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 7회에는 극중 장회장(신구)이 불멍예찬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회장은 누가 말리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장작을 태운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이어진다.


장회장 曰 : 네덜란드인가? 노르웨이인가? TV 프로그램 중에 하루 종일 모닥불이 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있는데 근데 그게 시청률이 나온대. 나 같아도 볼 거 같아. 마음이 쉬고 싶은 거지.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이 생각 저 생각 계속 생각이 떠오르는데 불을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 생각이 없어져.


 장회장의 말처럼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 끊임없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멈추어 본적이 있는가? 생각은 내 마음대로 멈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생각이나, 의식에는 항상 어떤 대상이 있다. 무엇무엇에 대한 의식이나 생각이다. 현상학이라는 서양철학 분파는 이것을 자신들의 근본 철학용어로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했다. 생각, 의식이 독자적으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 이고 의식은 늘 내용이나 대상이 있다는 뜻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으니 내 시각 의식에는 화면이라는 대상이 있고 이번에 매수한 주식이 오를 건지 아닌지 걱정이 떠 올랐다가 어제 회사에서 동료에게 했던 말이 적절했나 하는 후회도 떠 올랐다가 오늘 점심은 또 무엇을 먹을지 오후에 미용실에 헤어컷을 하러 갈지 말지. 이처럼 의식은 끊임없이 어떤 대상이나 개념, 관념, 이미지, 상상등을 떠 올린다. 아무런 대상이 없는 무엇도 떠 오르지 않는 그런 순수의식이나 순수한 생각을 우리는 단 1분도 의식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생각은 늘 생각거리를 찾는다. 가만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 피곤할 수 밖에 없다. 장회장처럼 큰기업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생각거리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스케일이 훨씬 커지겠지. 눈을 감고 자려고 해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걱정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무거워진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은 쉽사리 쉬지 못한다. 생각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그런데 생각의 무게, 의식하는 것에 대한 고단함을 쉬게 해주는 매체로서 불만한 것이 없다. 불 앞에 앉으면 장회장의 말처럼 희한하게 생각이 없어진다. 불은 자신의 연료를 태울 뿐만 아니라 불 앞에 앉은 사람의 생각거리도 다 태워 없애버리는 효능이 있다. 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생각의 씨앗이 자라지 않는다. 그저 불이라는 연소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불을 바라볼 때 불을 떠 올리는 나 자신이 없어진다. 불과 나의 분열이 사라진다. 자아가 없어지면 미쳐 날뛰던 생각은 소멸한다. 우리는 왜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편안해질까?


