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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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몇 년 전에 쓴 글.

책내용 요약+생각, 느낌을 모아 쓴 글인데 김훈 작가가 자주쓰는 표현인 "계통이 없다"

가 딱 들어맞을 정도로 글이 산만하다. 책 내용의 인용과 내 개인적 생각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고 인용부분 페이지도 일부는 누락되어 있다. 이렇게 길고 지루한 글을 당시 내가 무슨 생각으로  작성한 건지 기억도 안나지만 USB에 잠들어 있는게 좀 아까워 그냥 알라딘 웹서버에 용량 좀 잡아먹으려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책을 읽어보려는 사람들이나 관심있는 사람들한테 단 몇 단락이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글 내용중에 지금의 내 생각과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긴 하지만 큰 맥은 변하지 않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업로드한다. 그런데 나도 읽기 싫은 이렇게 긴 글을 누가 읽겠나.. A4용지로 12장이나 됨..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 "가장 좋은 책은 독자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독자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마이클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고전이 될 만하다. 본문은 아래 절취선 아래부터..

 

 

-------------------------------------절취선-------------------------------------------

 

JUSTICE(what is right thing to do?)
  당신은 전차 기관사이고, 시속100킬로미터로 철로를 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저 앞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 도구를 들고 철로에 서 있다. 전차를 멈추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들이받으면 인부들이 모두 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생각이 옳다고 가정하자)절박한 심정이 된다.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 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돌려! 죄 없는 사람 하나가 죽겠지만, 다섯이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목숨을 구하는 행위는 정당해 보인다.

 

  이제 다른 전차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기관사가 아니라,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위에 서 있는 구경꾼이다(이번에는 비상철로가 없다). 이번에도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전차가 인부 다섯 명을 들이받기 직전이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다가 문득 당신 옆에 서 있는 덩치가 산만 한 한 남자를 발견한다. 당신은 그 사람을 밀어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 명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 (당신이 직접 철로로 몸을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전차를 멈추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다). 그렇다면 덩치 큰 남자를 철로로 미는 행위가 옳은 일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연히 옳지 않지. 그 남자를 철로로 미는 건 아주 몹쓸 짓이야.”
 
 p36~37 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서 제시한 사례의 예를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 첫 번째 사건에서는 인부 한명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고, 두 번째 사건에서는 인부 다섯 명의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대게 다음과 같다.


“다섯 명이 죽는 것보다 한명이 죽는 것이 낫지만, 철로 옆에 서 있던 큰 남자를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기 때문에 다섯 명이 죽어야 한다.”


 당신도 이렇게 생각했다면 우리는 샌델 교수의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샌델은 위의 두 사례는 근본적으로 같은 상황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명히 두 사례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첫 번 째 상황에서의 원칙은 가능하면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아무리 명분이 옳다 해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원칙이다. 그러나 샌델은 첫 번째 상황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에서 두 번째 상황과 차이가 없다고 한다. 즉, 둘 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점에서 동일한 상황인 것이다.


 전차를 돌리는 행위가 옳다면, 남자를 떠미는 행위도 옳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 경우를 서로 다르게 생각하려 애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전차를 돌리는 행위는 옳고 남자를 떠미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 똑같은 상황인데도 왜 일관된 원칙을 적용하지 못할까? 왜 우리의 도덕은 일관된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는가? 과연 우리는 이 두 사건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독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A라는 남자가 자신에게 먹히는 경험(食人)을 할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를 낸다. B라는 남자가 그 광고에 응하여 A에게 찾아가서 A에게 잡아먹히는데 동의한다. A는 B를 죽여 자신의 냉동실에 넣고 식사 때마다 B를 요리하여 먹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 끔찍한 사례를 믿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사실여부가 아니라 이 사건에서 A가 과연 유죄이냐 무죄냐 하는 것이다. 분명 모든 사람들은 A의 죄를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A의 잔혹한 엽기적 식인행위에 치를 떨 것이다. A는 유죄인가? 다만 사람의 육체를 먹는 식인을 했다는 이유 때문일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B라는 사람이 A에게 먹히는 데 동의하고 합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판단 하에 어떠한 것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육체를 포함)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약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위의 사건에서 A와 B는 자유의지로 상호 계약을 했고 A와B는 그 계약을 이행하였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게다가 두 사람의 행위는 제3자인 타인의 어떠한 자유도 침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 사례들은 독자를 딜레마 상황으로 인도한다. 난감해진 독자들 앞에서, 샌델 교수는 정의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리고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샌델은 각각의 방식에서 다양하고 실제적이며 흥미로운 사례들을 소개한 뒤 독자와 학생들(이 책은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과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각각의 방식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변증법적 도덕 추론으로 정리해 나간다. 과연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샌델이 말하는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 세 가지(행복, 자유, 미덕)를 간단히 정리해 본다.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최대다수의 행복이 곧 정의다)

 공리주의는 18세기 영국의 제러미 벤담에서 시작된다. 벤담에 따르면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괘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옳은 행위는 ‘공리(功利,utility)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정의의 원칙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다음의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의 행위도 옳게 여겨진다.

