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2 밀리언셀러 클럽 65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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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쓴 여자들 이야기. 기리노 나쓰오의 다른 작품은 더 읽어보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이야기, 문장 스타일을 제대로 만든 작가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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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1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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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그로테스크. 도시락공장에서 근무하는 네 여인 이야기. 힘있고 감질맛 나는 기리노 나쓰오의 문장과 디테일한 이야기. 내용이 좀 끔찍하지만 소장가치가 있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을 좋아하는 내가 좀 이상한가.. 인상깊게 읽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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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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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호승의 시작(詩作)과 문학적 성취는 화려하다. 그는 1972년, 1973 두해에 걸쳐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82년, 단편소설로도 신춘문예에 이름을 알렸다. 각종 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한 이력도 눈에 띈다. 유명 일간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작품이 당선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3번이나 그것도 시와 소설 양대 부문으로 신춘문예상을 움켜진 그의 문학적 재능은 정말 타고난 것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70~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의 시는 주로 젊은층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모양이다.  나는 70, 80년대에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시를 단 한편도 접한 적이 없지만 정호승이라는 시인의 이름만은 내게도 꽤 친숙한 이름이었다. 지난 2010년에 펴낸 그의 열 번째 시집 <밥 값>을 읽으면서 그가 가진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앞으로 이 시인의 예전 시와 앞으로 나올 시는 꾸준히 찾아 읽을 생각이다.

 

 정호승의 시집 <밥 값>에서 평범한 사물인 벽보를 바라보면서 자기 성찰과 시인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반추해보는 <어느 벽보 앞에서>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어느 벽보판 앞 /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어느 벽보 앞에서>-

 

 이 시에서 시인은 벽에 붙은 흔한 현상수배범 전단지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전
단지에 현실적으로 자신의 얼굴이 있을 수 없지만 분명 전단지에서 안경을 끼고 입 꼬리가 처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함으로써 이 시의 시적 긴장은 시작된다.

 

 이 긴장감은 자신이 왜 그 전단지에 있어야 하는지 반추해보는 성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성찰은 쉽지 않다. 벽보판 앞에서 평생을 서성여야 할 정도로 많은 세월과 인내력이 필요한 고통의 성찰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찰의 결과는 시인 자신과 독자에게 통렬한 아픔을 선사한다.

 

“마침내 알았다“ 이후에 펼쳐지는 반성의 결과는 독자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을 제공한다. 그 반전 앞에 독자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독자 자신이 시적 화자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를 지은 공범처럼 느껴진다.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려 시간을 허비한 죄”를 지은 시적화자의 통렬하고 뼈아픈 반성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시의 효용은 충분하다. 과연 누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거울이라도 들여다 볼 일이다. 그리고 주변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정호승의 시는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적 사물과 언어들의 일상성을 부정하거나 파괴, 혹은 깊이 성찰해서 사람들의 관습에 충격을 가한다. 일상성의 관습에 충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서정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증명하려는 것들은 <밥값>이라는 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밥 값>부분

 

 시인이 말하는 밥값은 지옥에 가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시인이 보여주고 증명하려는 인간의 길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말하는 밥값이 어떤 것이지는 이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밥값을 보여주는 시들은 한결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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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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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찾다가 읽게 된 책이다. 책을 대출할 때 까지만 해도 지젝의 단독저서인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와 책상위에서 스탠드를 켜고 보니 저자소개에 ‘슬라보예 지젝 외’라는 문구가 있지 않은가. 책 정보를 잘 못 읽은 것이다. 원래는 이 책으로 시작해서 지젝을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러 서구권 철학자들이 매트릭스라는 영화 한편으로 다양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 글들을 읽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들을 여러 편 읽은 것이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이 책에서 여러 철학자들은 실존주의, 마르크시즘, 여성주의, 불교, 허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각자의 관심 분야의 틀을 가지고 영화 매트릭스를 읽는다. 매트릭스라는 블랙홀에는 우리 인간이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 이를 두고 저자 중 한 명인 슬라보예 지젝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의 관점에 부합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의 글 이외에(사실 지젝의 글은 무척 어렵다. 두 번을 읽었는데도 글의 주제를 파악하기 어렵다)우리를 생각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글 중에 하나는 제럴드 J 에리온 교수와 배리 스미스 교수가 쓴 ‘<매트릭스>는 데카르트를 반복한다: 삶은 악령의 기만’이라는 글이 아닐까 한다.

