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인은 계급 상승 욕망이 강하다. 서구의 경우 군인은 전쟁을 담당하고 농부는 농사, 성직자는 종교적 의제, 귀족은 나름의 사회적 책무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사가 전개됐다. 계급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기에 계급 자체가 강한 특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은 양반이란 사회적 지위만 있으면 무위도식하며 민중을 수탈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이전 시대를 돌이켜 봐도 계급이 의무 보다는 권리에 초점이 맞춰진 일종의 지대추구와 같은 수탈적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여기저기서 양반 행세를 한 사례가 늘어난 것을 보면 민중의 계급 상승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지리학적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고 평지가 드물다. 또한 출산율이 높았던 편에다 공동체 생활을 통한 지식의 공유로 유아 사망률이 낮았다. 당연히 인구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대껴 살아온 역사는 ‘관계’라는 개념에 대한 대중의 민감성을 높였다. 또한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자연히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이 높았을 테다. 한마디로 인간관계에서 사회적 위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공동체 속 다른 일원과의 비교나 자연스레 발생한 질투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음을 알게 한다. 최소한 이웃집 누구 보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사회는 계급이 없다. 단지 자본이나 권력을 척도로 사회적 지위의 규명이 가능하다. 사농공상의 풍조가 남아있어선지 자본 보다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직은 강한 듯하다. 이러한 권력을 얻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합법적인 방법은 교육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자격증 몇 개와 같은 실질적 능력을 뜻하기 보다는 학벌과 같은 상징 자본에 기여하는 형태를 말한다. 자식이나 혹은 본인이 명문대에 입학하면 주위 사람의 시선부터 달라지는 게 현실이다. 현대식의 계급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강준만은 학벌의 폐해로 끼리끼리 해먹는 ‘학연’문화를 든다. 소수 학교가 고위 공무원을 독식하다 시피 하고 사회적 노른자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물론 개별자의 능력 차이도 원인이다. 하지만 학연으로 이어진 배타적 상호부조의 탓도 크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강준만은 SKY라 불리는 명문대 정원을 축소를 주장한다. 정운찬이 이야기 했듯 인구 3억인 미국의 상위권 10개 사립대학이 한 해 배출하는 학생이 1만 명 남짓인 데 비해, 인구 4900만인 한국의 상위권 세 대학 신입생 수가 해마다 1만5000명에 육박한다며. 이런 ‘대중교육’으론 명문대들이 되뇌는 ‘고등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물론 본인도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란 건 안다. 오히려 근본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근본주의자는 비판에 비판만 계속할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며 그들 주장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한다. 스카이 대학 정원을 줄이면 학연 문화의 폐해를 줄이며 다른 대학의 발전을 가져 올 거라 본다. 수능 시험을 잘 치루지 못한 아이들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하다며.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학벌이 제공하는 독점적 지대 때문에 자기계발에 소홀해지고 명문대를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패자라는 낙인이 찍혀 패배감에 제 실력 발휘를 못하는 현상도 개선된다는 주장도 곁든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명문대 독식 현상이 해결되면 사교육에 투입되는 많은 돈이 가처분 소득으로 전환되어 내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우석훈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자성이 없이는 이러한 개선 또한 실효가 크지 않을 것이다. 정치학자 버나드 코헨이 이야기 했듯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제설정 기능이다. 지방대 출신의 누군가가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신문의 보도를 보자. 지방대 출신의 구직자는 이 보도를 보며 희망을 가질 것이다. 기실 이 보도가 주는 메시지는 절망에 가깝다. 가뜩이나 뉴스거리가 많은 한국 신문에 커다랗게 보도가 될 정도면 희귀 사례라는 뜻이다. 뉴스가 될 만한 이슈의 가장 큰 충분조건은 희소성이다. 일상적으로 보도 되는 명문대 관련 기사는 다른 대학 관련 기사를 압도할 정도지만 독자는 그런 것을 눈치 채기 힘들다. 명문대 기사는 희소성이 없다. 화제성과 주목성이 있을 따름이다. 신문이 명문대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만 할 듯하다. 신문이 설정한 의제 설정 기능에 포섭되어 이른바 언론이 만든 프레임이 갇힌 것이다.

이 문장을 보자. 20세기의 한 정치철학자는 사회가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는 것은 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종의 ‘상식’으로 만드는 헤게모니 문화를 통해서라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문화헤게모니에 휘둘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이로운 것이 제게도 이롭다 여기게 되고, 그래서 부자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가치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만드는 문화헤게모니를 해체해야 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 철학자의 생각이다. 부자들의 헤게모니란 단어에 명문대 프레임이란 단어를 바꿔 넣어도 말이 된다. 이러한 헤게모니 강화는 언론을 통해 지속된다.

진보 언론 또한 이러한 명문대 프레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술자리에서 만났던 한겨레 김 모 기자의 말에 따르면 한겨레신문 구성원의 대다수는 명문대 출신이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 프레임을 강화하는 주요 언론의 현실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명문대 위주의 입시를 강요하는 학원가의 문제만 지적할 따름이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학벌의 장벽이나 학벌 카르텔이 가져다주는 문제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으로 빈부격차와 함께 사교육 시장의 문제만 제기할 뿐이다. 학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반성의 시각은 부재한다. 그들도 학벌이 주는 후광효과의 수혜자인데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 성취한 성취지위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테다.

강준만 교수는 종종 서울대의 독과점을 비판하며 서울대의 자성을 촉구한다. 이에 대해 강준만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한마디로 열등감의 소산이라는 거다. 매우 저급한 논리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가산점 문제는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억울해서 그런 것이고 장애인 복지 확충에 대한 장애인의 요구는 비장애인에 대한 시샘 때문이다. 한마디로 발전적 논의로 나가지 못하고 어떠한 주장도 같은 논지로 반박하면 되는 편리하고도 위험한 방식이다. 이미 1인 매체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지방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그를 보라. 언행일치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다. 반미주의자지만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하며 아이를 미국에 유학 보낸 지식인과는 차원이 틀리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이런 어쭙잖은 지식인에게 언행일치의 부재함을 비판하면 이런 말을 종종 한다.

“애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그 나라를 알아야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하지.”

이런 개소리나 할 거면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포지셔닝 전략으로써의 좌파 지식인이란 명함도 버리라. 역겹다. 고종석이 이야기 했듯 역겹다는 말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미적 판단이다. 악한 사람이라기보다 못생기고 못난 사람이란 뜻이다. 추함에 대한 본능적 기피로써 나온 말이다.

강준만 같은 사람이 열 명만 더 있으면 우리나라의 품격은 아마 선진국 중 가장 밑바닥에 있는 어느 나라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국가적 순위 싸움이 아닌 그냥 강준만 교수에 대한 애정에서 하는 첨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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