 

“1884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조난을 당하여 바다에서 표류한다. 세 명의 성인 남자와 한 명의 소년(리처드 파커)가 구명보트에서 구조를 기다린다. 보트에는 물도 없고 음식도 없었다. 바닥거북 한 마리로 겨우 연명하던 네 사람.. 그런데 소년이 너무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고 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소년의 인육을 먹고 살아남아 구조된다.”

 이 사건에서 소년을 잡아먹은 세 사람은 공리주의의 입장으로 보면 옳은 행위를 한 것이다. 한 소년을 잡아먹고 다수의 행복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세 사람을 옹호하거나 변호할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우리의 실제 삶에서 위의 사건과 유사한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며,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실제 우리 삶의 지배적 원칙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비용편익분석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누구나 한두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비용편익분석이란 공리주의의 현대화 버전이다. 비용편익분석은 모든 행복을 비용과 편익으로 계량하고 통하하여 계산하는데 현재 정부와 기업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는 의사결정방식이다. 정부에서 흡연의 증가에 따른 의료비용 증가를 우려해, 담배에 부담하는 세금을 높이기로 했다. 이 때 담배회사는 비용편익분석을 정부에 내 놓는다. 담배회사의 비용편익분석결과는 흡연으로 인해서 정부는 손해가 아니라 이익을 본다는 결론을 내린다. 흡연자들이 생존 중에는 정부의 의료예산을 높이지만, 결국에는 일찍 죽기 때문에 의료, 연금, 주거 부분에서 상당한 예산 절감효과를 낳는다는 이야기이다. 담배회사들은 담배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제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담배회사의 발상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공리주의적 원칙이다. 공리주의의 원칙에는 근본적으로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생명에 대한 존엄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에는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치명적 결함인 도덕성 결여, 개인의 자유와 생명 부정을 변호한 사상가가 있다.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공리주의를 변호하기 위해 그 유명한 「자유론」을 저술한다. 밀의 자유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아닌 공리주의를 위한 자유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 장기적으로 모든 인간과 사회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샌델은 밀의 자유론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샌델은 사회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한다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볼모로 잡힌 꼴이라며 비판한다.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절대적 목적이 아니라 결국 공리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는 꼴이 되는 셈이다. 밀의 자유론은 여기서부터 한계에 부딪힌다. 샌델은 밀의 자유론이 공리를 옹호하고 공리주의 원칙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비난한 꼴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공리주의와 밀에 대한 샌델의 비판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벤담은 쾌락의 종류와 상관없이 절대다수의 쾌락만이 가치를 가진다고 했다. 즉, 쾌락이 고급이든 저급이든 그 가치를 저울질 할 수는 없고 다만 쾌락의 양이 최대일 때 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성을 가진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반박도 가능해진다. 도서관에서 세계문학전집(고급쾌락)을 읽고 싶어하 는 사람은 소수인 반면에 영화잡지(저급쾌락)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수라고 가정하자. 이럴 경우, 도서관은 영화잡지를 세계문학전집보다 더 많이 구입해서 비치해 놓아야 하는가?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에서는 당연히 영화잡지를 더 많이 구입하는 것이 정의다. 다수가 영화잡지를 보기 원하므로..


