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도 못할 말이
목구멍까지 넘친 적이 있다.
꼬깃꼬깃 쟁여둔 돈을
손주 손에 쥐어주는 어느 할아비처럼
정겹지만 버성긴 그런 마음이다.

사람 너울 뒤집어쓰고
제 마음 푼푼하자며
상글상글 웃는 그이 가슴에
부러 침 몇 번 뱉은 적 있다.
다 내가 불민한 탓이라 여기면서도
다시 돌아보게끔 하는 그대가 있다.
조붓한 골목길
휘청거리다
엄전한 네 자태가 그리도 샘이 나
애써 객쩍은 소리하며
헤살을 놓았다.

권여선의 글처럼
그 하찮음의 무게가 우주와 맞먹는다 하더라도
곱다시 눈물 닦아주면
모진 마음에도 하늘이 고인다.
네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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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8-07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단어선택이 훌륭하시네요. 평소에 말씀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 참 말이 예쁘다.
여자분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같기도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흐흐

바밤바 2009-08-07 21: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헤헤. 제 말에 먹물냄새 난다고 진저리 치는 형님의 영향인지 입말과 글말이 다소 다르긴 합니다. ㅎ 근데 할아버지같다고 하니까 의외네요. ㅎ

비로그인 2009-08-07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리내 읽을 수가 없어 좀 아쉽네요..ㅎ
들를때마다 올리신 들을 다시 읽어보는데 참 맛깔나더라구요.
곧 비가 오려는 하늘이지만 덕분에 잠시나마 맘이 뽀송뽀송해집니다.


바밤바 2009-08-07 22:00   좋아요 0 | URL
저도 써클님 음반 리뷰 보면 마음이 다스워진답니다.
좋은 글 많이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비는 생각보다 늦게 내릴 듯하네요^^ㅋ

무해한모리군 2009-08-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적한 날에 잘 어울리는 글이네요.
정겹지만 버성긴 마음이 문득 떠올라 마음이 살짝 아리기도 하고..

바밤바 2009-08-07 22:02   좋아요 0 | URL
뭐 누나야 이제 봄날이니까.. ㅎ
정겨운 날만 가득하시길~ ㅋ
 

 

 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거린다. 왠지 외로워 보인다. 나르키소스에 관한 신화 때문일 테다.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는 갓 태어난 그에게 “제 자신을 모르면 오래 살 것”이란 말을 했다. 미남으로 성장한 나르키소스에게 많은 사랑이 쏠린다. 허나 그는 관심이 없다. 사랑을 거절당한 아메이니아스는 심장이 멎는다. 에코는 남의 말만 되풀이 한다. 그에 대한 사랑과 함께 분노도 커져 갔다. 가질 수 없는 대상을 파고하고픈 욕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가 보다. 요정들은 복수의 신 네메시스에 의탁해 그에게 저주를 건다. 호수에 바투 다가앉은 나르키소스는 제 얼굴을 본다. 그리고선 사랑에 빠진다. 손이 닿을 때 마다 부셔지는 연모의 대상에 애달파 한다. 식음을 전폐하고 호수에 비친 제 모습을 탐닉한다. 빠져든다. 하데스에게로 가버린다. 수선화만 남긴 채.

 나르키소스는 꽃만 남긴 게 아니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도 남겼다. 프랑스 심리학자 알프레 비네가 1887년 처음 사용했다. “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페티시즘의 한 유형”이라 정의했다.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 대가들도 이 말을 곧잘 사용했다. 오늘날엔 거의 일상어가 되었다. 허나 이 말의 정의는 조금씩 다르다. 성의학 창시자 중 한명인 영국의사 헤빌럭 엘리스는 성도착증으로 규정했다. 주류 정신분석학자들은 성적 발달의 정상 단계로 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초식남이란 말의 정의도 잗다란 차이가 있다. 허나 나르시시즘이 강한 남자들이란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제 자신을 아끼다 보니 이성에는 관심이 덜하다. 자기 관리에 열중하느라 짐짓 쿨 해 보이기도 하다. 나르키소스와도 닮았다. 이성을 욕망하기 보단 자신을 욕망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이성의 관심을 가끔 받기도 한다. 다만 눈에 차지 않을 뿐이다. 알프레 비네의 말처럼 제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기에 자잘한 욕정은 쉬이 해소할지 모른다. 볼수록 나르키소스가 겹친다.

