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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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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물질과 생명과의 관계를 다룬 책이라면 <정신과 물질>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에는 이 두 글이 하나의 단행본 속에 편집되어 있지만 <정신과 물질>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달리 과학자인 슈뢰딩거의 철학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보다 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을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지만 결코 소설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게다가 만연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2번 정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책이다. 물론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다만 번역자가 좀더 세심하게 정확한 한국어 문장으로 다듬었더라면 훨씬 더 완벽한 번역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다분히 신비주의적 색채로 가득한 이 책은 독자에게 적지 않게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바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공리가 과연 이 세상과 우주, 그리고 인간을 설명하는 유일무이한 원리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과 반성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인 것이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문체로 “과연 인간의 정신은 물질세계의 어디에 존재하며 정신과 물질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슈뢰딩거가 제시하는 대답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무리 물질세계(인간의 감각과 뇌를 포함하여)를 연구하고 탐구해 들어가도 결코 의식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의식과 물질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우주 그 자체가 물질이며 정신이다. 또 객체와 주체의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부분- 

 

 사실 슈뢰딩거가 주장하는 이러한 일원론적인 세계관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 이래 물질과 정신, 현상과 실재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철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서양문명을 이끌어 왔으며 그러한 문화적 토대에서 근대과학이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스피노자 같은 범신론적인 일원론철학 또한 분명히 존재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이원론은 설자리가 없었다. 인도철학과 불교가 그러하고 유교와 도교에서조차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유교 문화권의 제사 같은 의식을 물질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미신적 숭배로 이해하는 것은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 생기는 오해에 불과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제사는 귀신 숭배가 아니다.
 
 아무튼 슈뢰딩거가 물질과 별개로 존재하는 정신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크게 놀랍지 않지만 양자 물리학자였던 슈뢰딩거가 일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현대 과학이(특히 물리학)발견한 사실들 때문이라는 점은 매우 놀랍고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슈뢰딩거는 신(인격신이 아닌)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그 근거로 내걸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슨은 자신의 저서<만들어진 신>에서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과학과 생물학을 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과학은 신의 부재도 증명하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중의 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독자들은 이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내가 신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슈뢰딩거는 결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신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정신과 의식이 물질세계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외치고 있을 뿐이다. 과학과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적 연구 성과의 지원을 받는 종교의 가능성을 슈뢰딩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원하는 과학적 연구 성과는 어떤 것일까? 

 

  제3장 “객관화 원리” 라는 글에서 슈뢰딩거는 실재세계가설을 검토 한다. 이 세계는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가, 혹은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이 우주가 유의미한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당대 양자물리학이 발견한 성과를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 장에서 슈뢰딩거는 하이젠 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근거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과학적 세계상에서 자연의 영역에서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식을 배제함으로서 얻어졌고 실재세계는 인간의 의식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것을 ‘실재세계가설’ 이라고 하는데 슈뢰딩거는 이 가설이 무한히 까다로운 자연의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 우리가 채택한 일종의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과학의 세계가 너무 끔찍하게 객관화되었기 때문에 정신과 정신의 직접적인 감각들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정신과 감각이 물질적 세계를 떠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궁극적인 과학적 탐구와 연구를 진행하더라도 결코 이 세계에서 의식과 정신은 그 구성물 속에 주소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공간 속에서 정신이 사는 곳을 지적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의 인격과 정신이 각각의 몸속에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물학과 생리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우리의 감정(喜怒哀樂)의 구체적 실체를 우리 신체 속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슈뢰딩거는 확언한다. 우리의 인체에 존재하는 것은 다만 신경다발과 그 신경 속을 오고 가는 전기펄스 뿐임을 확인한다면 슈뢰딩거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우리가 느끼는 각종 감정들은 과연 전기 신호에 불과한가? 형광등에 흐르는 전자들의 흐름과 동일한 전자 신호가 인간의 감정임을 인정하기 싫다면 우리는 슈뢰딩거의 주장에 설득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모순은 이제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현대 양자물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그 대상은 관찰자와 절대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양자물리학에서는 공공연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증명한다. 물론 슈뢰딩거가 살았던 당시에 이 사실은 최신의 물리학적 발견이었을 것이다. 대상을 관찰할 때 항상 그 대상은 관찰자의 관찰행위를 통해 변형되고 변질된다는 것이다. 대상이 관찰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역발상도 당연히 성립한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를 가르는 경계선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것이다. 슈뢰딩거는 일상에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주관과 객관의 구별은 받아들여야겠지만 철학적 사고에서는 그 구별을 버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동일함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로 제3장을 끝맺는다.