 장작불을 바라볼 때와 같은 멍한 상태의 의식은 자아에 의한 의식의 중앙집권화를 잠시나마 해제하고 일종의 원형질 의식 혹은 무의식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 아닐까? 아득한 과거 인류가 아직 문명사회에 진입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밤이면 동굴이나 움막에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불을 바라보면서 생존의 고단함과 피로를 잊으며 견뎠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멍의 습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의 원형질로 우리 뇌 속에 새겨져서 무의식 혹은 기저의식으로 루틴화 되었을 것이다. 뇌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초기화하는 어떠한 의식 상태의 긍정적 효과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또 그런 긍정적 효과를 자주 느끼고 체험한 사람은 피로감을 쉽게 이기고 더 활동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니 생존 경쟁이나 자손 번식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불을 단순히 생존 도구가 아닌 안식과 치유의 도구로 잘 이용할 수 있었던 개체들의 유전자는 자연이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자의식의 탄생과 더불어 그 자의식을 잊어버리는 특정한 의식상태도 병행하여 진화적으로 자연선택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뇌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초기화하는 어떠한 의식 상태의 긍정적 효과 또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수없이 다양한 현실의 정보들을 종합해서 하나로 꿰고 통합해서 자의식의 탄생은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과 번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대신 일종의 반대급부로 자의식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고통은 바로 실존적 고통이다. 자아를 중심으로 미래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게 되자 그저 자연적 소멸에 불과한 죽음 같은 현상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데 바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게 되는 실존적 문제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자아+미래=죽음이라는 필연적 진리를 타인들의 죽음을 관찰하면서 얻게 되자 그저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죽음을 문제시 삼는 존재는 인간만이 유일하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예로 들어 설명 했지만 이외에도 인간은 자의식을 중심으로 집단, 사회적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다양한 피로감과 고단함,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스트레스 해소방식의 방법도 아마 다양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자기 자신도 잊어버릴 정도로 즐겁게 놀 때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 중에 하나가 불멍이다. 또 생각이 없어지거나 줄어들 때도 마찬가지로 평온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하고 심지어 시간이 흐름도 의식하지 못한다. 내 의식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눈앞에 불만 아른거리는 상황은 자아의식이라는 주인의 입장에서 해방되어 구경꾼이 되는 상황이다. 구경꾼은 걱정이 없다.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부담 없이 구경만 하면 된다. 온갖 잡다한 걱정과 근심은 주인의 몫이다. 그러니 우리가 언제까지나 피곤한 주인 노릇만 하라는 법이 있을까? 가끔은 구경꾼, 손님이 되어 주인한테 다 맡겨버리고 나면 현실감각도 더욱 선명해진다. 불멍을 하고 나면 내 삶은 새로워지고 기운이 솟는다. 충분히 잘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을 바라보는 시간은 안식과 치유의 시간이다. 불을 바라볼 때 심각함과 복잡함을 내려놓고 자아가 해체되어 생각이 잡아당기는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은 자의식이 성성하게 살아있을 때 가장 무겁다. 자아라는 핵이 해체되면 생각의 중력은 사라진다. 불을 바라보는 시간은 온갖 상상력과 창조적 영감이 샘솟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시에 살고 있으니 불멍 할 곳이 없다. 엄마 혼자 계신 본가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피는 것이다. 기름보일러 방이라 불을 피워 난방할 곳도 없고 불로 음식 조리를 할 것도 아니지만 일단 불을 피워놓고 나무 타는 냄새가 나고 장작불이 타닥타닥 터지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해서 좋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장만해 놓은 장작은 너무 오래돼서 삭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해놓은 이 장작만은 절대로 쓰지 않았다. 땔감이 필요하면 동네 복숭아밭을 갈아엎은 곳에 가서 복숭아나무 줄기를 주워 와서 쓴다. 엄마는 그 장작들이 삭아서 벌레들이 파먹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애쓴 흔적이라서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난 그 장작들 한 팔 가득 들고 와서 아궁이에 넣어 가스토치로 불을 붙인다. 오랫동안 말라서 잘 타는 장작들 바라보고 있으면 엄마가 와서 보고 “왜 쓸데없이 불피우노. 나무 아깝게.” 소리친다. 아무래도 엄마는 불멍을 즐거움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장작들을 쓸데없이 불붙여 태워 없앤다는 잔소리 듣기 싫어서 나중에는 마트에 가서 캠핑용 참나무 장작 몇 자루를 사서 불을 피웠다. 내가 사온 장작으로 불을 피우니까 더 이상 엄마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음에 불 피울 때는 엄마도 불곁에 모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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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라슈 2026-01-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멍에 관한 진화심리적 분석은 나의 뇌피셜이다.
 

부산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부산지리는 네비게이션이 있어도 정말 힘들다. 차를 아예 가져 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봤다. 감천벽화마을에서 광안리로 가는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님 60대 초중반정도의 아저씨였는데 인상이 선하고 좋았다. 내가 먼저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택시 하신지 오래 되셨습니까?

 

, 몇 년 되었습니다. 공사에서 정년 퇴직하고 그냥 놀 수 없어 택시를 하게 됐어요.수십 년간 돈벌던 습관이 어디 가겠습니까? 하하, 택시 일이 재밌고 좋습니다.

, 잘 되셨네요


그래도 여행도 다니고 좀 쉬시고 하시지..


 저는 일 하는게 쉬는 겁니다. 택시 해서 월급 받으면 며느리한테 월 백만원씩 용돈을 주는데 정말 재밌어요. 내가 벌어서 누군가에게 용돈 주는 재미요. 며느리가 참 좋아합디다. 저희 며느리가 저한테 참 잘해요. 매일 전화해서 안부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 해주는데 저는 그게 너무 고맙습니다. 자주 찾아오기도 하고요. 며느리가 아니라 친딸 같아요. 그런 며느리한테 해줄건 별루 없고 저는 돈 쓸일도 거의 없고 아무래도 젋은 사람들이 돈 쓸일이 나보단 훨씬 많지 않겠어요. 자식도 키워야 되고 집값도 값아야 되고.. 건강이 허락할 때 까지 계속 택시일을 할 겁니다. 며느리 용돈도 계속 줄 수 있고.

