 잡아야 된데이" 하시면서 고양이 밥그릇도 치워버리는 분이라서 "제발 우리들이 없는 사이 고양이 사료 좀 주세요" 라고 부탁하기 곤란한 형편이다. 두 녀석은 사는 곳이 일정치 않다. 욕심쟁이는 원래 이웃집 할아버지댁 집고양이였는데 지금은 길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동네 어귀에서도 보이고 들판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면 집고양이 정체성은 이미 오래전에 버린 듯하다.

 

욕심쟁이, 겁쟁이, 그리고 점박이.

겁쟁이와 점박이 둘다 욕심쟁이 자식이다. 우리가 시골집에 갔다가 떠나올 때면 녀석들은 어김없이 저런 일령횡대 집합 자세로 우두커니 바라본다.

사람들아! 사료랑 먹이 좀 자주 가져오란 말이다! 이렇게 시위하듯이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짠하다. 내일부터 또 다시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다고 한다.

 안녕 고양이들아, 추위 잘 견디고 다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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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29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속의 고양이 이야기보다 실제 길고양이를 만난 후기가 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

파트라슈 2021-01-29 21:38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의 계승자 별의 계승자 1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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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대서사시..

오랜만에 엄청난 소설을 읽었다. 완독하는데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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