 

  이 글을 나는 아주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 이유는, 근대 유럽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진리를 정말 쉽게 통쾌하게 반박해 버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데카르트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인간 자신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인 신에서 찾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데카르트를 근대 합리적 이성의 시초로 대부분 인정해 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럴드 J 에리온 교수와 배리 스미스 교수는 이러한 데카르트의 근대적 이성을 대표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조차 손쉽게 반박하고 우리는 결국 지식이란 언제나(철학적)확실성을 필요로 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데카르트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원칙은 그 자체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한다. 바로,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원칙이 진리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 할 수 있는냐‘하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자가당착인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내가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나" 는 정말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인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감각과 현실,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생각만 하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존재는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각하는 나"의 존재도 오류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고 나면, 문득 우리의 삶이나 세계가 스미스 요원이 출몰하는 컴퓨터의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형이상학적 불확실성이 생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불확실성을 철저하게 방법론적 회의로 탐구해 간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이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믿음, 감각에 대해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결국 데카르트처럼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의심해 본 뒤에 정말로 내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는 내 자신, 내가 지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내 자신“만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합리적 이성의 기초이고 이러한 명제로부터 온갖 복잡한 인식론적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근대철학을 데카르트에 대한 후주(後註)라고 하지 않는가? 제럴드 J 레이온&배리 스미스(스미스 교수는 영화 매트릭스를 보고 난후, 난생 처음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는 재밌는 고백도 한다)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현대 서양 철학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확실성을 찾으려 했던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에 상당히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샌델교수도 근대적개인관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 서양학계에서는 근대적 철학과 세계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비판, 그리고 그 대안적 담론을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매트릭스>,가해자의 히스테리 또는 새도매저키즘의 징후‘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글은 다른 필자들의 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근거해 매트릭스를 보는 사람들이 갖는 세계 너머에 ’진정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편집증적 환상의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지젝은 매트릭스와 비슷한 영화 ’트루먼 쇼‘를 들며 할리우드만이 매트릭스 같은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세계에서도 영혼이 박탈된 자본주의적 공리주의 세계의 궁극적인 진실은, 실제적인 삶이 그것의 구체성을 잃고 공허한 쇼로 역전됨을 강조한다.

 

 지젝의 이러한 지적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실재를 은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시장과 자본이라는 실물화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어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의 배후에 진정한 실재를 은폐하는 ’대타자‘가 있다, 그것이 매트릭스다.”

 

라고 이어간다. ’대타자‘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나오는 개념인데 그냥 언어체계, 컴퓨터 네트워크,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 같은 실체가 없지만 우리 삶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그런 상징적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대타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붕괴되고 있다고 한다. 지젝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대타자의 붕괴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이 우리 모두를 지구촌으로 불러 모으리라고 기대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모순 되고 양립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들과 수많은 메시지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지구촌 대신, 즉 대타자 대신 우리는 수많은 ’소타자들‘, 다시 말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부족들을 얻게 된 것이다.”

 

 대타자가 붕괴되고 우리는 더 이상 제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음모이론이라는 것이다. 지젝의 설명을 듣고 나니 수많은 음모이론들(예를 들어 UFO이론, 지구 종말론, 유태인지배론 같은 것들)이 왜 생기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대타자라는 것이 결코 ‘실재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 이 제공하는 ‘사실들’에 직접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젝은 주장한다. 근대과학이 지배적인 담론으로 부상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근대과학의 주장들을 옹호한다면 그는 ‘광인’으로 치부된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광인 취급을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광인 취급을 받는 것, 즉 사회적인 대타자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는 사실상 미친 것과 마찬가지인데 ‘광기’는 직접적인 사실들에 근거할 수 있는 호칭이 아니라, 단지 한 개인이 대타자에 관계하는 방식에 근거하는 호칭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 하면서도 재미있는 분석이다. 이런 재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라캉과 지젝을 읽는 모양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이 실제 세계와 연결되고 교류하는지를 알기 위해 만든 정신분석적 이론, 틀, 개념, 용어 들을 접하다 보면 도대체 인간의 정신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광인’이야기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자신의 담론과 생각을 대타자의 영역에 통합시킬 수 없다면 우리 모두는 정신병자라고 단언한 지젝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책에서 이해한 지젝의 전부이다. 지젝의 글은 두 번을 정독했지만 사실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난해한 정신분석학적 개념들 때문이었지만 지젝의 글은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지젝의 글들은 앞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갈 생각이다.
 
 이 책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인식론, 형이상학, 실존주의, 종교철학, 윤리학,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 철학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매트릭스>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모두 짤막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편저자 윌리엄 어윈이 희망한 대로 이 책은 철학 공부의 입문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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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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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의 스킬을 알려주기보다는 우리시대에 있어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생각, 철학을 14명의 사회 각계전문가들에게서 들어보는 책이다.

 