 

 기사님 며느리 정말 좋은 시아버지를 두셨네. 10만원도 아니고 100만원이라니. 웬만한 알바 월급 아닌가. , 이분 며느리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었기에.. 기사님은 말을 이었다.

 

사실 얼마전에 저희 집사람이 대장암수술을 했어요. 근데 집사람 암수술 사실을 아들내외한테 알리지 않았어요. 걱정할까봐. 근데 잘한 것 같습니다. 자기들도 직장다니고 바쁘고 그럴텐데 괜히 알려서 신경쓰고 불편해할까봐요. 둘다 맞벌이 하는데 회사에 휴가내고 병원 왔다갔다 하는거 회사 눈치도 보이고 여간일이 아닐 겁니다. 집사람 수술 잘 됐고 잘 낫고 있습니다. 나중에 집사람이 완전히 나으면 그때 알려주려고요. 그 때 이야기해도 하나도 안 늦겠죠. 이해해 주겠죠. 담에 제가 아파도 또 그렇게 하자고 집사람하고 얘기도 다 해놨습니다. 하하.

 

 라디오 양희은의 여성시대에 소개될 법한 사연이었다. 아들과 며느리한테 알리지 않고 암수술을 해낸 기사님 부부. 그리고 기사님 본인이 아파도 역시 또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에 놀랐다. 세상에 이런 부모들도 있구나. 이분들은 진짜 부모였다. 그런데 나중에 부모님(시어머니)의 암수술 이야기를 듣게 될 아들 내외는 어떤 기분일까? 아들 내외는 어쩌면 굉장히 난처해 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며느리 입장이 더 난처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런 중대한 일을 말씀도 없이 상의도 안하고 숨기고 그러셨나고. 나는 그 기사님이 아들 내외에게 수술을 알려준 다음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지만 그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기사님에게 참 잘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해줬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부모님의 사랑이란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이 어릴 때는 아무 조건 없는 내리사랑. 자식이 컷을 때는 자식에게 본인들 걱정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들고 심신이 쇠약해지면 부지불식간에 자식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은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그 택시기사님 부부가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기원했다. 광안리는 봄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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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차가운 북서풍이 어김없이 불어오는 이 계절이 되면 늘 다시 찾아보는 그림이 있다. 바로 김홍도의 추성부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소장했고 가장 아꼈던 그림이라고 한다. 나는 올해 가을 내내 이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간 봐왔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해학적이고 서민적이었던 온갖 풍속화들과 달리 이 그림은 먹물 번짐 기법도 거의 없는 바싹 마른 갈필로 나뭇잎이 거의 다 떨어진 나목들이 거센 북풍에 시달리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림에서 싸늘한 냉기가 서려 나올 듯 스산하기만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추성부도는 보면 볼수록 그 그림 속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처음 봤을 때는 서글펐지만 자꾸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따뜻한 위안을 얻게 된다. 그림의 내용은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정경이지만 그 배경색은 따뜻한 파스텔톤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우리 같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서글픔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위안이라는 것은 그저 좋은 말이 아니라 공감한다는 것. 너도나도 우리는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고 그 슬픔을 언어와 문자와 그림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추성부도는 말년의 김홍도가 구양수의 추성부를 읽고 그 감상과 느낌을 그린 그림이다. 김홍도를 연구한 미술학자들은 추성부도를 김홍도의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다.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시기는 1805년. 61세때이다. 그 이후 김홍도의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홍도가 마지막으로 그린 이 그림의 영감을 제공한 구양수의 추성부란 무엇인가? 구양수은 중국 당나라때의 문장가로 고문진보에 그의 산문 추성부가 실려있다.