 그러나 누구도 영화잡지의 추가 구입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이 대목에서 위기에 빠진다. 밀은 위기에 빠진 공리주의를 구하기 위해 고급쾌락과 저급쾌락의 차이를 인정한다. 인간은 저급쾌락이 아닌 고급쾌락을 추구해야 하며, 고급쾌락의 절대다수의 합이 정의에 더욱 근접한다고 한다. )

 

  그런데 밀은 그 유명한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 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라는 명언을 남기며 벤담의 펜트하우스 비치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이 유명한 명언도 샌델의 비판을 모면하지 못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은 본래의 취지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오해되어온 말임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고급능력과 고급쾌락을 신뢰하는 표현이지만 밀이 이런 발언을 하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벤담의 공리주의 변호를 위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영화잡지사례처럼(영화잡지사례는 전적으로 내가 지어낸 것이다)벤담의 자가당착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밀은 저급한 쾌락보다는 고급쾌락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밀에 따르면 저급쾌락과 고급쾌락의 판단기준은 절대다수의 쾌락과 욕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원래 인간은 자유롭고 존엄하기 때문에 고급쾌락을 추구하고, 고급쾌락의 추구가 고급 능력을 이끌어내고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결국 밀도 벤담처럼 자가당착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공리주의는 앞의 구명보트 식인 사건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개성을 무시한다. 밀은 결국, 공리를 옹호하려다 공리와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 자유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이상한 꼴이 되고 말았다고 샌델은 비판한다.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을 이렇게 창조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샌델에게서 노련한 대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샌델은 내친김에 공리주의 비판에 이어 자유지상주의자들조차 자신의 시험대에 올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의)
 공리주의자들이 최대다수의 행복에서 정의의 원칙을 찾는 시도와 반대로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소유에서 정의의 원칙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샌델은 여기서 마이클 조던과 빌게이츠의 사례를 든다. 정부가 마이클 조던과 빌게츠의 엄청난 재산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개선을 쓴다면 이것은 과연 옳은 행위일까? 자유지상주의자들은(우리나라에서는 뉴라이트 연합과 복거일 씨 같은 사람들이 여기 속할 것이다)내가 나를 소유하며, 나의 노동도 내 소유이며, 나의 노동의 결과도 내가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내 노동을 소유한다면, 내게는 그 열매를 가질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가 내 노동의 열매인 재산에 과세를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열심히 외친다. 그래서 그들은 최소국가, 야경국가를 외친다. 자신을 소유한다는 생각은 현대사회에서 선택의 자유와 관련한 많은 논쟁에 등장한다. 한국의 자유당 시절, 식당에서 밥을 먹고는 돈을 내지 않는 무전취식 행위를 한 사람한테 왜 밥값을 안내느냐고 하면 “내 자유니까”라고 했다던 일화도 있듯이 자유라는 개념만큼 오해되어온 것도 드물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내가 내 몸, 내 삶, 나라는 인간을 소유한다면(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그것을 내 마음대로 다룰 자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샌델은 몇 가지 생생한 사례를 들면서 이러한 주장을 가볍고 명쾌하게 반박하고 나서 자유지상주의도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콩팥판매가 있다. 내 몸을 내가 소유하므로 나는 나의 콩팥 2개를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다. 그러나 샌델은 이 경우, 콩팥을 판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자유롭지 못한 강압적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콩팥을 판매한다면 그것은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강압적 현실에서 이루어진 수동적 행위인 것이다.

 

 샌델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논리를 더욱 확장시켜 자유시장주의는 과연 공정한가를 묻는다. 여기서 샌델이 제시하는 징병제와 모병제 사례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샌델은 징병제와 모병제가 결국은 강압적인 제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한다. 보통사람들의 통념과 상식을 뛰어넘는 주장이다. 징병제는 국가의 폭력에 의한 강압이며 모병제는 시장의 폭력에 의한 강압이라는 것이다. 모병제가 왜 강압적인 제도인가? 샌델은 미국의 군대를 예로 들었다. 알다시피 미국의 군대는 자원병제도이다. 즉, 직업군인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직업군인 제도는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것으로 사람들은 흔히 오해한다. 그러나 샌델은 미국의 군대는 그저 애국심과 사명감에 충만한 사람들이 자원하여 가는 곳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업군인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미국 군대의 사병은 소득하위계층과 저학력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통계조사에서 뒷받침된다. 주한 미군들의 범죄율이 높은 이유를 이런 미군의 인적구성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단기하사나 부사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미국의 모병제와 같은 형태이고 우리나라에서 자원하여 직업군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미국인들보다 더 좁은 직업선택의 폭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현재 한국의 취업난이 워낙 극심하여 군대를 취업의 대안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모병제는 결국 강압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징병제와 모병제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샌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샌델은 현재 자유시장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대리출산문제도 언급한다. 자궁과 난자의 제공, 그리고 임신의 대가로 돈을 받고 대리출산을 해주기로 계약한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서 마음이 변해 아이와 차마 떨어질 수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잠적한 일이 있었다. 이런 경우 대리모는 대리출산의 계약을 지켜야 할까? 법원은 결국 대리출산의 계약을 무효로 선언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상품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자유시장에서 어루어지는 성인들간의 자유거래, 자유계약은 애초에 정보의 비대칭에서 시작하므로 그러한 불공정한 자유계약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도 자유도 아닌 인간 그 자체이다(칸트의 정의론)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둘 다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그리고 샌델은 자신의 정의 원칙을 지탱하는 근거의 하나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소개한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도덕과 정의조차 샌델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가 말하는 정의와 도덕의 원칙은 무엇이며 칸트의 도덕은 왜 나중에 샌델교수의 비판을 면치 못하는가?
 