 

“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

 

 슈뢰딩거의 이 인상적이고 강렬한 한마디! 이 한마디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 철학, 역사, 과거와 미래가 융합된 도가니 같다. 슈뢰딩거가 말하는 “한 번”은 삶이 한번뿐이라는 생명의 유한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 번”을 “한 개”, 혹은 “하나”로 치환해 보면 이 인상적인 구절의 해석이 훨씬 더 풍부해진다.

 

 이제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은 이 세상을 설명하는 힘을 상실한 것이다.

 

  제4장 “산술적인 역설, 정신의 단일성” 이라는 글은 <정신과 물질>에서 가장 신비로운 색채가 강하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감각하고 지각하고 생각하는 자아를 과학적 세계상 속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이유를 슈뢰딩거는 자아(의식, 정신) 그 자체가 곧 세계상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다. 더 나아가 인간들 각각의 정신의 다수성은 다만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정신뿐이라는 더욱더  놀랍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인도의<우파니샤드>철학과 셰링턴의 안구실험에 근거하여 펼치고 있다. 우리의 신경계에는 오로지 각각의 감각을 담당하는 신경계로만 구성되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지방정부만 있고 중앙정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중앙정부(정신과 의식)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낀다.


 슈뢰딩거는 정신은 본성적으로  ‘단수’ 임을 강조한다. 다른 표현으로 정신에게 붙을 수 있는 수는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은 물질적 세계과정이 일어나는 유일한 무대 혹은 세계과정 전체를 담고 있는 그릇이나 통이라고 한다. 이것을 슈뢰딩거는 ‘정신의 이중성’이라고 했다.

 

 정신은 이 세상이라는 작품 전체를 만든 작가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이라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인물 혹은 부속물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세계상을 만든 장본인인 우리 자신의 정신을 세계상에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납득할 만한 세계상을 구성하지 못했다는 이율배반성이 바로 정신의 이중성 이라는 이야기다.

 

 정신과 감각을 배제한 과학적 세계상에는 색깔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고통도, 즐거움도 없다. 인간의 신체를 아무리 분해하고 분석해 보아도 그 곳엔 오로지 원자와 전자들의 이합집산만이 존재할 뿐 우리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의 자리와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과 인식 없이 이 세상을 의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인간의 정신과 의식과 감정은 분명히 이 물질적 세계에 존재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정신과 물질>의 제4장은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몇몇 문장들 때문에 슈뢰딩거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아무튼 이 4장은 슈뢰딩거가 말하는 신비주의의 정점이라 할만한다. 그러나 과학을 떠난 신비주의가 아니라 과학의 지원을 받는 신비주의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제4장에서 슈뢰딩거는 “정신이 곧 우주!”임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혹시 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종교적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하는 글이다.


 제5장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제6장은 인간 감각의 신비로움을 다루고 있다. 과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종교에 귀의한 사람이 적지 않다. 슈뢰딩거는 결코 종교와 인격신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양자물리학을 통해서 바라본 세계의 실체가 우리의 직관과 상식을 뛰어넘는 신비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것은 아직 인간이 과학의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슈뢰딩거의 말처럼 과학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과학은 더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11년 작성

 

 

 

 

어쩌면 미래에 뇌과학과 인지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제거주의와 물리주의가 옳은 것으로 판명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뇌와 정신의 모든 정보를 수량화, 데이터화, 객관화하여 컴퓨터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슈뢰딩거가 <정신과 물질>에서 주장했던 것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인가..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슈뢰딩거가 인도 베단타 철학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2015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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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2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2011년에 읽었는데 제대로 읽은 듯한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내용이 어려웠습니다.

파트라슈 2015-05-29 06:47   좋아요 0 | URL
문장이 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좀 어려워도 참고 읽어 봤습니다. cyrus님, 서재 둘러보니 대구분이시네요. 저도 대구 삽니다.
 