 추성부(秋聲賦). 말 그대로 秋聲(가을소리)에 대한 賦(송대에 유행한 산문형식). 쓸쓸한 가을 소리를 듣고 만물이 쇠락해가는 가을의 슬픔을 나타낸 명문장이다. 아래는 추성부 전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밤, 구양자(구양수)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서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구양자는 이 소리에 섬뜩 놀라 중얼거렸다.

“이상도 하구나, 처음에는 그 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더니 이내 음산하게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변하고 그런가 하면 갑자기 파도가 기운차게 바위벼랑에 부딪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 마치 놀라 파도가 한밤에 곤두박질치고, 비바람이 느닷없이 휘몰라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중략-

구양자는 하도 괴이쩍어, 동자에게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밖에 나가 알아보라 일렀다.

한참 뒤, 동자가 들어와 말했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눈부시게 희고 맑으며, 은하수 또렷학여 손에 잡힐 듯합니다. 사방 어디에도 인적이라곤 없으니, 그 소리는 분명 나뭇가지를 울리고 간 바람 소리입니다.“

나는 탄식하여 말했다.

”아, 슬프도다. 그 소리가 바로 가을 소리였구나. 기다리지도 않던 가을이, 누가 오라 하였기에 벌써 왔단 말이냐.“

-중략-

”젊어서는 그토록 붉고 곱던 얼굴이 어느세 늙어 고목처럼 되었고, 칠흑같이 검던 머리는 어느새 서리 맞은 듯 희어졌다. 금석처럼 단단한 바탕을 타고나지도 못한 몸으로, 덧없는 생명을 재촉하여 초목들과 더불어 부질없이 번영을 다투어 무엇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사람이 나고 죽는 것, 또 한때 성했다가 곧 쇠하여 스러지는 것이 누구의 탓이겠는가?

그저 자연계의 출렁이는 큰 물결일 뿐이니, 가을 소리를 탓하여 무엇 하겠는가.

밤이 깊었는가? 동자는 대답도 없이 머리를 떨군채 졸고 있다. 다만 들려오는 것, 사방 벽에서 벌레우는 소리만 직직직직. 그 소리 나의 시름을 달래 주려는 듯하네.


 김홍도는 왜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성부도를 그렸을까? 1805년 11월 29일 김홍도는 지인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로부터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가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차례 겪고 생사간에 오락가락했으니 오랫동안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중에 한 해의 끝이 다가오니 온갖 근심을 마음에 느껴 스스로 가련해 한들 어쩔수가 없습니다”


 조선 최고를 호령했던 위대한 화가 김홍도, 그러나 그도 이제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것이다. 김홍도는 한때 종5품의 충청북도 연풍 현감도 지냈지만 재산은 모두 말랐고 자식과도 멀리 떨어져 늙고 병들어 의탁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말년의 김홍도가 젊어서부터 유학 공부를 하며 외우다시피 했던 고문진보의 추성부를 이때 떠올린 것은 자연스런 일일듯싶다. 김홍도는 자신의 마지막 화혼을 이 작품에 쏟아부었으리라. 그림을 보면 그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물기가 적은 거친 갈필로 그려낸 배경은 조선의 평범한 양반 가문은 아닌듯하다. 아마 중국 송나라의 어떤 사대부집을 상상했을 것이다. 집 가운데 초로의 구양수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여기서 말년의 김홍도가 오버랩된다.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늙은 선비는 김홍도 자신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초로의 남자는 동자에게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정체를 알아보라고 한다. 동자는 서남쪽에서 나는 소리는 그저 바람이 나무에 스쳐 지나가는 소리일뿐입니다라고 한다. 초로의 남자가 들었던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추성부 원글을 다시 보면 그 소리는 대단히 시끄럽고 요란하고 두려운 소리로 한껏 과장되어 묘사되어 있지만 실은 늦가을 밤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뒹굴고 서로를 마찰하는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구르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다. 가을의 소리, 우리는 평소 그 소리에 무심하지만 바람 부는 날 자세히 들어보면 온갖 가을 낙엽이 도로에 구르는 소리는 전혀 예사롭지 않다. 쏴르르르 쏴아악.. 바짝 말라 무게도 거의 없을법한 낙엽들이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세상과 풍경을 뒹굴고 있다니.. 깊고 조용한 가을, 늦은 밤 갑자기 몰아친 북풍에 온갖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흔들리는 소리는 구양수의 표현대로 천군만마가 돌진하는 듯 두렵고 괴이한 소리로 들릴 것은 분명하다. 누군들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구양수는 황급히 집안의 동자를 불러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시키지만 돌아오는 동자의 대답은 그저 나뭇가지 사이의 바람 소리일뿐입니다(聲在樹間). 구양수 탄식하여 말하길, 아 그소리가 바로 가을의 소리였구나. 기다리지도 않던 가을이, 누가 오라고 하였기에 벌써 왔단 말인가.


