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재를 돌아다니다 보면 주인장의 민낯이 궁금할 때가 있다. 바지런 피우며 성실히 글을 올리는 이 사람은 어떤지, 웅숭깊은 글 솜씨를 보여주며 쉽게 이내 맘 떨리게 하는 이는 어떤지에 대한 그런 저런 궁금함에서다. 짧은 문장 하나 만으로 가슴에 아로새겨진 사람이 있고 장문으로 부족한 교양을 다습게 해주는 사람도 있다. 서재의 대문에 올린 사진 하나만으로 눈을 끄는 사람이 있고 필명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다들 어떤 사람일까. 혹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많은 지극히 아름다운 사람은 아닐까. 한번쯤은 그대들을 만나고 싶다. 마음이 푼푼해지길 바라며. 언제 봐도 슬거울 사람들일 그대들의 상상화(想像畵)나마 곡진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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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 Night and Da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새벽에 일어나 티비를 트니 '밤과 낮'을 막 시작하려 했다. 자세를 고치고 티비에 집중한다. 영화의 얼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나른할지도 모르는 전개 방식이 걱정됐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쉽게 와닿고 적잖이 유쾌했다. 다만 티비 버젼이라 그런지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란 작품이 뿌옇게 처리된 것과 욕설이 중간중간 끊기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란 작품은 4년 전쯤 오르세에서 친구와 보았다. 이 민망한 그림은 뭐냐며 터부시하면서도 그 치밀한 묘사에 계속 눈이 갔다. 4년 전에도 미술 관련 지식이 풍부했다 자부했던 나는 쿠르베가 누군지 잘 몰랐다. 무식을 감추기 위해 수사학만 넘치던 시절이였던 듯하다. 쿠르베가 실존하지 않기에 천사와 악마를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주의의 거장인걸 감안해도 이 '버자이너 모놀로그'같은 치밀한 그림은 썩 아름답지 않다. 영화에선 이 작품을 두고 자그마한 충돌이 일어난다. 김영호와 같이 갔던 여자가 '인류의 기원'이라며 작품을 칭하자 김영호가 그녀의 잘못을 수정해주는 과정에서 홍상수식의 묘한 비틀기가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 그림의 음탕함에 불편을 느끼는 김영호의 머뭇거림과 예술은 신성하다는 여인의 의뭉스러움은 둘 사이의 역학 관계를 다시금 뒤집어 놓으며 묘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런 식의 비틀기는 자주 일어난다. 이선균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오히려 너무도 직접적인 비틀기가 나타나 약간 불편해지기까지 한다. 영화를 계속 보면서도 여주인공이 예쁘다.. 싶으면서도 누군지 도통 모르는 정식적 해리 현상을 겪었다. 검색을 해보니 박은혜란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제대로 본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난 대장금도 안봤다.  

 영화를 다 보고 나자 얼마전 봤던 샘 멘더스 감독의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떠올랐다. 멘더스 감독이 하나의 주제를 치밀하고 깊게 파고 드는 반면에 홍상수는 자잘한 주제를 스케치 하듯 훑고 지나기 바쁘다. 담론의 다양화는 홍상수 작품의 사생아이나 담론의 치열함은 샘 멘더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연기를 진짜 잘한다'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 특유의 즉흥 연기를 강조하는 촬영 방식 때문이다. 치열한 연기론이 확대 재생산 되기 보단 콘텍스트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수월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나온 디캐프리오와 윈슬렛의 연기는 격정적이며 살떨린다. 진짜 연기를 하는 듯하다. 치밀한 직조 과정 끝에 나온 튼실한 피륙이다. 드팀전에 내 놓고 팔기엔 다소 과한 정성이다. 홍상수의 가벼움은 다양한 변주로 커버가 가능하고 샘 멘더스의 무거움은 날카로운 한방으로 진정성을 확보한다.  

 말이 길었다. 영화는 감독의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다. 다만 주도권을 관객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몇몇 감독들의 작품을 우리는 예술영화라 부르곤 한다. 홍상수는 점점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영화를 만드는 듯하다. 박찬욱은 점점 대중과 괴리되며 예술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언젠간 두 감독의 영화관람객 수가 역전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찬욱의 외로이 되는 심사가 자뭇 불편하고 홍상수의 널리 이롭게 하는 심사가 꽤나 정겹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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잗다란 인생과

대거리 하다

눈물만 왈칵 쏟아진 날이 있습니다.

 

그리도 헐겁던 마음에

성마름이 더해져

속이 슬거운 당신이

곱다시 포개졌습니다.