 칸트는 그의 저서 도덕형이상학 기초에서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칸트는 도덕이란 행복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며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고 칸트는 역설한다. 칸트는 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순수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수 이성이란 외부의 어떠한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세계(현실세계, 자연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각종의 자연적 법칙과 인과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쾌락을 추구하고 배고픔을 멀리하는 행위는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욕구나 욕망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생래적으로 얻은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 욕구와 욕망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도덕적 원칙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그것은 결국 공리주의적 세계관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경험의 세계를 벗어난 순수한 이성만이 진정한 도덕의 원칙이 될 수 있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인간이란 순수한 이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도덕의 원칙만이 올바르다고 한 것이다. 샌델은 칸트가 말하는 순수한 이성으로서의 인간만을 목적으로 한 도덕적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한 정의의 원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인간을 목적으로 한 정의의 원칙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답을 하고자 했다.

 

평등옹호(존 롤스)
  롤스는 차등의 원칙을 주장했다. 차등의 원칙이란 출발과 기회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고 노력에 따른 결과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그 결과의 차이를(부의 차이) 가장 불행한 자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할 때만 결과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마이클 조던의 농구실력은 인정하지만 그가 그런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만의 산물은 아님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미국 NBA농구선들 중에 마이클 조던만큼, 어쩌면 조던보다 더 노력한 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던보다 더 노력한 사람은 왜 조던보다 더 많은 인기와 부를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서 아무리 출발과 기회를 공평하게 한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이른바 재능을 타고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재능은 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조던이 재능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사회가 농구경기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조던의 재능과 노력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조던이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부는 조던 자신만의 것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조던은 사회에 빚을 진 것이다. 그래서 결과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그 결과의 차이에서 발생한 부는 전적으로 개인의 산물만은 아니므로 즉, 사회활동에서 얻어진 것이므로 그 일부는 마땅히 사회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롤스는 어떤 사회에서 원칙을 정할 때 조던의 재능처럼 어떤 임의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한다. 즉,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조던과 같은 재능을 타고 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의의 원칙과 분배의 원칙을 정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저 사람은 모두 똑같이 외부의 어떤 조건과 관련이 없는 순수한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롤스는 인간들이 가지는 특정한 정체성(국적, 역사, 언어, 경제적 상황, 가족 관계, 당시대를 지배하는 이념, 사회구조 등등)을 배제한 뒤(롤스는 이런 배제를 무지의 장막이라고 불렀다)라야 진정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샌델은 롤스의 자유주의적 인간관에도 메스를 가한다.


샌델이 말하는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근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신화가 무너지다)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임마누엘 칸트, 자유시장주의자들, 그리고 최근의 롤스에 이르기까지 근 현대의 정의관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비판한 샌델 교수는 이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말한다. 샌델이 말하는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현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자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정의관에서 출발한 샌델 교수의 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의관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여정은 ‘덕 윤리의 부활’로 명명되는 윤리학의 신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알래시데어 맥킨타이어, 찰스 테일러 등, 공동체주의적 입장의 철학자들에 의해 1980년대 이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덕 윤리는 근대 도덕철학의 치명적 오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개인주의의 관점에서-역사와 문화로부터 분리된 근대적 ‘자아’의 관점에서 도덕을 정당화하려는 계몽주의적 기획은 실패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샌델을 비롯한 덕윤리론자들의 주장이다.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발전해 온 비용편익분석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도, 최소국가도,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칸트의 순수이성도, 롤스의 평등도 이제 더 이상 우리 삶의 최고 원칙도 도덕도 될 수 없다고 샌델은 생각한다. 샌델은 인간을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말한 이야기 하는 존재, 서사적 존재로 설명 한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p311

 