 세월이 흐르는 소리였고 여름내내 치열하고 푸르게 삶의 활력을 뿜어내던 그 싱싱한 산천초목이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사그라져가는 비명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중년 이후 노년에 접어들어 몸은 병들고 하는 일들은 힘에 부쳐 정신은 나날이 흐려져 가는데 먼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커져 가는 시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올랐다.


“마흔 살에는 의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로 들으면 순순히 이해되었으며,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따라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공자가 자신의 인간적 성장을 담담히 표현한 이 대목에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이순(耳順), 예순살에 귀로 들으면 순순히 이해되었다는 구절이다. 주희의 주석을 보면 耳順은 듣는 것을 모두 통달한다고 되어 있다. 사람의 일, 세상의 그 어떤 일이나 사건을 들어도 그 원리나 이치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경지다. 그러나 나는 이순을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이순의 순을 한자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게 순하다, 순응하다, 순종하다의 뜻으로 본다면 이순은 귀가 순해진다. 듣는 것이 순해지고 순응하게 된다의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공부해 왔던 단원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시기는 그의 나이 예순,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이순의 나이와 같다. 김홍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에 능했고 유학의 학문도 꽤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가 평생 유학이나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 군자의 모습이 되기 위해 수련했다면 이순의 김홍도는 세상일이나 사람의 일 어느 것 하나도 순리를 잘 파악할 수 있을 나이이리라. 그러나 이순의 김홍도가 순리대로, 순응하여 들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소리, 바로 추성, 가을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 소리는 자신이 직면한 죽음을 예고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순의 김홍도도 거슬릴 수 밖에 없는 소리다.


 추성부도를 그리기 전 김홍도는 나이 들고 병들어 의탁할 곳 없었으며 객지를 떠돌다가 늦가을 밤 구양수가 들었던 그 가을의 소리를 김홍도 자신도 들었으리라. 자신의 남은 운명을 직감하고 김홍도는 마지막 붓을 들어 올렸다. 늦은 가을밤, 홀로 앉아 혼신의 힘을 다해 거친 갈필로 붓을 움직이는 김홍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관직까지 내려주었던 성군 정조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떳고 자신의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비단을 들고 줄을 서던 사대부 양반들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병마에 시달리며 자식의 학비조차 도울 수 없고 지인들에게 의탁하며 남은 삶을 연명해야 하는 처지. 구양수의 추성부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깊이 음미한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 왼쪽에 추성부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추성부의 마지막 두 글자는 별도의 공간에 강조하듯 써 넣었다. “歎息”(탄식!)