인간과 분자
프랜시스 크릭 지음, 이성호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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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왓슨과 함께 1953년 인간 DNA구조가 이중나선임을 규명한 생명공학자 가 바로 프랜시스 크릭이다. 사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이라는 책은 좀 실망이었다. <이중 나선>은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구조를 규명해 나가는 과 정을 그린 책인데 병원 입원 기간 중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읽은 책이라서 그런지 내용도 머리에 별로 남지 않고 특별한 감흥도 없었다. 다만, 이 책에서 계속 언급 되는 왓슨의 연구동반자 프랜시스 크릭과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두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잊혀지지 않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 회절연구로 DNA 구조규명에 공헌한 여성물리학자로서 요절하였고 프랜시스 크릭은 DNA구조 규명이후에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치다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에서 프랜시스 크릭은 늘 활달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으며 때로는 괴팍한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되어 있는데 크릭의 저서<인간과 분자>에서도 크릭의 그러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과 분자>는 지난 2010년에 궁리출판사에서 이성호씨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궁리출판사에서 나온 과학책들은 모두 믿을만하고 특히 번역이 훌륭하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이런 책들을 열심히 만드는 이런 출판사들이 있어 행복하다.

 

<인간과 분자>는 프랑스의 생화학자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을 떠오르게 한다. 둘 다 생기론(生氣論:생명현상의 발현이 비물질적인 생명력이며 자연법칙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원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이론)에 반대하고 생기론을 타파하기 위한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을 읽은 사람이라면 프랜시스 크릭의<인간과 분자>가 마치<우연과 필연>의 축약본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책의 내용과 관점은 거의 흡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현상을 이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인 물리, 화학현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말한 생기론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생명현상을 “생명의 신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신비가 바로 생기론의 핵심인 셈이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현상에

“신비” 현상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프랜시스 크릭은 이 책에서 주장한다. 우리가 신비한 현상이라 부르는 것들은 다만 아직까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이론과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 이미 생명현상분야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또 무엇이냐며 크릭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크릭의 이러한 자신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양자물리학과 분자생물학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크릭은 당시의 양자역학과 생화학 지식이 이 책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반생기론적인 생물학의 확실성의 기반을 제공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당시의 생물학, 화학의 이론적 기반이 언젠가는 다소 부정확한 것으로 드러날 수 도 있지만 과학자들은 그러한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음에 주목하라고 한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이지만 과학적 방법에 회의를 가졌다면 오늘날의 현대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릭의 주장이 일개 생물학자의 기고만장한 과학예찬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크릭은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대단히 견고한 기반으로 작용하는데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다. 과학적 지식이 아니었다면 종교적 세계관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자신감은 충분한 근거가 있고 억지스럽지 않다.

 

 

 크릭은 사람들이 생기론적 세계관을 원하는 이유로 생명현상에서 관찰되는 고도로 복잡한 패턴이나 현상들이 인간의 직관과 이성으로 아직까지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무기물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러한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실험으로 반증되었다. 무기물로 유기분자의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고집스런 일부 종교인들은 여전히 인간들을 신의 피조물로 여기는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크릭은 이러한 믿음이 엄연한 실재적 지식인 물리, 화학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 종교적 도그마를 깨부수는 작업을 당시의 분자생물학적 연구 성과에 기대어 진행한다. 생명현상에서 분자생물학이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생명현상에서 생기론이 자리 잡을 곳은 전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선택과 진화론이 우리의 새로운 문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크릭의 주장은 단호하고 명쾌하다. 크릭은 생기론은 죽겠지만 그 유령은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생기론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크릭이 타파하고 싶었던 것은 생기론과 이와 관련된 기독교 사상의 일부였고 그는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에도 반대했다. 물론 나도 크릭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과학적 방법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배제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학이 또 다른 종교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2011년 7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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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과학의 함정 -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
알바 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갤리온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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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없으면 의식이 없고,

의식이 없으면 세상이 없고,

세상이 없으면 의식도 없다.

 