 그렇다고 초식남을 탓할 수 없다. 서로를 잘 믿지 못하는 풍조가 초식남을 양산했을지 모른다. 작가 박경리는 40년 전에, 이미 우리사회를 불신시대로 규정했다. 남을 믿지 못하면 믿을 수 있는 건 혈연이나 내 자신 밖에 없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알겠지만 빼앗긴 마음을 되찾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에 대한 애정은 제 의지로 키울 수 있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가 자신에게 천착하는 초식남의 뿌리가 아닐까. 육식남은 사냥을 위해 뛰어다니느라 온 몸이 생채기로 가득하다. 초식남은 제 울타리에서 덜 먹는 대신 덜 아프자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한다. 제 자신을 페티시즘의 한 유형으로 여기는 건 결국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다. 알다시피 인간은 밥만으론 살 수 없다.

 초식남은 가여운 존재다. 나르키소스는 일방적 구애나마 자주 받았다. 초식남은 대중에게 소외된 채 지난한 밤을 홀로 지새운다.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며 이상형이 짐짓 제 마음을 먼저 열어주길 바랄 뿐이다.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연상된다. 결국 이들에게 걸린 과한 나르시시즘의 저주는 제 자신이 걸어 놓은 겹겹의 방어막이다. 나르키소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생채기는 아랑곳 말고 사냥터에 나서야 한다. 사냥물의 뒷다리라도 물어야 이가 여물어 지고, 상대의 마음이라도 할퀴어야 발톱이 야물어 질 터. 부러 평원에 나가기 어렵다면 육식남들과 섭슬리는 일도 고려해 볼 만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과도한 외로움과 종족 번식 실패로 초식남은 멸종할게 자명해 보인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를 남겼지만 초식남은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초식남들의 밤이 외로움에 흔들린다. 하늘거린다. 왠지 처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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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8-06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밤바는 정서의 바탕이 참 단단하신 분인거 같아요.
바밤바의 밤도 외로움에 흔들리고 있는거 아니야?

바밤바 2009-08-06 21:41   좋아요 0 | URL
헤헤. 초식남 테스트 해보니까 90% 이상이라던데.. 누나는 건어물녀?ㅎ

무해한모리군 2009-08-07 11: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 생각엔 대부분의 여자들이 냄비째 라면 먹고 머리 질끈 묶고 돌아다니고 그러는듯 한데..

바밤바 2009-08-07 22:02   좋아요 0 | URL
역시 누나는 소 쿨~~ 멋져부러~~ 멋져부러~~ ㅎ
 

 올 해 본 책들을 애써 모아 봤다. 소설을 꽤나 많이 봤단 생각이 든다. 경제학 서적도 몇 권 눈에 띄고 자기계발 서적도 몇 권 있더라.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남경태 씨가 쓴 '역사'다. 덕분에 세상을 홑눈이 아닌 겹눈으로 보게 됐다. 아니 겹눈이 더 치밀해졌다. 다 덕분이다. 

 100권을 채우지 못한 건 내 게으름 탓일 테다. 이런저런 무리와 섭슬린 탓도 있을 테다. 영상을 좋아하다 보니 드라마나 영화에 몰두한 탓도 있을 테다. 다 변명으로 들릴 테다. 내가 나를 객관화 하자면 그럴 테다. 스타크래프트 탓도 있을 테다. 어쩌면 그게 가장 큰 듯하다.

 요즘 서정주 시인이 좋아졌다. 그의 시구를 곱씹으면 알싸한 환각이 든다. 저리 무뎌지는 가슴을 지필 수 있는 글귀를 남기고 싶다. 그의 시를 말로 읊는다. 잔상이나마 남기려 그런다. 친일행각이란 과오도 문장을 더럽히진 못하다.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그의 비겁함도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다 내 구접스런 성정 때문이다. 서정주의 글귀가 아기처럼 눈에 박힌다. 지금도 울린다.
참고로 그는 자신을 ‘종천순일파’라 했다. 말이 많으니 애처롭다. 먹먹하다. 나름 곡진한 사연으로 끌탕했을 터. 뒤태가 방불히 눈에 밟힌다. 허랑하다.

 동아일보에서 연재하는 걷기에 관한 시리즈는 참 좋았다. 제주도에서 느낀 잗다란 덩어리들을 누군가는 말로 풀어 글로 쓰고 있었다. 글쟁이들이 좋다. 동아일보 또한 서정주마냥 때 묻은 무언가가 되었다. 그래도 동아의 경제면과 가끔 나오는 기획 기사가 좋다. 분석적이고 교양을 살찌운다. 사설에 나오는 단정치 못한 논리는 웃음을 준다. 칼럼에 나오는 방어기제의 드셈은 연민도 가게 만든다.