 얼마전 나태주 시인이 나온 방송을 우연히 보았다. 시인은 딸에게 “ 내 묘비 앞에서 슬퍼하지 마라, 나의 부재를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렴” 시인의 서늘한 이 한마디에 나는 찬물에 세수한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다. 메멘토 모리.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관찰해서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경험적 지식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주저한다. 내가 언젠가 죽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 가능성이 나에게 지금 100퍼센트 확률로 닥쳐올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부정성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고 싶어한다. 사실 우리 삶의 모습이 그렇다. 종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며 그렇게 살다가는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허덕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버린다. 어차피 죽을 건데 이짓은 해서 뭐해라고. 그래서 우리의 청춘은 소멸과 죽음을 믿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열정적이다. 그 열정은 인간의 삶과 문명을 이끌어온 주동력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죽음과 소멸의 공포는 추상적이고 멀리 있을 때 더 커진다. 죽음과 소멸을 더욱 더 멀리 피하기만 할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육체는 소멸의 가능성이 점점 더 농후해지기만 하는데 말이다.그러므로 여기서 필요한 것은 소멸을 오히려 다 자주 떠올려보는 역설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주 생각해보고 생의 무상함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천천히 깊에 들여다보고 관조함으로서 삶을 더 선명하게, 더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남방불교의 수행법 중에는 생명이 꺼진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부패 되어 백골화 되어가서 한 줌 먼지로 사라지는지 그 과정을 끊임없이 떠 올리는 명상법이 있다. 2,600년 전 붓다는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였는데 붓다의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세상 모든 것의 무상함을 직시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약 1년뒤에 죽는다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지극히 지엽적이고 사소하고 의미없는 싸움과 논쟁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이유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늘 상기한다면 단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지 않은가. 인지과학쪽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상실과 부정적인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다고 한다. 슬픔이 인지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계속 남아있다는 것. 슬픔은 집중력을 강화시키고 실수로부터 배우도록 만들어 일의 생산성도 높여준다고 한다. 죽음과 소멸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찬찬히 관조 해보는 것은 삶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필멸하기 때문에, 내가 유한 하기 때문에 내 행동과 생각의 틀을 완전히 새로 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 주변에 가족, 친구, 동료, 지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야되지 않을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불안하다. 거대한 강은 바다로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기에 여유롭기 그지없지만 폭우에 미친 듯이 흐르는 흙탕물은 돌과 바위에 이리저리 부딪히고 어디로 갈지 몰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어 황망하기만 하다. 삶에 목적은 없지만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 잘 안다면 우리는 나중에 자연이 내미는 소멸이라는 청구서를 받아도 참 잘 썼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홍도의 추성부도가 따뜻한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도 나도, 우리 모두 같은 가을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가을에 들리는 소리가 이제는 편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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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닮고 싶다


국가하천 낙동강변에서 물빛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거대한 물줄기는 소리도 없이 흐른다물빛은 순해지고 햇볕은 물에 부서져 눈이 부시다. 강변 낮은 웅덩이에는 팔뚝만한 가물치가 떼 지어 헤엄치고 개구리, 두꺼비가 알을 낳는다. 산수유, 매화가 피고 버들강아지 솜털은 통통해진다. 이곳에 오면 세상사 일은 잠잠해지고 나는 어느새 차분해진다. 날뛰던 기억과 추억과 불안은 여기선 힘을 못 쓴다. 봄이 오는 강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하다. 강물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흘러가는데 나는 항상 무얼 망설이는 것일까? 강은 제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흐른다. 그 흘러가는 모습은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 나도 저 낙동강처럼 이유없이 살아도 편안해지고 싶다. 저 강을 닮고 싶다


2025.3월. 봄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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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구걸할 때, 사랑을 받는 것으로 여길 때, 내가 준 사랑에 대해 보답을 받으려고 할 때, 사랑은 갈등과 눈물의 씨앗이 된다.

​ 사랑은 시작되는 순간 이미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존재에서 느끼는 기쁨을 통해 나는 이미 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래를 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를 바라고, 그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며, 그러한 바램이 충족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원망한다. 그럼으로써 그 관계는 착취로 변질된다.

​ 사랑이 착취와 거래로 변질되는 이유는 '나'를 지키려는 욕망 때문이다. 지켜야 할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 사랑을 받아야만 '나'의 결핍이 채워진다는 착각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지킬 수도 없고 채울 수도 없으며,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이 텅 비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투심은 무명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감정이다.

​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해서 충족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결핍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텅 빈 그 자체로 충만하다. 사랑받고 싶은 이유는 생각과 기억의 다발에 불과한 '나'라는 허상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허상은 지킬 필요도 없고 채울 필요도 없다. 허상인줄 알면 그뿐이다.

​ 실체 없는 허상인 '나'를 타인의 사랑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은 소금물로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는 것과도 같다. 사랑을 갈구하는 한 끝없이 목마르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나'는 텅 빈 피리이기에 어떤 바람도 나를 채울 수 없고 그저 통과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 뿐임을 모르는 것이다.

​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자립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의존하지 않고, 아무런 기대와 조건 없이, 지금 여기에서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실체화하여 그것이 영원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립은 사랑의 필수 조건이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미소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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