의식은 세상이 존재하는 것,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한다. 그냥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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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궁리하는 과학 6
자크 모노 지음, 조현수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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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랑스의 분자 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과학철학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받은 충격과 감동은 워낙 강력한 것이어서, 책을 완독하고 1주일이 지나서도 아직 책을 책장에 집어넣지 못하고 다른 책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인류의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자크모노의 과학 도그마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과학철학의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평범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바라본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그 평범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크 모노가 쏟아내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들은 내게 친숙하고 습관적이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주었고 그럼으로써 근본적으로 내게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나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면 친숙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어렵다. 그리고 그 친숙했던 세계관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 책은 내게 생명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안(開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왜 혁명적일까?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과 사상의 근원부터 파고들어 마침내 그 지식과 사상의 시초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류의 사상과 종교, 철학의 시원을 신(神)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로부터 연유했다고 주장하는 모노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공리(公理)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과학적 객관성이다. 그러나 모노가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의 실체는 내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과학적 객관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모노가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의 공리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과학에서 시작한 인과율과 필연적 자연법칙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노는 생명의 기원이 극도로 미세한 물질들의 우연적 조합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은 정확히 필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그 우연의 시작에 어떤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구상의 원시바다에서 최초의 생명이 우연히 발생하게 된 것은 마치 쓰레기장에 태풍이 휘몰아쳐 그 쓰레기들이 보잉747비행기로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마찬가지이거나 그 확률보다 훨씬 더 희박하다. 모노의 말대로라면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이 탄생할 확률도 거의 0에 가깝다.

 

 이 확률들은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들이 저절로 보잉747로 조립될 확률보다도 더 희박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한다면 얼마나 일어나기 힘든 것이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건들의 선험적 출현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에는 분명 생명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모노의 철학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은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인 존재임을 직시하자는 것이 모노의 주장이다. 우주에서 생명과 인간은 인간이 아는 한 단 한번 탄생했고 인류의 출현 또한 단 한번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써 그 자체로 모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고 하는 모노는 이제 그동안 인간존재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고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나 신의 의지에 의해 탄생했다는 종교적이고 물활론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자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 세계와 우주의 주인도 아니며 인간존재의 근원도 필연이 아닌 그저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차갑고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은 한 점의 티끌 보다 더 미미한 존재이며 한없이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관과 생각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불안하도록 만든다. 모노는 이 사실이 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성향과 상충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노는 운명의 존재에 대한 진한 향수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명에 대한 진한 향수애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과 사상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이런 운명에 대한 향수가 중세까지 서양을 지배했던 목적론적 세계관이었고 근대과학은 이 목적론적 세계관을 인과적 세계관으로 대체했다. 모노가 말하는 우연은 인과적 세계관의 절정이다.


  모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생명의 진화현상은 더욱 놀랍다. 보통 사람들은 진화현상을 생명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써 생명과 물질을 초월한 특정한 진화의 법칙이 존재하여 그것이 생명을 진화하게 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필연적 진화론을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노가 바라보는 생명의 진화 현상은 그저 러시안 룰렛게임처럼 양자적 요란의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

 

  즉, 생명현상의 본질은 진화가 아니라 DNA의 불변적 자기복제 시스템이며 진화는 이 DNA의 불변적 자기복제 시스템의 부차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모노의 의견이다. 이 모노의 의견은 DNA에서 RNA로만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만 가능하다는 정보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이라는 엄연한 생물학적 연구 성과로부터 뒷받침된다. 다시 말해 기후나 자연적 변화가 생물체 세포내의 유전자인 DNA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DNA를 구성하는 극미한 양자들의 우연적 요란이 DNA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DNA는 돌연변이를 낳게 되는데 이 돌연변이가 개체 생명으로 성장하여 환경과 조화하여 생존할 수 있다면 이 돌연변이가 곧 진화현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극미한 양자세계의 우연적 요란은 바로 양자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미시적 원자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뉴튼의 물리학처럼 거시세계에서 보이는 인과율과 기계론적 필연성은 미시세계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원자와 전자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확률게임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고전물리학의 최후를 장식했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분자생물학의 성과를 보면 아쉽게도 아인슈타인의 유언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생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정보의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이라는 모노의 주장은 혁명적이고 충격적이다. 진화란 유전정보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고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면 그동안 진화란 것은 생명체내에 내재된 고유한 필연의 법칙의 발현으로 여겨왔던 내 인식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는 또 하나의 혁명이다.