 

재바르지 못한 심장이

사위어 갈까 저어하여

감나무 우듬지에 걸린 달에

무람없이 견주어 보며

 

이내 맘 다습게 해 준

당신 생각에

바지런 떨며

곡진히 임 얼굴 그리니

 

그대

가뭇없이 나를 잊어 버린다 해도

푼푼했던 이내 맘

구접스럽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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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05-1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요 ^^

바밤바 2009-05-13 20:59   좋아요 0 | URL
고마운데요 ^^

비로그인 2009-05-1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해야할 일이 하나 늘은 아침.

팍팍함이 밀려왔던 차에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밤바 2009-05-13 20:59   좋아요 0 | URL
좋은 하루 되세요~ 밤이 이미 깊었지만^^ㅋ
 
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인은 계급 상승 욕망이 강하다. 서구의 경우 군인은 전쟁을 담당하고 농부는 농사, 성직자는 종교적 의제, 귀족은 나름의 사회적 책무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사가 전개됐다. 계급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기에 계급 자체가 강한 특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은 양반이란 사회적 지위만 있으면 무위도식하며 민중을 수탈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이전 시대를 돌이켜 봐도 계급이 의무 보다는 권리에 초점이 맞춰진 일종의 지대추구와 같은 수탈적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여기저기서 양반 행세를 한 사례가 늘어난 것을 보면 민중의 계급 상승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지리학적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드물다. 또한 출산율이 높았던 편에다 공동체 생활을 통한 지식의 공유로 유아 사망률이 낮았다. 당연히 인구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대껴 살아온 역사는 ‘관계’라는 개념에 대한 대중의 민감성을 높였다. 또한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자연히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이 높았을 테다. 한마디로 인간관계에서 사회적 위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공동체 속 다른 일원과의 비교나 자연스레 발생한 질투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음을 알게 한다. 최소한 이웃집 누구 보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사회는 계급이 없다. 단지 자본이나 권력을 척도로 사회적 지위의 규명이 가능하다. 사농공상의 풍조가 남아있어선지 자본 보다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직은 강한 듯하다. 이러한 권력을 얻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합법적인 방법은 교육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자격증 몇 개와 같은 실질적 능력을 뜻하기 보다는 학벌과 같은 상징 자본에 기여하는 형태를 말한다. 자식이나 혹은 본인이 명문대에 입학하면 주위 사람의 시선부터 달라지는 게 현실이다. 현대식의 계급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강준만은 학벌의 폐해로 끼리끼리 해먹는 ‘학연’문화를 든다. 소수 학교가 고위 공무원을 독식하다 시피 하고 사회적 노른자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물론 개별자의 능력 차이도 원인이다. 하지만 학연으로 이어진 배타적 상호부조의 탓도 크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강준만은 SKY라 불리는 명문대 정원을 축소를 주장한다. 정운찬이 이야기 했듯 인구 3억인 미국의 상위권 10개 사립대학이 한 해 배출하는 학생이 1만 명 남짓인 데 비해, 인구 4900만인 한국의 상위권 세 대학 신입생 수가 해마다 1만5000명에 육박한다며. 이런 ‘대중교육’으론 명문대들이 되뇌는 ‘고등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물론 본인도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란 건 안다. 오히려 근본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근본주의자는 비판에 비판만 계속할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며 그들 주장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한다. 스카이 대학 정원을 줄이면 학연 문화의 폐해를 줄이며 다른 대학의 발전을 가져 올 거라 본다. 수능 시험을 잘 치루지 못한 아이들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하다며.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학벌이 제공하는 독점적 지대 때문에 자기계발에 소홀해지고 명문대를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패자라는 낙인이 찍혀 패배감에 제 실력 발휘를 못하는 현상도 개선된다는 주장도 곁든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명문대 독식 현상이 해결되면 사교육에 투입되는 많은 돈이 가처분 소득으로 전환되어 내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우석훈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자성이 없이는 이러한 개선 또한 실효가 크지 않을 것이다. 정치학자 버나드 코헨이 이야기 했듯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제설정 기능이다. 지방대 출신의 누군가가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신문의 보도를 보자. 지방대 출신의 구직자는 이 보도를 보며 희망을 가질 것이다. 기실 이 보도가 주는 메시지는 절망에 가깝다. 가뜩이나 뉴스거리가 많은 한국 신문에 커다랗게 보도가 될 정도면 희귀 사례라는 뜻이다. 뉴스가 될 만한 이슈의 가장 큰 충분조건은 희소성이다. 일상적으로 보도 되는 명문대 관련 기사는 다른 대학 관련 기사를 압도할 정도지만 독자는 그런 것을 눈치 채기 힘들다. 명문대 기사는 희소성이 없다. 화제성과 주목성이 있을 따름이다. 신문이 명문대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만 할 듯하다. 신문이 설정한 의제 설정 기능에 포섭되어 이른바 언론이 만든 프레임이 갇힌 것이다.