 물론 글쓰기의 기술과 스킬을 알려주는 내용도 빠지지 않지만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담론의 형성이다. 수천 년 간 글을 쓴다는 것은 한자와 한문에 능통한 지배층과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훈민정음이 발명되었지만 글쓰기 행위의 주체가 일반 민중과 대중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높았던 종이와 먹의 위세는 사라져 문맹률은 거의 제로가 되었고 스마트 폰과 인터넷SNS로 소통하는 시대에 있어 글쓰기의 주체는 모든 사람들로 확대되었다. 또 글 쓰는 일반민중이 바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된지 오래다. 그래서 옛날에는 글 그 자체가 귀하고 소중했지만 요즘엔 너무 많은 글이 넘쳐나는데다가 인문학적, 이성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글이 너무 많아 도리어 좋은 글 한편 찾아내는 것이 희귀한 일이 되어 버렸다. 특히 인터넷매체나 웹상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의 대부분은 한글 맞춤법조차 준수하지 못한 비문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이 소개하는 글쓰기의 최소원칙들은 오늘날 모든 대중들이 거의 강압적으로(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다) 직면하고 있는 글쓰기의 현실적 필요 속에서 글쓰기의 방향과 방법을 몰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평론가 도정일 씨는 책읽기와 글쓰기의 교육이 성숙한 시민사회의 뿌리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시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작가 김 훈은 소설, 에세이, 칼럼의 글쓰기 형태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김훈 특유의 편견?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처세, 경영, 주식, 경제, 자기계발 서적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출판시장과 독서현실에서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영산대 배병삼 교수의 ‘고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할 오래된 미래’ 라는 글은 혼자 읽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글이다. 고전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문재 교수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라는 글은 글쓰기의 실제적 스킬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훈련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실용적이다. 이 교수는 정확한 문장이 생명인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미덕을 칭찬한다. 그리고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는 바로 정확한 문장의 구사임을 주장하면서 정확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자신만의 체험적 방법을 소개한다. 나도 멋과 기교를 부린 글보다는 한글 맞춤법을 준수한 정확한 문장으로 서술된 차분하고 간결하며 논리적인 글이 좋다. 문예 응모작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은 작품을 심사할 때 한글 맞춤법을 지키지 않은 비문으로 된 작품을 먼저 골라낸다고 한다. 비문작품을 골라내고 나면 남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니 정확한 문장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문재 교수는 먼저 정확한 문장쓰기 훈련의 일환으로 좋은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라고 한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몇 몇 좋은 작가들이 떠오른다. 먼저 문학 평론가 도정일 씨의 글은 잘 짜여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긴장감과 질서 속에서 생각의 정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그는 정말 글 하나만큼은 미끈하게 잘 쓰는 것 같다.


 계간잡지 녹색평론의 김종철 씨의 글은 평이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는 문장이라 자주 찾아 읽는 편이다. 평론가 겸 작가인 고종석씨의 글은 매우 논리적이고 읽을수록 감칠맛 나는 문장을 구사한다. 작가 김훈의 글은 주어와 술어만으로 된 문장이 대부분이고 대나무를 칼로 벤 듯한 날카로움 속에 도도히 흐르는 삶의 서사를 적확하게 오려내고 추수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김훈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 그의 글을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여기지만 결국 그의 글이 풍기는 묘한 매력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김 훈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글을 흉내 내기는 쉽지 않다. 김 훈의 에세이를 구성하는 문장하나 하나에는 이 십년이 넘게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기자로서의 관록과 삶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 그리고 인간적 성찰이 깊게 배어들어 우러나오고 있고 이런 점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들을 종이에 정성껏 필사해보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방법으로 자신이 쓰는 글에서 나쁜 버릇을 찾아 낼 것, 항상 새로움을 찾아 볼 것, 사물과 일을 자세히 관찰할 것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하면서 메모의 유용함도 강조한다. 요즘 나도 좋은 생각이나 문구가 떠오르면 열심히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내 기억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머리가 아닌 메모지에서 나온다는 이문재 교수의 조언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실용적이다. 메모지가 바로 상상력의 발전소이다.

 이문재 교수는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다지기에 이어 세부지침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먼저 자신의 이야기부터 써볼 것, 같은 내용과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말 것, 접속사를 쓰지 말 것, 문장을 쓸 때 병치를 조심할 것 같은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문재 교수의 글쓰기 비법하나만 제대로 실행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변호사 차병직씨의 ‘글쓰기 작업으로 구성되는 법의 세계’ 라는 글도 읽을 만하다. 법의 세계는 법을 언어로 만들고 다시 언어로 해석해서 그 결과를 다시 언어로 표현한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언어와 글쓰기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법의 세계에서는 읽고, 생각하고, 그 결과를 써내는 작업으로 법의 의미를 창출하고, 또 그것을 적용해 이상적 질서에 가깝게 이끌어가는 일이 계속되는데 법의 세계 그 자체가 이미 글쓰기 작업으로 구성되는 세계인 셈이다.

 

 특히 법원의 판결문은 승자보다 패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패자들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가능해져야 법 자체 또는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차병직씨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법조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한자어 표현들로 도배된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문이 아닌 패자와 사회를 설득시킬 수 있는 글쓰기를 시도했으면 좋겠다. 헌법재판소가 공개하는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주어와 술어사이가 너무 길어 질리는 문장이 보이고 박근혜대통령도 앞뒤가 맞지 않아 구글번역기로 돌린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문체를 구사한다. 대통령의 그런 문장은 따라하기도 어렵다.  아래 박근혜대통령이 구사하는 문장이다. 우리가 모르는 4차원의 세계를 향해 발언하시는 듯..

 

 글쓰기에 있어 최소원칙이 있다면 최대의 원칙은 무엇일까? 아마 글쓰기에서 최대 원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의 외연은 무궁하게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도 없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정보를 소비하는데 집중한다. 정보를 창조, 생산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적어도 글쓰기의 최소원칙은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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