 

  이제 모노가 보여주는 생명의 참모습과 진실을 접하고 나면, 눈을 들어 창 밖에보이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새 한 마리도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툭하면 자연을 살리자, 환경을 살리자라는 오만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하리라. 인간은 이 우주의, 지구의 주인도 아닌 그저 길가의 풀 한포기와 같은 우연적 운명이며 자연은 더 이상 인간들이 죽이고 살리고 자시고 할 노예적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운명에도 무관심하다. 자연과 인간이 존재하는데 결코 어떤 목적이 있을 수 없음을 직시하고 나면 비로소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생명과 자연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의 운명이 결코 우주를 초월한 절대자가 미리 써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장의 부품들이 보잉747로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같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노는 분자생물학에 근거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지만 그가 의지하는 분자생물학이 결코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이 아님을 지적한다. 모노는 분자생물학에서 지식의 최전선, 즉 미지의 수수께끼 영역으로 최초 생명체의 기원, 인간의 중추신경계(뇌 포함), 유전암호의 기원 등을 들고 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단백질, 그리고 그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분자구조가 왜 그렇게 생겼고 그것이 어떻게 기원했는지, 또 그 아미노산의 분자구조 순서를 결정하는 DNA가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해 현대 과학과 생물학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책이 출간된 1970년 이후 40여년이 지났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궁이다. 21세기 블루오션은 바로 분자생물학이 될 것이다.

 

  모노가 설명하는 리보솜과 박테리아 퍼지 바이러스의 재구성,  단백질 분자들의 입체 특이적 결합력, 알로스테릭 효소의 피드백 촉매작용, 그리고 생체세포들 간의 합목적성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의지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리고 이 책의 본질을 모르고 독서를 시작했던 사람은 이 희한한 생명체의 작동방식과 진실을 소개하는 모노의 본심이 필경 초자연적인 의지와 운명을 끌어들이고자 함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오해는 순전히 모노의 글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모노의 글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하는 미스테리 소설처럼 독자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에 떨구어 놓는다. 그만큼 그의 글은 재미있다. 물론 약간의 모호함과 난해함이 매끄러운 독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모노의 글은 매력적이며 흥미롭다. 또 그의 글에는 이 짧은 독서평으로는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가 넘쳐난다.


   모노의 글을 읽고 초월적인 神的 의지의 출현을 바랐던 독자들은 모노의 철저한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했다. 그러나 모노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객관적 과학적 공리에 의지해 나간다. 그리고 그는 섣불리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의 문장에 우글거리는 “나” 라는 1인칭 주어의 반복적 등장은 확신에 찬 그의 문장에서 겸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한편의 지독한 도그마에 빠진 종교경전을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도그마 말이다.

 

  과학책으로써 이 책만큼 재미있는 책을 읽어 본적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노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위험해 또 하나의 과학 근본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모노의 일관적 태도와 객관적인 설득력에 근거한 압도적인 위력에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할, 아니 그렇게 생각할 그 어떤 이유도 필연성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세계가 어떤 원인자를 가져야 할 필연성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강력한 백신이다.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내가 읽은 책 중에 최고의 책이며 최고의 지적 희열을 제공한다.

 

 분자생물학에 생소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알로스테릭 효소의 메커니즘 설명부분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데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알로스테릭 효소 부분은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책의 전체적 내용과 모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만화로 쉽게 배우는 생화학>  김성훈 옮김, 성안당 출판사, p163~212

 <내몸안의 작은 우주, 분자 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저, 황소연 옮김, 전나무숲 출판사p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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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최근 ‘소스 코드’라는 영화를 재밌게 보았다. 이 영화의 주제인 평행우주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양자역학 사고실험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양자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이다. 슈뢰딩거는 볼츠만, 맥스웰과 더불어 양자역학의 창시자중에 한사람으로 꼽히는데 원자핵 주변에 존재하는 전자의 발견확률을 구하는 파동함수의 창시자로서 더 유명하다.

 