 인간은 사회와 역사라는 거대한 대서사의 한 부분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 거대한 큰 이야기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근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절대적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거대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을 이성적 존재가 아닌,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 없이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정치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샌델 교수가 말하는 정의의 핵심적 가치다. 정치란 것은 어떤 가치관이 우리의 삶을 더 좋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가치관은 바로 좋은 삶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샌델은 현대 자유주의 정치론(정치와 법이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확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는 시민의 삶을 메마르게 한다. 그런 정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든다.“                                                   

                                                                                                           -p337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샌델교수는 명확하게 짚어준다. 서울시와 서울시 교육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무상급식 논란, 그리고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상복지 논란 등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나라의 교육자들과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슨 철학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샌델은 중요한 도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에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샌델이 말하는 중요한 도덕이란(공동선) 바로 어떤 삶이 좋은 삶이며 바람직한 삶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고민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교육에는 교육철학이 있어야 하고 정치에는 정치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에겐 제대로 된 교육철학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입시제도는 매년 수시로 바뀐다. 교육철학이 없으니 도대체 어떤 시민을 길러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떤 교육제도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교육 철학이 없으니 어린 학생들 점심 때 따뜻한 밥 한 끼 먹이자는 논의에 마치 쉬파리 끓듯 근본주의와 파시즘으로 무장한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몰려와 자기가 가진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다구니 싸움판을 벌이고 있고,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은 또다시 사교육과 교육철학부재의 지옥학교에서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 것이 우리교육의 현실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무상급식과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열심히 붙이고 있다. 마치 유신 정권 때 자신을 비판하고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어떤 독재자처럼 말이다. 무상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싸움은 허구적이고 기만적이다. 복지는 공동선이다. 특히 복지로 인해 국가재정 파탄난다고 겁주는 자들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사회는 가난을 해결할 물적 토대는 이미 마련해 놓고 있다는 보수주의자 김 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공동선의 추구와 좋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없는 정치는 결국 근본주의적인 추한 이익 쟁탈전에 불과하다. 국민은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정치의 역할은 우리 삶의 철학을 세워주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공동선과 좋은 삶에 대한 철학의 정립이 아닐까?

 

 공동선의 정치와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마지막으로 샌델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롭고 바람직한 정치의 모습을 몇 가지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한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시장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통 우리사회는 진보, 혹은 좌파(한국에서 좌파는 보통 부정적으로 인식된다)로 분류한다. 샌델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했다는 점을 진보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크게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한계는 샌델 뿐만 아니라 헨리 조지나 칼 폴라니로부터 시작해 최근 장하준 교수까지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왔다.


사실 지금까지 시장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해 온 사람들이 시장과 자본에 대한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대안은 벌써 나와 있을지도 쉽게 나올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장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모든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원리, 그리고 시장은 저절로 최선을 지향한다는 자기조정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샌델은 자유의 원칙, 합리성의 원칙이 결코 도덕적으로 옳을 수 없음을 누차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샌델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진보와 보수, 우파와 좌파의 대결 구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시장의 규범, 혹은 시장의 철학도 마땅히 공동선의 철학과 미덕에 근거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샌델의 정의를 읽는 더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샌델도 결코 시장을 부정하지는 않으니까..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중략).. 시장은 생산 활동을 조직하는데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사회제도를 지배하는 규범을 시장이 고쳐 쓰기를 원치 않는다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p367

 

 샌델은 마지막으로 사회의 빈부격차와 불평등 심화는 우리 사회의 공동선과 정의, 미덕을 크게 좀먹게 할 것으로 경고한다.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괴리된다.

 예들 들어 풍족한 집안의 자녀들은 비싼 등록금과 상대적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립학교로 모두 진학하게 된다면 공립학교에는 대안이 없는 가정의 아이들만 모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는 화재진압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설 민간 소방서도 있다) 부자들 자녀만 모이는 사설학교와 일반 공립교로 사회기반이 양극화되고 공립학교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부유층이 납세를 꺼리게 되면 공공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거나 공공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 사라지게 된다. 버스나 지하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 없으면 그 사회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요즘 우리사회 정책 쟁점으로 떠오른 무상급식문제를 다시 들여다보자. 무상급식은 공공의 영역인 공교육을 실행하는 수단이다. 교육은 공동선을 추구하고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민주시민을 양성해야 된다. 그러나 경제적 여건이 되는 집안의 학생들은 급식비를 지급하고 밥을 먹는 게 마땅하다면, 여러 가지 대안을 가진 그 학생들이 오로지 학교의 급식만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 따로 값비싼 도시락을 싸오거나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서 더 비싼 밥을 사 먹어도 된다. 아니면 더 우수한 식사를 제공하는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 돈 내고 내가 밥 먹는 식이라면 부유층들이 공립학교에서의 자녀들 급식을 거부해도 어쩔 수가 없게 된다. 돈 내고 먹는 건데 질이 낮은 학교급식 안 먹이겠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공공의 영역인 학교에서 조차 밥 한 끼로 인해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구분하기 시작하면 모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급식과 공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고 학생들은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되어 교육은 결국 빈부격차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면서 공교육과 사교육간의 괴리가 심화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지 않을까?