 그렇다고 매양 매도할 것만은 아닌 듯하다. 내가 매우 좋아하는 선배가 동아일보 기자라서 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내가 조중동의 프레임에 넘어갔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단정 짓기엔 내 안에 자리 잡은 자잘한 매듭이 뒤엉켰다. 곱다시 가닥만 잡아도 한세월이다. 내가 나를 덜 알기에 타인의 규정에 한사코 손사래 치기 힘들다. 그리고선 나는 말한다. 조중동을 무조건 싫어하는 프레임 또한 그대의 무의식에 작용하고 있다고. 뭐 그러다 보면 논쟁은 끝이 없다. 내가 말을 아끼거나 상대가 화를 내버리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진실로 성실한 지식인 앞에서 말할 계제는 아니다. 바람구두님이나 드팀전님 같이 내가 우러러보는 분들이 실로 저어하는 모양을 보면 내가 잘 몰라 그럴 수도 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그러면 모자란 내 마음도 조금은 푼푼해질지 모른다. 그리고선 이내 맘 다습해진다. 바투 다가앉아 그대 허벅지를 벤다. 비 기다리는 천수답에 물을 붓는다. 그대 시린 허리로 내게 마중물만 부어 주오. 파르르 떠는 가슴은 이미 네 것이 아니다. 칼로 도려내도 다 지워지지 못할 날이다. 우듬지에 걸린 해처럼 다 가뭇없이 사위어들 핏물이다. 바지런히 감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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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8-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다양하게 읽으시는 군여~ 언제 이걸 다 읽은겁니까...걍 부럽네요...ㅎㅎ

바밤바 2009-08-02 14:14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 글도 남겨 주시고 영광입니다^^ㅋ 그때 좋은 얘기 많이 해주셔서 감사~ ㅎ 아직 여물지 못해서 이런저런 책을 읽는 답니다. 하반기엔 좀 소홀해질 듯 하네요. 담에도 좋은 얘기 많이 해주세요~ㅎ

비로그인 2009-08-10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김애란, 김형경, 김 훈, 김영하.. 이런 모두 성이 같으시네요..목록을 살펴보니 반가운 이름들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다시 읽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김형경과 김훈은 제가 고른 인물들이고 다른 분들은 어떤 이의 선택이지요.

실로 정말 오랜만에 문학을 읽는 요즘, 저의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 달라졌음을 깊이 느낍니다. 과연 글은 글일뿐이며, 소설은 소설일뿐일까요?..

바밤바 2009-08-04 22:10   좋아요 0 | URL
글은 사람의 생각을 벼린 고갱이고 소설은 사회의 속살을 헤집은 또 하나의 글이겠지요~
김영하의 소설은 가볍고 유쾌하며 김애란의 소설은 통통튀며 조금 서늘하죠. 김연수는 열심히 쓴다는 생각을 들게 하고 김훈 씨의 소설은 문장이 맛깔나죠~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ㅎ
 
[수입] 사티 : 피아노 작품집 (짐노페디,녹턴 외)
이엠아이(EMI)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에릭 사티는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짐노페디일 테다. 영화 '여친소'에도 삽입되었다 하는 데 영화를 보지 않아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에릭 사티의 작품 중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벡사시옹 일테다. 메트로놈을 기준으로 하면 14시간이 넘게 연주된다는 이 음악은 같은 멜로디를 840번 연주해야 한다. 무한 반복의 괴로움이다. 어차피 벡사시옹이란 명칭도 '고통'이란 뜻이니 그리 나쁘지 않은 불림이다. 그는 이런 곡을 왜 만들었을까? 모를 일이다. 아마 어떤 멜로디가 금찍하게도 단속적으로 머리에 울렸나 보다.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허제씨가 지은 책에서 추천을 받고 산 음반이다. 허제씨는 별점 다섯개를 이 음반에 줬다. 사티 음반이 이 하나 밖에 없으니 좋고 그름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곡이 특이하니 차이도 잗다랄 테다. 2 for 1이니 그냥 집었다. 곡은 대충 이런 식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잔상이 몸을 훑는다. 딱히 떠오르는 멜로디도 리듬도 없다. 그냥 흐른다. 

치콜리니 연주다. 가끔 들릴 듯 말듯한 연주가 아롱거린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아무렇지 않게 뺨을 어루만지면 이렇듯 희미할 테다. 여름이 저문다. 가을이 눈을 뜨려한다. 소슬해질 마음에 사티의 선율이 얹혀진다. 마음이 가볍다.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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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8-0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벌써 여름의 저묾을 느끼시는군요..섬세한 눈이시네요^^
전 한 해, 한 해 여름이랑 친해지는 법을 배워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티를 들을 때마다 드뷔시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인상주의 흐름과는 조금 다른, 마치 물이 끊임없이 흐르며 가끔 몇 방울 튀는 느낌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사티는 최근에 타로가 낸 음반이 참 좋더군요.


바밤바 2009-08-01 21:25   좋아요 0 | URL
타로의 음반을 들어본 적이 없네요. ㅎ 다음주에 태풍이 찾아오면 여름도 서럽게 사위어들 것 같습니다. 가을엔 모든 게 다 풍성했으면 하네요^^