이 문장을 보자. 20세기의 한 정치철학자는 사회가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는 것은 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종의 ‘상식’으로 만드는 헤게모니 문화를 통해서라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문화헤게모니에 휘둘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이로운 것이 제게도 이롭다 여기게 되고, 그래서 부자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가치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만드는 문화헤게모니를 해체해야 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 철학자의 생각이다. 부자들의 헤게모니란 단어에 명문대 프레임이란 단어를 바꿔 넣어도 말이 된다. 이러한 헤게모니 강화는 언론을 통해 지속된다.

진보 언론 또한 이러한 명문대 프레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술자리에서 만났던 한겨레 김 모 기자의 말에 따르면 한겨레신문 구성원의 대다수는 명문대 출신이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 프레임을 강화하는 주요 언론의 현실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명문대 위주의 입시를 강요하는 학원가의 문제만 지적할 따름이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학벌의 장벽이나 학벌 카르텔이 가져다주는 문제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으로 빈부격차와 함께 사교육 시장의 문제만 제기할 뿐이다. 학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반성의 시각은 부재한다. 그들도 학벌이 주는 후광효과의 수혜자인데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 성취한 성취지위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테다.

강준만 교수는 종종 서울대의 독과점을 비판하며 서울대의 자성을 촉구한다. 이에 대해 강준만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한마디로 열등감의 소산이라는 거다. 매우 저급한 논리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가산점 문제는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억울해서 그런 것이고 장애인 복지 확충에 대한 장애인의 요구는 비장애인에 대한 시샘 때문이다. 한마디로 발전적 논의로 나가지 못하고 어떠한 주장도 같은 논지로 반박하면 되는 편리하고도 위험한 방식이다. 이미 1인 매체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지방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그를 보라. 언행일치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다. 반미주의자지만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하며 아이를 미국에 유학 보낸 지식인과는 차원이 틀리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이런 어쭙잖은 지식인에게 언행일치의 부재함을 비판하면 이런 말을 종종 한다.

“애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그 나라를 알아야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하지.”

이런 개소리나 할 거면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포지셔닝 전략으로써의 좌파 지식인이란 명함도 버리라. 역겹다. 고종석이 이야기 했듯 역겹다는 말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미적 판단이다. 악한 사람이라기보다 못생기고 못난 사람이란 뜻이다. 추함에 대한 본능적 기피로써 나온 말이다.

강준만 같은 사람이 열 명만 더 있으면 우리나라의 품격은 아마 선진국 중 가장 밑바닥에 있는 어느 나라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국가적 순위 싸움이 아닌 그냥 강준만 교수에 대한 애정에서 하는 첨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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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산 이야기 - 불황기 10배 성장, 손대는 분야마다 세계 1위, 신화가 된 회사
김성호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다른 자기 개발서를 표방하며 같은 이야기를 한다. 결이 다를 뿐 이야기의 고갱이는 같으니 굳이 책을 낱낱이 살필 필요는 없다. 지루하진 않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가 결여된 어느 기업의 이야기로 보면 되겠다. ‘하면 된다’는 명제는 전직 불도저 이 대통령을 생각나게 한다. 이 대통령을 철학을 좇거나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이 책의 억지는 대략 이런 식이다. 일단 부딪혀라. 무조건 열심히 해라. 삶의 목표는 성공이다. 2류가 1류가 되려면 1류 보다 2배는 넘게 일을 해라.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사장은 생각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창조 경영이 핵심이다 뭐다 하는 세간의 언어도 이 책에 따르면 노력하지 않는 자의 비겁한 수사학이다. 숨이 턱 막힌다.

혹여나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 나머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분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진정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들을까요. 이미 그대의 인생엔 과부하가 걸려 있다고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산다면. 어중간한 말 따윈 다 비겁한 변명으로 여기는 이런 분위기의 회사에서 산다면. ‘왜 사는 가?’냐는 생의 본질적 문제를 마주하게 될 듯하다. 젊음은 노후를 위해 노후는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의 질곡. 가볍게 산 자들을 채찍질 하는 붉은 문구의 향연. 좀 허술하고 헤프게 살자. 다들 인생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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