 나는 물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사회가 빈부격차나 불평등심화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지 않는다면 위에서 상상한 일들이 생길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샌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 정치인들이 무상급식논란을 가지고 정치적 포퓰리즘 논쟁으로 치부한다거나, 예산의 우선순위 문제로 인식하여 나라 살림이 거덜 난다고 겁을 주는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위선적이며 국민과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기만하는 행위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먹는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들과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손실을 간과한다. ..(중략)..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시민 삶에 기반이 되는 시설들을 재건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민간 시설의 소비를 늘리기 위한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공공기관과 공공서비스를 다시 일으킴으로써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똑같이 그것을 이용할 마음이 생기게 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中


샌델은 정의가 중립적이지 않아야 함을, 다시 말해 좋은 정치란 좀 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책을 끝맺고 있다.


 인터넷 서점이나 각종 매체에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이나 리뷰가 넘쳐난다. 혹자는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과연 샌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보기에, 샌델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명확하고 단호하게 책의 말미에서 밝히고 있다. 샌델이 말하는 정의는 우리가 그토록 동경하고 따라잡고자 했던 근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신화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반성하는 시도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샌델의 정의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아직도 합리적 이성과, 개인 자유에 기초한 서구적 자아관이 아직 우리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샌델이 제시하는 목적론적 정의는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동경해 왔고 따라잡고자 했던 근대적 자아를 이미 탈피하고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센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공동선에 근거한 목적론적 정의에서 과거 우리를 억압했던 음울한 독재와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아서이다.

 

 이러한 걱정은 샌델이 이 책에서 제시한 생생한 각종 사례가 현재 한국의 사회현실과 동일한 맥락을 가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정치권과 시민들의 민주적 질서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도리어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적 질서의 후퇴를 걱정하고 염려하게 된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후퇴는 개인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직 시장에서의 자유(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제현실에서 시장의 자유는 대기업과 특정기업들의 독점과 과점, 담합 등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를 제외하고 서구의 근대적 개인과 자유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아직 시민과 개인의 자유, 권리에 대한 정의조차 확립하지 못한 우리 사회가 또 다시 샌델이 제시하는 공동체주의에 근거한 목적론적 정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아직 미성숙한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이 더디어 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샌델의 정의는 분명 설득력이 있지만 그가 말하는 정의가 현재 우리사회를 진단하고 되짚어보는 비젼을 제시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 샌델 자신도 공동체주의에 근거한 도덕에 명백한 결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샌델의 정의가 공동의 선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우월적인 위치에 있음은 여전하다. 그래서 샌델이 정의를 선에 결부시키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매번 역설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정의는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고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그 다양한 관점과 특수성을 수용하고 인정하여 토론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합의에 이르는 과정, 바로 이것이 샌델이 말하는 정의의 핵심이 아닐까?

 

“공적인 삶에서도 사적인 삶에서도 철학은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철학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조차 철학을 피할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中 

 

 지난 대선 때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갈망했고 당선자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왜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버린 것일까? 돈이 전부가 아니고 부자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철학을 돈이 대신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돈 없으면 죽는다는 비정하고 잔인한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돈 그 자체는 혐오스런 것이 아니지만 돈 밖에 모르는 사회는 분명 혐오의 대상이다. 그래서 정의와 도덕을 말하는 센델의 책을 사람들은 갈증을 해결하듯이 찾았던 모양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와 자유지상주의를 확실하게 비판하고 우리가 앞으로 추구해야 할 공동선을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 시대의 고전이 될 가치도 충분하다. 정의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두 번 읽을 가치도 없는 책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샌델의 책은 밤을 세우게 하는 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PS: 센델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센델교수가 자신의 책을 팔아 돈을 번 행위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이 책 어느 부분에도서도 센델은 돈벌지 말자는, 또는 돈을 혐오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것은 온당하고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센델교수가 말하는 핵심이다. 제발 책 팔아 돈 번다고 욕 좀 하지말자.

201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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킁킁 2016-11-2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정말 잘쓰시네 잘읽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