  엄격하고 냉철한 과학적 이성과 수학으로 무장한 이론물리학자인 슈뢰딩거.   양자물리학자가 바라본 생명현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즉, 생물학의 제반 지식과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한 이론물리학자가 자신의 주특기인 물리와 화학을 기반으로 한 생명현상 그 자체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가 주요내용인 셈이다. 이 책은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기 전에 씌어진 탓에 슈뢰딩거는 염색체 숫자를 48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간 염색체의 숫자는 모두46개로서 이는 오늘날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또 슈뢰딩거는 인간 유전자를 단백질로 예상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오래전에 밝혀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점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오류가 이 책의 장점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옮긴이 전대호씨의 서평처럼, 이 책은 제대로 사변적인 책이다. “가장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처럼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겨우15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읽은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에 필적하는, 아니 그 이상의 영감과 감동을 받았다. 자크모노는 모든 생명현상과 진화의 본질을 필연이 아닌 우연적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 마치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모든 생명활동의 본질을 이기적인 유전자의 생존으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슈뢰딩거는 ‘원자들은 왜 그토록 작은가?’ 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생명에 대한 물리학적 탐구를 시작한다. 왜 우리는 개별 원자들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개별 원자들의 무질서한 열운동을 극복하고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다량의 천문학적인 수량의 원자들의 집합체, 즉 인간 신경계인 뇌가 될 수밖에 없음을 슈뢰딩거는 몇 몇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또,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의 기적적인 영속성과 안정성을 물리법칙과 양자역학 법칙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전물질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분자는 분자 그 자체의 고체적 안정성에 의해 원자들의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분자적 열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가 됨으로써 영속성과 영구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인 DNA가 기체나 액체가 아닌 고체임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생명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나 직관과 많은 차이가 난다. 한마디로 말해 DNA는 고도의 유전적 암호 정보로 짜여진 비주기적 고체 덩어리, 즉 금속이나 돌과 같은 단단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DNA가 단단한 고체가 아니라면 수 십 억년을 거치면서도 그 원형을 그대로 기적적으로 유지한 점을 설명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슈뢰딩거의 해석에 실망할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생명의 본질이 겨우 고체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살아있는 세포 속에 존재하는 DNA가 그냥 단단한 분자결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당장 나 자신조차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생명과 유기체의 본질을 단순하고 명확한 물리적 법칙만으로 움직이는 고체분자덩어리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슈뢰딩거는 물리학자이면서도 생물에 대해서는 적어도 환원주의자로 치부할 수 없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로 정의한다. 생명현상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 즉 끊임없이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로 보고 있는데 이 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크게 벗어난다. 즉, 우주의 본성은 끊임없이 무질서한 상태로 움직이는 경향을 가지는데 반하여 생명은 끊임없이 질서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생명은 우주의 물리적 질서에 반하는 현상인 셈이다. 생명체의 노화는 우주물리법칙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작은 원자 집단인 유전자들의 놀라운 영속성을 양자역학의 법칙으로 설명한 슈뢰딩거.

그는 물질과 생명의 간극을 초월적 법칙이나 진리가 아닌 일상적 물리법칙으로 이었다. 물질과 생명의 이음새는 결코 우리가 모르는 초월적 법칙으로 메워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가 말하는 그 물질과 생명의 이음새는 여전히 우리의 직관과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정신에 대한 지식은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슈뢰딩거는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이 책에서는 생명을 논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다루고 있다. 인간 정신과 의식에 대해 슈뢰딩거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이 책의 후기에서 슬쩍 내비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주의적 관점은 그의 또 다른 책<정신과 물질>에서 제대로 다뤄지고 있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 또한 이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처럼 제대로 사변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 현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한다. 비록 생명을 전공한 전문학자의 저술은 아니지만, 이 책이 후대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 영감과 감동은 지대하다. 특히 DNA이중나선을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슈뢰딩거의 이 책<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생명의 비밀을 풀고 싶은 강한 욕구와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이 후대 분자생물학의 폭발적 발전의 기폭제와 자극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 대해 명쾌하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생명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말하는 생명현상에 대한 서술만으로는 생명현상에 대한 제대로 된 그림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슈뢰딩거는 그토록 작고 약해 보이는 유전물질(DNA)도 물리와 화학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바라보는 생명에서 생기론적 환상은 

찾아 볼 수 없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을 궁극적으로 질서로부터의 질서로 생각했다. 유전물질이라는 질서에서 또 다른 유전물질로의 질서 말이다.

 

   이 책은 워낙 분량이 적고 여러 가지 비유를 많이 써서 저자의 원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생명의 비밀을 조금씩 엿본 것 같은 쾌감과 생명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책은 지금까지도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그 해석과 의견이 분분한 만큼 확고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하고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진정한 고전이다. 생명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필독서 중에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2011.08.02 patrache

 

 

ps: 슈뢰딩거의 또 다른 책 <자연과 그리스인>,<나의 세계관>은 영어 원서를 구입해 놓고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물질과 정신>과 합본으로 되어 있는데 <물질과 정신>을 읽고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과연 슈뢰딩거의 <물질과 정신>을 신비주의로만 치부할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슈뢰딩거의 저작들은 내 독서의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다.

 

올 여름엔 책 구입 좀 줄이고 책장에 쟁여놓은 책 좀 해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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